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정은 Oct 26. 2019

서울의 육아용품

선택의 역설

전 세계 도시 중 미국, 유럽, 아시아 등지에서 생산된 가장 새롭고 기능 좋은 신제품을 재빨리 구할 수 있는 단 한 곳이 있다면 어디일까? 그건 바로 서울이다. 서울 소비자들은 까다롭고, 신제품으로 빠르게 업그레이드하며, 품질과 절대 타협하지 않는다. 그런 도시에서 아기를 키우는 엄마들은 누구보다 더 까다롭고 더 발 빠르게 새로운 육아용품을 찾아낸다. 아직 한국에 수입되지 않은 신제품도 해외에서 직구해서라도 사고야마는 리서치의 천재들 모여사는 도시이다.


서울은 극도로 빠르게 성장한 탓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경쟁에 익숙하다. 새로운 뉴스와 신제품에 관해서라면 먼저 손에 넣기 위해 모두가 레이더를 켜고 있는 것만 같다. 따라서 유행이 심하고,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그 유행에 뒤떨어지지 않으려는 심리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엄마들의 세계에도 적용된다. 옆집 여자가 어떤 유모차를 미는지, 식당 옆 테이블의 아이가 어떤 물병을 쓰는지, 자기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남의 물건과 선택에 엄청난 주의를 기울인다.


서울에 사는 엄마라면, 국민 육아용품이라는 것을 당연히 안다. 물론 “국민”이라는 단어를 붙임으로써 회사들의 마케팅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지만, "한국 엄마들이 검증한"이라는 숨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엄마들의 선택을 받기 위하여 업체들은 더 경쟁을 하게 되고, 그 결과로 인해 초이스가 더 많아진 엄마들은 그만큼 사소한 육아용품 하나하나에 마치 전문가 같은 지식을 갖게 되었다.


서울 엄마들은 이런 무한 경쟁과 무한 선택 옵션에 익숙하여 마치 모두가 경제학자인 마냥 return on investment(투자 수익률)에 민감하다. 그래서 관련 업체 모두가 앞다투어 가격 대비 더 좋은 성능을 제공하고자 신제품을 쏟아내며 경쟁을 한다.






처음 런던에 이사해서 기저귀와 물티슈를 사는데 그렇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큰 마트에 가도 기저귀나 물티슈의 종류가 고작 두세 개 정도뿐이었다. 자연친화적 브랜드 하나, Pampers (한국의 하기스 같은), 그리고 마트 브랜드.


도쿄도 마찬가지다. 많아야 세네 개.

반면 서울은 어떠한가? 한국 브랜드만 기본적으로 네다섯 개에, 거기에 유럽산, 일본산, 미국산까지. (심지어 계절별, 성별별로 섬세하게 분류하여 판매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매번 또 다른 신제품이 출시되는 곳은 런던도 도쿄도 아닌 서울이다.


서울의 흔한 대형 마트




(광고 아님 주의) 미국의 유명 방송 중 Shark Tank라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이 있는데 2016년 그 프로에서 펀딩을 받아 성공한 EZPZ라는 실리콘 흡착 식판 업체가 있다. 이 식판은 그 쯤 시작된 '아이 주도 이유식' 유행과 맞물려 엄청나게 성장을 했다. 작년 여름 나는 둘째가 이유식을 시작할 무렵 아이 주도 이유식을 해보려고 알맞은 그릇을 찾다가 EZPZ를 발견하고서 일본 아마존에서 미국의 두배 가격을 주고 어렵게 구하였다. (도쿄 엄마들은 2019년 지금까지도 '아이 주도 이유식'을 잘 모르고 국제적인 유행에 관심과 정보가 없기 때문에 외국의 육아용품이 항상 더 비싸다.)


그 후로 1년이 지난 올해 여름, 나는 한국 친정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 방학기간 동안 머무르기 위해, 필요한 육아용품을 한국 인터넷으로 주문하여 친정으로 배달시키기로 했다. 서울로 떠나기 전 인터넷을 검색한 나는 검색 결과를 믿을 수가 없었다. 오리지널 EZPZ는 물론이고, 그 후로 나온 수많은 다른 미국 업체들 및 한국 업체들의 상품 검색 결과가 끝도 없이 펼쳐졌다. 심지어 오리지널을 미국보다 싼 가격에 구할 수도 있었다. 식판 하나를 위한 선택의 폭이 얼마나 넓던지, 결정을 하기가 너무나도 힘들었다.


한국의 업체들은 단순 짝퉁을 넘어서서 심지어 오리지널보다 (간혹 더 비싼 가격일지라도) 더 좋은 품질과 성능을 제공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의 엄마들의 발 빠른 정보와 까다로운 취향에 맞춰 업체들도 진화하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내가 발견한 점은, 흡착 식판 외에도 거의 모든 육아용품에는 오리지널과 흡사하거나 더 발전시켜 만든 한국 버전(심지어 여러 종류)이 있다는 것이다. 기내 반입 유모차, 아기침대, 아기띠, 우유병 등 제품의 부류를 막론하고 소비자한테 제공되는 선택의 범위는 넓어도 지나치게 넓다.


그게 그거가 아니다



The Paradox of Choice(선택의 역설)의 저자 Barry Schwartz (배리 슈워츠) 교수는 산업화된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수많은 선택 가능성으로 인해 더 불행해졌다고 하였다. 존재하지도 않는 "완벽한 선택"을 위하여 고민하고 고민해서 한 나의 선택이, 최선의 선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선택하지 않은 나머지를 떠오르게 함은 물론이요, 더 나은 무언가가 있을 것 같은 착각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가제수건은 일본문화이고, 아기침대는 서양에서 넘어온 문화이다.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가난했던 한국에는 특별한 육아용품이라는 게 포대기 정도밖에 없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지금의 육아용품 천국은 정말 놀라운 변화다. 그 당시에는 아이를 "육아용품"을 사용하여 키우는 엄마는 매우 특별한 사람으로 주변의 부러움을 샀을 것이다.


그동안 서울 시민들에게, 또 나아가 한국 사람들에게는, 선진국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물질의 풍요였다. 더 이상 물질의 풍요만이 "내가 잘 살고 있다"는, "아이를 잘 키우고 있다"는 증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식의 속도는 경제발전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였다.


그래서 서울의 엄마들은 수많은 육아용품 선택에 파묻혀있음에도 불구하고 만족을 못한 채 더 새롭고 좋은 상품을 찾아 오늘도 경쟁한다.





The Paradox of Choice (선택의 역설), 배리 슈워츠 교수의 2005년 TED 강연.

시간이 있으면 꼭 보기를 바란다. (자막 옵션에 한국어 있음)

https://www.ted.com/talks/barry_schwartz_on_the_paradox_of_choice?language=en


이전 04화 도쿄의 마마챠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