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정은 Nov 11. 2019

런던의 영어

진정한 용해 도가니


런던의 표준어는 Received Pronunciation(RP) 이라고 하는, 대부분의 BBC 뉴스 앵커와 페파 피그가 쓰는 바로 그 고상하고 우아한 억양의 영어다. 미국에서 살 때, 우연히 영국인을 만나게 되면 마치 내가 시골에 사는 애인데 서울에서 온 세련된 애를 만난 기분, 또는 난 평민인데 귀족 양반을 만난 기분이랄까? 영국인들은 그들의 말투 하나로 그런 우월함을 느끼게 하는 마법이 있다.


실제로 많은 미국 부모들이, 영국 만화인 페파 피그를 보여주는 이유 중 하나는 자녀가 그런 영국 액센트를 따라 하는 게 귀여워서라고 한다. 런던으로 이사하기 전, "그런 고상한 언어를 쓰는 귀족들의 나라로 가다니!" 설렘 반 긴장 반으로 갔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막상 런던에 가 살아보니, 이게 웬걸! 런던은 'melting pot'이라는 표현이 딱 맞을 정도로 온 세상 모든 영어 억양과 말투의 집합소였다. RP 억양이 있는 친구도 많았지만, 표준적인 억양이 무엇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런던에는 너무나도 다양한 종류의 영어가 존재했다. 한 나라의 수도가 그렇다니, 얼마나 신기한 현상인가?


런던에는 페파네 가족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대학교 졸업 후 뉴욕 맨해튼에서 일을 했었는데, 뉴욕도 정말로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하지만 국적이 다양한 것과 인종이 다양한 것에는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다. 뉴욕은 지구촌의 다양한 지역 출신 사람들이 몰려오는 곳이지만 그래도 어찌 되었든 미국인이 되고 싶은 사람들, 즉 미국 영어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몰려오는 곳이었다. 인종과 배경은 다르지만 결국은 다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거나 갖고 싶어 했다. 그나마 미국 치고는 액센트가 있는 외국인이 조금 더 많을 뿐이었다.


나는 미국에 살면서 교포가 아닌 한국인이라는 신분을 밝히면, 거의 항상 "You have no accent!"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그 말은 직역하면 "너는 특이한 말투나 억양이 없네!"이다. 아무도 구체적으로 "코리안 액센트"라고 하지 않는다. 즉, "액센트가 있다, 없다"라는 건 미국 영어를 기준으로 생긴 말인 것이다. 따라서 뉴욕이든 엘에이든 아무리 세계적인 도시더라도 미국 내에서는 얼마나 유창하고 자연스럽게 미국인스럽게 영어를 하냐가 매우 중요하였다. 액센트가 강한 사람은, 평생 외국에서 온 티가 나는 상태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런던에서는 반대로 모두가 액센트가 있었다. 그래서 RP도 하나의 액센트로 치부된다. 이렇듯 너무나도 다양한 액센트가 있기 때문에, 런던에서 미국식 "You have an accent!" 표현을 하려면 "액센트" 앞에 꼭 지역 이름이나 형용사가 붙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Indian accent (인도 억양), American accent (미국 억양), French accent (프랑스 억양), 등등. 그 이유는 런던의 인구는 영국인뿐만이 아니라 여러 국가 출신의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더욱더 놀란 점은, 런던인들은 굳이 RP를 표방하지 않고 "그래 나 이 지역에서 왔어!"라고 당당히 외치듯 자신의 액센트로 꿋꿋이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가장 큰 이유는 런던인들은 다양성을 인지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국(UK) 내에서만 37개의 방언(dialect)이 있다고 한다. 방언은 액센트와는 또 다른 것인데, 우리나라의 사투리 개념과 더 비슷하다. 액센트는 같은 방언 내의 다른 말투라고 할 수 있겠다. 수많은 방언과 수많은 액센트까지 그 작은 지역에서 몰려 사니 얼마나 다양한지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런던에서는, 어떤 액센트로 영어를 하냐 보다는, 어떠한 액센트가 있더라도 얼마나 정확한 문법으로 설득력 있고 고급진 어휘력을 구사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서양권이라고는 미국에만 익숙했던 나에게, 런던의 이런 점은 너무나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또한, 너무 다양한 민족과 국적이 섞여 살다 보니, 내가 외국인인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진정으로 인터내셔널 하였고 런던에서 나고 자란 영국인들도 큰 무리의 작은 일부로서 모두와 어울려 지냈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다양함을 어릴 때부터 당연한 것으로 보고 자라기 때문에 '나와 다른 것'에 대한 거부감이 훨씬 덜 할 수밖에 없다.




이번 학년에 첫째 아이 반에 미국 친구가 전학을 왔다.  


아이: 엄마, 아메리카에서는 어떤 말 써? What language do they speak in America?

나: 영어 쓰지. English.

아이: 그건 영국 말이잖아! 아메리카에서는 아메리칸을 써야지. But that's what you speak in England! They should speak American in America.


세 나라에 살아보았다고, 나름 세계에 대해 안다고 하는 만 5살 아이에게는, 언어 이름은 곧 나라 이름이었던 것이다. 영국 친구는 영어, 일본 친구는 일본어, 독일 친구는 독일어, 프랑스 친구는 프랑스어-  그러니까 미국에서 온 친구는 미국어.  


단순한 아이의 시각은 내가 평소에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을 선사한다.  


그래, 미국에서 하는 영어는 미국어지.






나머지 영국 지역은 분명히 런던 정도로 인터내셔널 하지 않기 때문에 이 포스팅에서 말한 내용은 구체적으로 런던에 한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Received Pronunciation (RP)에 대하여:

https://www.bl.uk/british-accents-and-dialects/articles/received-pronunciation


이전 11화 서울의 산후조리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