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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정은 Nov 12. 2019

도쿄의 아동관

낡아도 괜찮아

도쿄에서는 보통 워킹맘이 아니면 아이가 몇 명이든지 상관없이 호이쿠엔 (保育園: 어린이집)에 보내지 못한다. 법적으로 지원 자격이 된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대개의 엄마들은 요치엔 (幼稚園: 유치원) 입학 나이가 되는 만 3-4살까지 아이를 집에서 혼자 키운다. 청소를 포함한 도우미를 고용하는 것도 일반 일본 엄마들에게는 엄청 낯선 문화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주부들은 아이가 만 3살이 되기 전까지는 거의 모든 살림과 육아를 도맡아서 한다.




우리가 이사 온 첫 해 여름, 도쿄는 이상기온으로 몸살을 앓았다. 둘째 아이가 6-7개월쯤 되었을 때 기나긴 장마가 겨우 지났나 했더니, 낮 기온이 35도에서 40도 사이를 오갔다. 그 무더위에도 도쿄의 아이들은 낡은 모래밭 놀이터나 공원에서 뛰어놀지만, 그렇다고 6-7개월짜리를 데리고 매일같이 위험하게 내리쬐는 햇빛 아래 나가 있을 수도 없었다. 다행히 도쿄에 두지점 밖에 없는 짐보리가 마침 우리 동네에 위치해 있었기에, 일본어를 전혀 못했던 나는 둘째와 무료한 일상을 탈피하러 그곳에 등록해서 다녔다. 런던에서 첫째가 다녔어서 입회비도 면제됐고, 일본 특유의 공공예절 덕분에 런던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깨끗했다.


하지만 의아할 정도로 짐보리는 항상 한산했다. 도쿄에 지점이 두 개밖에 없는데도 사람이 진짜 많은 날 5-6명 정도였고, 심지어 혼자 수업을 받은 날도 있었다. 그렇다고 도쿄에는 한국처럼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수업을 제공하는 백화점 문화센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저번에 얘기했듯 키즈카페가 있는 것도 아니다. 도대체 돌 전의 걸을 수 없는 아기를 둔 엄마들은 매일같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다들 집에 있는 건가?


그러던 와중 도쿄에 이사 온 지 6개월이 지나서야 동네 일본 친구의 소개로 히로바와 지도우칸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의문이 풀렸다.




도쿄에는 각 구에서 무료로 운영하는 지도우칸(児童館: 아동관)이라는 시설이 있다. 보통 구청이나 동사무소 같은 건물 안에 부속으로 딸려있는데, 장난감과 책이 있는 방들이 있고, 또 아기를 대상으로 하는 무료 수업이 열리는 교실들도 있다. 초등학생은 3학년까지 아주 저렴한 가격에 방과 후 저녁까지 돌봐주는 서비스도 있다. 아동관과 별개로 또 동네 구립 어린이집에서 무료로 운영하는 "히로바"라는 놀이방이 있는데, 지역 육아 서포트 차원에서 운영되는 조금 더 작은 규모의 놀이방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사는 지역은 도쿄 내에서 부유한 축에 속하는 곳인데도 내가 지금까지 가보았던 이 동네의 모든 아동관들은 굉장히 시설이 낙후되었다. 60-70년도 전에 지어진 시설들을 한 번도 리모델링하지 않은 모양새다. 장난감들도 대개는 오래되거나 선생님들이 손으로 만든 것들이다. 한국인인 나로서는 도쿄가 시설면에서 우월할 것이라고 예상했었기 때문에 처음엔 그 점에 실망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들의 공통된 점은 낡았지만 매우 매우 깨끗하게 관리가 된 다는 것이었다. 그 안에서 아이들은 청결과 규칙의 중요성을 배운다.


모든 아동관과 놀이방들은 어른이나 아이나 어느 누구도 예외 되지 않는 비슷한 룰을 갖고 있다:


도착하는 즉시 신발을 벗어 정리하고 손을 씻을 것.

