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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정은 Nov 13. 2019

서울의 유아 전집

미친 선행학습의 시작

서울에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면 전집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 전집을 사보지 않은 엄마도 드물 것이다. 첫째 아이가 돌 때 서울을 떠나긴 했지만, 나도 그 엄마들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한국을 떠나 다른 두 나라에서 아이를 키우며 돌이켜보니, 전집은 아주 특이한 한국만의 독서 문화이다.




도쿄의 유명 사립 요치엔(幼稚園: 유치원), 공립 요치엔, 외국인학교를 보내는 여러 일본 엄마들에게 물어보니 유아 전집은 존재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주변에 아무도 사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기도 없을뿐더러, 한국 같은 규모로는 더더군다나 없다고 하며 하나같이 "이런 걸 진짜 사?"하고 놀라는 모습이다. 영국과 미국에도 비슷한 "readers"라고 불리는 세트가 있지만 보통 열댓 권 내외의 같은 내용 시리즈물이고 초등학교 이상을 대상으로 나온다. 그 또한 실제 영국 미국 엄마들보다는 한국 엄마들한테 더 인기가 많다고 한다. 따라서 일본, 영국, 미국 등의 나라들에는 백과사전류의 시리즈물이 아닌 이상 우리나라 같은 유아전집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나라들의 엄마들은 단행본을 낱권으로 골라서 사는 것을 더 선호하고, 같은 책 몇 권을 읽고 또 읽어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적어도 미취학 아동, 즉 만 6세 이하한테는 말이다.


아이러닉 하게도 비슷한 내용을 하나로 묶어서 파는 전집의 시초는 일본이란다. 전집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 한국에서 유아 대상으로 나오는 전집들이 대개가 학습을 목적으로 나오는 거나 학습의 도구로 마케팅되는 것이 큰 문제이다. 이전의 "서울의 육아용품" 포스팅에서 다뤘듯이 한국의 소비자는 매우 까다롭기에 모든 상품들은 그에 맞춰 진화를 한다 하였다. 전집 업계도 이에 마찬가지로 오리지널 '전집'의 본질을 벗어나 매우 한국스럽고 극성맞게 변하여, 새로운 한국 특유의 획일화된 전집 카테고리를 창조하였다. 특히 그중에서도 유아 전집 업계는 오로지 양육자의 교육열과 출판업계의 상술로 명맥을 이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형적인 모습의 유아 전집 (사진출처: 네이버 검색. 특정 출판사의 책을 얘기하는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나는 '세 도시의 엄마" 시리즈를 시작하기 전에 런던, 서울 그리고 도쿄의 엄마들에게 같은 내용의 설문조사를 실시했었다. 설문 조사의 질문 중 하나는, 만 5세 이전에 유아동 책과 교재에 대략 얼마의 돈을 썼냐는 것이었다. 런던과 도쿄는 둘 다 60프로 이상이 70만 원 미만, 대다수가 많아야 총 150만 원 미만이었다. 그것에 반해 서울은, 대다수가 300만 원 이상을 썼고 그 300만 원 이상 중 절반 이상이 450만 원 이상을 썼다고 응답했다. 정말 충격적이지 않은가?


런던과 도쿄의 엄마들은 보통 돌 이전에는 20권 안팎으로 아기용 보드북이나 짧은 그림책을 사거나 빌려보고, 돌 이후 만 5살까지는 아이와 서점에 가서 한두 권씩 사거나, 도서관에서 빌려본다. 따라서 5년 동안 아무리 차곡차곡 읽고 쌓여도 정말 교육과 독서에 대한 열정이 과도한 부모가 아닌 이상 서울의 엄마들이 전집 몇 세트 산 양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내가 관찰한 바로는 그 정도로도 충분하고, 오히려 독서환경으로는 지나치게 많지 않은 양의 책이 아이에게 더 책에 대한 관심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또 내가 전집을 사보니, 훌륭한 도서도 많지만 그 와중에 내 판단으로는 유익하지 않고 퀄리티가 떨어지는 도서들도 섞여있었다. 나는 독서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독서는 너무나도 중요하고 교육의 필수적인 요소인데, 그것을 미취학 아동한테 한국식 정형화된 전집의 형태로 노출시키는 것이 조금 과도하다는 것이다.


문전성시 이루는 서울의 한 유교전 (사진 출처: 서울 국제 유아 교육전 웹사이트)


서울의 전집 판매량과 그 종류가 상징하는 것은 바로 서울 부모들의 과열된 조기 교육 현상이다. 여기서 교육이란, 오로지 지식의 습득만 일컫는다. 이것이 서울과 나머지 두 도시 엄마들의 극명하게 갈리는 차이점이다. 런던과 도쿄의 만 6세 이하 교육에는 지식의 습득 외에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포함된다. 나의 육체를 이해하는 것, 무엇을 이해하고 질문하는 방법, 정리 정돈 같은 생활 습관, 집안일하는 법, 자연의 이치, 나가서 땀 흘리고 뛰어노는 것, 예절 등등. 지식의 습득은 나중에 뇌가 더 크고 성숙한 학교를 가는 나이에 시작해도 늦지 않기 때문에 서울 같은 과도한 선행 학습은 없다. 런던과 도쿄의 유치원과 학교를 다니는 만 6세 이전의 아이들의 "선행"학습은 서울 기준의 선행의 언저리에도 미치지 못한다. 만약 서울의 일반적인 선행학습 정도로 시키는 엄마가 있다면 모두가 그녀를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할 것이다.


이와 반대로, 서울에서 유아 전집이 유행을 하고, 단계별로 나뉘고 하는 데에는 영어로 peer pressure이라고 하는 과도한 사회적 압력이 있다. 남들이 하는 것을 하지 않으면 뒤떨어질 것 같은 공포. 그래서 좋다니까 너도 나도 무의식적으로 따라서 하는 심리. 판매원이 내 아이의 나이에는 꼭 읽어야 한다는 그 책을 안 읽히면 내 아이만 후발주자가 될 것 같은 불안함. 다수에 의해 선택됐다는 이유 하나로 유아 전집은 당연한 것으로 굳어져, 이를 교육업계들은 마케팅 수단으로 너무나도 잘 악용하고 있다.


한 가지 슬픈 사실은, 이렇게 과도한 학습형 문화에 노출되어 자란 아이들의 나라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2000년 김대중 평화상을 제외하고는)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일본은 평화상을 제외하고도 27명, 영국은 평화상을 제외하고 120명이다. 내가 만나본 가장 ROI (Return on Investment: 투자수익률)에 민감한 엄마들이 사는 곳은 세 도시 중 서울인데, 이렇게 가성비가 떨어지다니 참 슬픈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 포스팅을 쓰려고 리서치를 하던 중, 발견 한 다소 자극적인 제목의 예전 중앙일보 기사 :

https://news.joins.com/article/17932254



서울 육아 용품 천국에서 배우는 선택의 역설:

https://brunch.co.kr/@jenshimmer/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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