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정은 Oct 31. 2019

도쿄의 조미료

시간을 아낄 수만 있다면


런던에서 잘 알고 지내던 도쿄 출신의 일본 엄마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도쿄로 이사하게 되어, 도쿄에 오자마자 만났게 되었다.


나: 이유식용 육수 우릴 때 쓰는 고기나 뼈 부위는 마트 가서 일본어로 뭐 달라고 하면 돼?

친구: 육수 내는데 왜 고기를 써?

나: 그럼 뭘 쓰는데?

친구: 비프스톡이나 치킨스톡이 있잖아. 나는 한 번도 고기를 사용해서 육수를 낼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




어쩐지 도쿄에 처음 와서 마트에 갔을 때 나는 항상 내가 원하는 상품을 찾기가 힘들었었다. 분명 비슷한 문화권(이라고 생각했었)인데도 물건의 종류나 다양성도 떨어지고, 고기는 조각조각, 야채는 낱개 또는 소묶음으로 판매되고 있었다. 


런던은 분명 전혀 다른 지역이었지만, 예를 들어 내가 삼계탕용 통닭을 원하면 손질된 통닭이 항상 진열되어있었고, 꼬리곰탕을 끓이고 싶으면 동네 정육점에 가서 아저씨한테 소꼬리를 큼직하게 원하는 무게에 맞춰서 썰어달라고 하면 됐었다. 양식을 요리할 때도, 어느 마트에서나 그 지역산 원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투박했지만 자연스러웠고, 판매자와 내가 다른 음식을 먹고 자랐어도 우리가 생각하는 "음식"과 "요리"의 의미가 같았다. 


도쿄에서도 이런 "from scratch" 요리가 불가능한 건 아니겠지만, raw material(날재료)을 구하려면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한다. 통닭을 원하면 미리 며칠 전에 가서 예약을 해야 하고, 꼬리곰탕은... 시도도 안 해봐서 모르겠다. 모든 고기는 부위별로 아주 작게 조각내져 플라스틱이나 스티로폼에 랩으로 쌓여있고, 모든 야채는 이미 흙이 한번 세척된 후 반짝이는 비닐에 포장되어 있다. 이처럼 모든 상품은 사람의 손을 거쳐 어느 정도 가공된 상태다.


가장 천연이어야 할 식재료들이 가장 천연에서 멀어진 자태를 한껏 뽐내 보인다. 그렇게 내 눈에 보인 도쿄 인들은 음식 본연의 모습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반짝이는 도쿄의 마트


그런 도쿄의 마트에서 가장 다양한 셀렉션을 자랑하는 건 바로 조미료 섹션이다. MSG의 발명국이기도 한 일본은, 조미료의 왕국이라 그래도 과언이 아닐 만큼 거의 모든 음식이 조미료로 가미가 되어있다. (MSG가 몸에 나쁘다는 의학적 증거는 없다고 하지만) 쯔유, 폰즈 쇼유, 시로 다시, 콘소메, 이외에도 엄청나게 다양한 조미료가 있다. 


확실한 건, 도쿄인들은 내가 살아 본 다른 지역의 사람들보다 조미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없다는 것이다. 세계는 점점 "자연으로, 자연으로!"를 외치는데 왜 유독 일본만 돌도 안된 아기서부터 성인까지 조미료로 살아가는 것일까?




조미료는 미각을 돋우는 물질이지만, 사실 주부/엄마의 삶에서 조미료가 가장 크게 선사하는 바는 조리시간을 단축하는 것이다. 저번에 나는, 도쿄의 엄마와 아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의 세트라고 설명했었다. 단순하게 물리적인 관점에서만 보아도 이는 초인적인 힘을 갖고 있다고 하여도 엄청난 노력과 희생을 요한다. 실제로, 한 통계에서 수집된 정보에 의하면 평균적으로 미국 엄마는 1주일에 24시간 아기와 떨어져 있는 것에 반해 일본 엄마는 1주일에 아기와 2시간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다고 한다.* 집안의 모든 살림과 아이의 모든 것을 하나부터 열까지 관리를 한 다는 것은 굉장한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다. 도쿄의 엄마들은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간다고는 하지만 그들도 결국 인간이고, 분명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도쿄의 과도한 조미료 사용이 힘든 엄마들의 일상과 상관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도쿄 생활에 익숙해지고 일본 친구들이 많이 생기면서 조미료를 몇 개 소개받았다. 규동으로 메뉴를 정하고 저녁 준비를 한다고 하자. 베이스가 되는 덮밥소스를 만들려면 설탕, 간장, 청주와 물의 비율을 맞춰야 한다. 이 자체도 한식에 비해서는 매우 간단하지만, '쯔유'라는 마법의 조미료를 사용하면 물에다가 쯔유 한두 스푼만 타면 완성이다. 이 '쯔유' 몇 스푼이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우동국물이 되고, 또 다른 조미료인 '시로 다시' 몇 스푼이면 멸치육수의 달인이 끓인 것 같은 깊은 맛의 샤부샤부 국물이 완성된다. 모든 음식이 라면처럼 인스턴트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맛있다. 이런 달콤한 유혹이 또 있을까?




도쿄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외국인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일본 엄마들의 육체적 희생은 참으로 갸륵할 정도다. 그런데 육아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인 먹는 것에는 다른 가사 노동에 비해서 시간과 에너지를 현저하게 덜 쓴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한 줄 알았지만 "요리"라는 진부한 토픽을 가지고 또 하나의 크나 큰 차이를 발견했다. 그래도 아이의 성장에는 크게 상관이 없나 보다. 왜냐하면 이렇게 대충(?) 먹고 자란 아이들의 나라가 전 세계에서 가장 장수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올해 초, 뉴욕타임스지에 실렸던 일본 워킹맘의 일상이 얼마나 고된지에 관한 기사:

https://www.nytimes.com/2019/02/02/world/asia/japan-working-mothers.html





*조사 내용에 관한 출처. 정확한 citation은 블로그 하단에 있다 :

https://www.brianlosullivan.com/blog/japanese-parenting-style/

이전 06화 런던의 펍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