등록한 이름표를 달 것.

개인 수건과 쓰레기 봉지를 지참할 것.

물 이외의 음료나 음식은 반입 금지.

핸드폰 절대 사용 금지.

개인 장난감은 갖고 오지 말 것.

아기가 입으로 가져간 장난감은 따로 분리해서 씻어놓을 것.


메구로구의 여러 지역 아동관의 모습 (사진 출처: 메구로구청 홈페이지)


자주 업데이트되고 리모델링되는 서울의 실정과는 당연히 비교할 수 없지만, 그나마 가끔 있는 도쿄의 짐보리 같은 사설 기관들은 시설 면에서 구립 놀이방이나 아동관보다 훨씬 좋다 (물론 전자는 유료이고 후자는 무료이지만). 그래서 처음에는 짐보리와 집 앞 놀이방을 병행하며 다녔다. 하지만 점점 아동관과 놀이방에 익숙해지고 그곳에서 선생님들과 동네 마마 토모(엄마 친구)들을 알게 되기 시작하면서 짐보리의 필요성을 못 느끼게 되었다. 히로바(놀이방)에서는 주기적으로 아이의 신장과 체중도 재서 기록해주고, 여름에는 물놀이를 하는 등 나름의 프로그램도 짜여있다. 아동관에서는 무료 아기 클래스를 개월 수에 맞게 주기적으로 열고, 아무 때나 스케줄표를 보고 시간에 맞춰서 가면 된다.


그렇게 나는 아동관과 놀이방을 다니며 아기에게는 화려한 시설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점점 깨달았다. 아주 낡은 건물의 작은 방에서 몇십 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원목 장난감과, 선생님들이 페트병이나 천조각으로 만든 인형을 갖고 놀아도 충분히 행복하고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다. 아기가 자연스럽게 그곳의 엄격한 규칙을 알아가며 그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것도 좋았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나는 도쿄에 살게 된 이후로 시설의 퀄리티에 대한 기대치가 많이 낮아졌다. 놀랍게도 우리가 선진국으로 알고 있는 도쿄의 아이들은 엄청 낡은 - 우리의 기준으로는 “후지다”고 할 수 있는 - 시설들에서 자란다. 집이 아무리 화려해도, 부자이건 가난하건, 집 밖에서는 모두가 이런 공공시설을 사용한다. 그리고 결정적인 차이는 거기서 만족을 하고 새로운 시설을 딱히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속에 얽혀서 살아보니, 그 이유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들은 한번 만들고 지으면 정말 닳고 닳도록 제 기능을 못할 때까지 깨끗하게 잘 관리를 해서 사용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저번에 얘기한 이찌닌 마에, 즉 자신의 몫을 잘 지키기 때문이다. 나는 아동관과 놀이방을 다니면서 그 누구도 규칙을 위반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들어가는 순간 조용히 신발정리를 해서 가지런히 놓고, 핸드폰으로 문자 확인도 안 하고, 음식은 더더욱이 본 적도 없고, 쓴 기저귀는 꼭 비닐에 싸서 집으로 갖고 간다. 이렇게 반듯하게 모두가 제자리를 지키고 자기 몫을 감내하는 분위기 때문에 그렇게 낡고 오래된 시설이 계속 깨끗하게 무료로 운영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정해진 규칙과 아이들에 대한 관심만 있다면, 시설은 큰 의미가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물론, 가끔은 나의 기준에 그리 대단하지 않은 것을 보고도 "스고이, 스고이!"를 외치는 일본 부모들을 보면서, 평균적인 공립 시설을 더 신식으로 향상해도 나쁠 것은 없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말이다.








*모든 구립 아동관과 놀이방은 사진 촬영 및 핸드폰 사용이 금지여서, 아동관 사진들은 메구로 구약소 홈페이지에서 퍼왔습니다.



저번에 올린, "이찌닌마에"에 대한 설명:

https://brunch.co.kr/@jenshimmer/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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