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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정은 Nov 09. 2019

서울의 산후조리원

모두를 위한 이유 있는 사치

런던에서 둘째를 가졌을 때 우리는 도쿄행이 확정된 이후였다. 계획에서 많이 벗어나게 된 둘째의 임신 소식은 우리를 당황케 하였다. 런던에서 도쿄로 이사를 가는 과정 중에, 나 혼자 첫째를 데리고 서울에 가서 출산을 하고 도쿄로 옮기는 번거로운 일정이 추가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출산 장소를 서울로 정했다. 서울이 우리의 고향이어서가 아니라, 정말로 단순히 산후조리원 때문이었다.




나와 남편은 전통의학을 그다지 믿지 않는다. (개인적인 의견이니 한의사분들 계시다면 죄송합니다만) 우리는 둘 다 자라나는 과정에서 딱히 한방에 노출되었던 것도 아닐뿐더러, 실험과 연구가 풍부한 양의학을 더 신뢰한다. 하지만 산후조리라는 개념은 철저히 한의학에 기반한 것이다. 예전부터 우리나라 할머니들은 어디가 아프면 산후조리를 잘하지 못해서 산후풍이 온 거라는 얘기를 한다. 산모는 한여름이라도 에어컨을 틀면 안 되고, 찬 음식을 먹어도 안되고, 여러 가지 과학적으로 근거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도 모르겠는 내용이 많다. 나는 그런 의미의 산후조리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서울의 '산후조리원'이라는 시설을 칭송하는 것이다.


런던의 출산은 NHS를 통해 국립 병원에서 무료로 하거나, 또는 몇만 파운드를 지불하고 아주 비싼 사립 병원에서 하거나 두 종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두 옵션 모두 출산까지만 책임질 뿐, 그 후에 산후조리라는 개념은 영국인에게는 없었다. 왕세손비 케이트 미들턴도 출산한 지 단 하루 만에 (셋째 때는 무려 7시간 만에) 하이힐을 신고 화장을 하고 품에 아기를 안고 카메라 플래시 세례 속에서 인사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 기사를 읽으며 그녀의 붓지 않은 고운 모습도 신기했었지만, 한편으로는 얼마나 쉬고 싶을까 안쓰럽기도 했다. 런던에서 만난 나의 친구들은 (자연 분만일 경우) 출산을 하고 보통 1-2일 뒤에 바로 집으로 갔다. 산후도우미(maternity nurse)를 고용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특히 첫째 아이가 있는 엄마들은 산후도우미한테 신생아를 맞기고 첫째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요리해주고 도시락 싸고 챙기기에 바빴다. 도우미가 없는 친구들은 출산 후 잘 관리를 하고 있나 나라에서 확인차 파견하는 간호사의 방문 외에는 모든 살림과 조리와 육아를 도맡아서 했다. 출산을 한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은 여성들이 말이다. (물론 런던은 아빠들이 육아와 살림에 아주 많이 참여를 한다는 차이가 있지만.)


도쿄의 사정은 그보다 아주 약간 나은 정도이다. 나은 이유라면, 보통 출산 후 3개월간 친정에서 지내기 때문이다. 산후조리원이라는 시설은 없고, 도우미를 고용하는 문화도 아니기 때문에 정말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친정에서 산후조리를 한다. (아주 드물게 있는 도우미는 시급제이고, 보통 신생아 목욕 비용 등은 추가로 계산한다) 일본 아빠들은 아기가 어릴수록 대부분 육아에 거의 참여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문화가 생겼는지도 모르겠지만 보통 출산 후 친정집으로 들어가 친정 엄마가 살림을 해주는 대신, 산모 본인이 알아서 몸조리와 신생아 육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첫째 아이를 서울에서 출산했던 경험이 유일한 출산 경험이었고 산후조리원이라는 시설을 맛본 나에게 한국이 아닌 타국에서의 출산은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것이 아닌 이상 굳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다고 나는 두 번의 조리원 경험을 했지만 그 흔한 조리원 동기가 생긴 것도 아니고, 조리원 내에서 아기 로션이며 마사지 추가며 여러 상술이 일어나는 것이 별로 맘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스트레스 없이 남이 해주는 밥을 먹으며 좋은 시설에서 쉴 수 있다는 게 이 모든 단점을 무시할 수 있게 하였다. 요리, 청소, 아기 목욕 등 내가 앞으로 아기가 성장할 때까지 하루도 빠지 않고 해야 하는 일들을 시작하기 전에 심신을 위로하고 단련시킬 틈을 주었다. 한마디로, 산후조리원은 나의 출산과 육아 사이에 버퍼링(buffering) 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했다. 그래서 나는 주저하지 않고 바로 한국행을 택했다.


(24시간 원격으로 접속되는 카메라 아래 있는 나의 둘째) 위생관리와 쾌적함은 산후조리원의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다.


아기 아빠에게도,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도 조리원은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신생아 때 대부분의 부모는 잠을 못 자고 쉬지를 못해서 엄청 예민해져 있는 상태인데, 출산 후 바로 그런 상황에 놓인다면 산후 우울증의 큰 원인이 될 수도 있을뿐더러, 가족 사이의 관계도 건강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조리원은 아기와 산모와, 나머지 사람들 사이에 어느 정도 물리적인 거리를 둘 수 있는 수단으로써의 역할을 한다. 가장 심약한 상태를 벗어난 이후에 나머지 가족을 만나도 되는 것이다. 평균적으로 2주쯤 조리원에 있기 때문에 너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시간이다. 산모는 몸을 회복하고 아기를 돌보는 모든 부분에서 잔소리 없이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아기는 24시간 전문가의 손길에서 안전히 보살핌을 받고, 나머지 가족과 지인들은 출산 후 어느 정도 산모와 아기가 안정을 찾은 후에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둘째를 출산했을 때에 첫 일주일은 첫째 아이가 너무 보고 싶어서 조리원에서 많이 울었었다. 하지만 두 번째 주로 들어서자 몸도 많이 회복되었고 언제 그랬냐는 듯 그 시간을 즐기게 되었다. 아마 집으로 바로 갔었다면 첫째에게 마음을 쓰고 챙기느라 둘째는 둘째대로 뒷전이 돼버리고 나의 회복도 더뎠을 것이다.


다른 나라 엄마들은 가장 바쁘고 힘들 시기에 나는 조리원 방에서 여유롭게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완벽 마스터 하였다.


저번에도 언급했듯이, 한국의 소비자는 세계에서 제일 까다롭고 그 덕분에 한국의 모든 상품과 서비스는 그 니즈(needs)에 맞춰 진화한다. 중국에도 조금씩 생기고 있다고 하지만, 전 세계 어떤 나라를 가도 한국의 산후조리원만큼 그 분야가 발달되고 보편화된 곳은 없다. 바로 옆 나라인 일본에는 전혀 없는 문화이거니와, 나의 서양 친구들은 "꼭 그런데를 가야 하나?" 하는 분위기였다. 그런 의미에서 산후조리원 이용은 사치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만약 조리원에 갈 수 있는 옵션이 있다면, 산모 본인뿐만이 아니라 아기를 포함한 가족 모두에게 2-3주간의 버퍼링 기간을 살 수 있는 것은 유익한 선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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