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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정은 Nov 06. 2019

런던의 박물관

모두가 문화인으로 자라다.

2001년 12월, 영국은 자국의 거의 모든 국립 박물관과 미술관의 입장료를 정부 소속 문화부(Department of Culture, Media and Sport)가 부담하기로 하면서 대중에게 무료로 개방하기로 했다. "약탈해 갔기 때문"이라는 보편화된 인식과는 달리, 공식적인 영국 정부의 입장은, 더 다양한 계층의 관람객을 유치하기 위하여 (in order to have a more diverse range of visitors)였다. 그리고 그 의도가 정확히 뭐였던 간에, 그 공식적인 목적을 달성하였다. 런던 내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조사한 통계만 해도 2001년에서 2011년까지, 입장료를 무료화한 지 10년 만에 평균 151프로가 증가하였고, 매해 관람객 수는 신기록을 경신하고 있으며, 다 수는 관광객이 아닌 런던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다.*


런던과 같이 고퀄리티의 세계적인 미술관과 박물관이 다양하게 있는 도시가 그 상설전을 무료화 한 것은 실로 엄청난 문화적 혜택을 대중에게 선사한 것이다. 어느 문화공간이든지 간에 큰 관심이나 목적이 없는 사람들은 보통 두 번 이상 요금을 지불하고 같은 곳에 가지 않게 된다. "나 여기 갔었음, 체크." 이런 심리가 모두에게 어느 정도 있다는 말이다. 영국의 박물관 무료화는 이런 심리적 저항을 없애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실제로 나는 런던에 살면서 심심하면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갔다. 할 일이 없을 때도 가고, 갈 일을 만들어서 가기도 하고, 친구와의 약속을 미술관에서 잡기도 하고, 키즈카페 대신에도 나는 아이를 데리고 박물관에 갔다. 런던에는 대단한 대형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아니더라도 곳곳에 작은 박물관들이 침투해있다. 콧대 높을 것 같은 백 년, 2백 년도 넘은 역사적인 건축물의 유명 박물관들도 평일에는 느긋하게 전시를 즐기러 온 노인들, 나 같이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엄마들, 어린 학생들 등으로 자유롭고 여유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2016년  어느 평일 오후, 내셔널 갤러리에서. 실제 명화를 앞에 두고 자기집인 마냥 그림 연습을 하시는 할아버지.


같은 작품이나 물품을 질리도록 자주 본다면 교과서적인 이미지 말고, 나 자신의 이미지와 느낌으로 내 머리에 저장할 수 있다. 그래서 그 덕분에, 나는 세계적인 거장들의 미술품과 그 공간들을 마치 매일 보는 거실과 거기에 걸린 그림 마냥 익숙해진 느낌으로 알아갈 수 있었다. 책으로 보던 수많은 작품들을 원할 때 아무 때나 실물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너무 감격스러운 혜택이었다. 고작 2년 산 내가 그랬는데, 런던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오죽할까.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습득한 그들의 문화적인 노련함을 그것에 그만큼 노출되지 않았던 사람은 결코 배울 수 없을 것이다.




런던의 옛 지하철 실물에서 놀고 있는 아들과 친구.

첫째 아이는 런던에 살던 동안 미술관도 많이 갔었지만, 정말 자주 갔던 곳은 코벤트 가든의 런던 교통 박물관과 켄싱턴의 자연사 박물관이다.


교통 박물관은 유일한 유료 박물관 중 하나인데 표를 한번 사면 1년 동안 무제한으로 재사용할 수 있다. 규모는 작지만 산업 혁명의 발생지인 런던의 교통수단의 발달 과정을 직접 체험하고 구경할 수 있다.




인간 때문에 멸종한 '도도'의 실물 박제 본 앞에서.

다윈을 비롯한 많은 과학자, 고고학자, 역사학자를 배출한 영국의 자연사 박물관은 두말할 것 없이 너무나 훌륭하고 멋진 공간이다. 건축물 자체로도 역사적인 곳이고, (그 안에 박제되어 전시된 동물들이 너무 불쌍하긴 하지만) 박제한 동물을 대규모로 전시하기 시작한 최초의 장소이기에 역사적으로도 그 의미가 깊다. 이처럼 런던의 아이들은 모두가 자연스럽게 역사와 문화와 예술과 과학에 풍부하게 노출되어 자라고 있었다.



그 외에도 런던에서는 빅토리아 앤 알버트(Victoria & Albert), 과학 박물관(Science Museum), 대영박물관(The British Museum), 내셔널 갤러리(The National Gallery), 테이트 모던(Tate Modern) 등 수많은 미술관과 박물관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관람"이라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런던인들은 문화 속에서 살고 있었다.




역사 깊은 영국인들의 컬렉션과 관람문화가 부럽고 존경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백 년, 2백 년 전쯤, 다른 여러 나라 사람들은 먹고살기 바쁘고 하루하루 견뎌내느라 꿈도 못 꾸었을 그런 수집과 전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그들의 조상들의 삶과, 조상 잘 둔 덕에 아기부터 노인까지 진정한 문화인으로 생활할 수 있는 런던인이 있을 수 있는 이유가 식민지화와 약탈 덕분이라는 설은 진실일 것이기 때문에. 


이유와 과정이 어찌 되었든 간에, 현재의 런던은 세계 어느 도시와 비교해도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곳이고, 그 풍요로움을 아이와 함께 누릴 수 있었던 시간들에 감사한다.








*2011년과 2016년에 쓰인 입장료 무료의 효과와 여파.

https://www.gov.uk/government/news/ten-years-of-free-museums

https://www.centreforpublicimpact.org/case-study/free-entry-to-museums-in-the-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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