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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정은 Mar 11. 2022

효율적이지 못해서 아이들이 행복하다

내가 힘들어서 사교육을 많이 못 시킨다



일본어로 학교나 유치원 이외의 '사교육' 또는 '배움'을 '나라이고토'라고 한다.

다음은 한 업체에서 조사한 도쿄의 미취학 유치원생 아동의 나라이고토에 대한 설문조사다.


"유치원생 자녀가 몇 개의 나라이고토를 하고 있습니까?"

1개가 제일 많다



나라이고토를 하고 있다면, 어떤 나라이고토를 하고 있습니까?

1수영 2주쿠(입시학원) 3피아노 4영어...


아마 한국의 결과와는 아주 다를 것이다. 일단 사교육을 시켜도 1개만 시키는 부모가 가장 많고 그중에서도 수영이 가장 흔하다. 입시학원은 저번에 설명한 사립 또는 국립 소학교 입시를 위한 학원이고, 3위는 피아노, 21프로밖에 안 되는 4위나 돼서야 영어가 나온다. 일본 전국에서 교육열이 가장 높다는 도쿄에서 나온 결과다.


꼭 이 설문조사가 아니더라도, 내가 직접 살면서 아이들을 키우며 '분명 같은 아시아권인데 일본은 왜 한국이나 중국 정도의 과도한 선행 학습과 교육열이 미취학 아동에게 별로 없을까?'라는 의문을 품었었는데, 지난 몇 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것은 바로 물리적으로 힘들어서 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의 이동에 보호자의 시간적 노동적 노력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 또한 유치원 나이의 아이들은 학습에 어느 정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시간적 노동적 노력을 들인 것 대비 대단한 발전이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사교육에 대한 수요가 적을 수밖에 없다. 얻는 것에 비해 엄마의 몸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한국에서 유치원 나이의 자녀를 둔 친구들 얘기를 들으면, 그렇게 편해 보일 수가 없다. 학원을 등록하면, 학원 셔틀이 유치원에서 아이를 픽업해서 학원 가서 이것저것 배우고 오후 4-5시쯤 집에 데려다준다고. 코로나 이전을 기준으로 학습지 선생님은 집으로 주 1회 방문해주고, 체육도 별의별 레슨이 다 있다고 (수영은 기본이고, 줄넘기, 인라인 등). 심지어 수영 학원은 옷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는 보조교사도 있다고 하니, 그야말로 육아 천국이다.


도쿄에서는 학원들이 운영하는 버스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나라이고토를 시키고 싶은 모든 엄마들은 유치원에서 아이를 픽업해서 자전거로 학원이나 레슨에 데려다주고 1시간을 같은 공간에서 대기하다가 아이를 픽업해서 집에 온다. 학습지 선생님이 집에 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학습지는 동네에 독서실 같이 생긴 '학습지 센터'에 가서 한 과목에 20분가량 문제를 풀고 숙제를 받아오는 형태이다. 당연히 학습지 선생님은 가르쳐 준다기보다는 독서실 감독 같은 존재이다. 결국은 거기에 데리고 갔다 왔다 숙제시키고 하는 엄마의 노동이 너무 크기 때문에 생각보다 그 인기가 저조하다. 일본에서 시작한 유명 학습지 '구몬'의 한국 사업부는, 선생님이 학습지를 들고 집에 찾아와 준다고(심지어 일본보다 더 싼 가격에) 얘기했더니 일본 엄마들이 믿지 못하겠다며 '스고이!!"를 연발한다.


운동은 수영 또는 체조가 가장 인기가 많은데 심화반은 주 2회, 주로 주 1회이고 보호자가 자전거에 태워 가서 옷 갈아입히고 1시간가량 기다렸다가 다시 머리 말리고 옷을 갈아입혀 돌아와야 한다. 악기 또한 이런 식으로 힘든 건 마찬가지다. 모든 악기는 심지어 초등학교 입학 전에는 주 1회, 30분 정도로 수업한다. '선생님에게 복습한 것을 확인을 받고, 새로 배운 것에 대한 연습은 집에서'라는 인식이 강하다. 그 30분을 위해 또 왔다 갔다 보통 일이 아니다. 집으로 와주는 선생님은 그 30분 레슨 비용에 얹혀서 교통비를 따로 드려야 한다. (이것은 그 어떤 서비스업도 마찬가지다. 교통비 따로)


여기서 여러 가지 의문점이 있겠다. 그나마 더 편한 자동차를 왜 갖고 가지 않냐고. 도쿄 생활 중 이동의 문제에 관한 글을 이미 읽은 독자는 아시겠지만, 일단 도쿄의 도로는 일방통행이 많아서 가까운 거리는 자전거가 훨씬 편하다. 자전거로 7-8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20분 이상 걸려 좁디좁은 골목골목 뱅뱅 돌아 주차까지 하고 나면 식은땀이 흐른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거의 모든 학원이나 레슨 장소는 주차장이 없다. 따라서 근처(어쩔 때는 근처도 아닌 저 멀리) 유료주차를 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학원은 번화가나 역 주변에 있으므로 주차비가 20분에 200-400엔, 많게는 10분에 400엔 정도 한다. 안 그래도 한 달에 고정 주차비 지출만 어마어마한데, 매번 학원이나 레슨을 갈 때마다 추가로 1000-2000엔씩 기본적으로 나가는 것이다. 유료주차장이 꽉 차서 자리가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비가 오는 날이 아니면 학원에는 가급적 차를 갖고 가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냐고, 둘째 아이까지 있는 나는 너무 힘들어서 주 2회 이상은 절대 못한다. 그건 다른 엄마들도 마찬가지다. 결과적으로, 도쿄의 미취학 아이들은 거의 매일 놀이터나 근처 공원 등, 오후 내내 뛰어노는 게 일상이 되어버린다. 소학교 입시 준비를 하는 아이들 조차도, 입시를 몇 달 앞두고 있지 않은 이상 주 2회 넘게 주쿠를 다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수영은 거의 모두가 필수적으로 시키는 분위기고 (생존과 연관이 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다른 종류의 나라이고토는 부모의 에너지 레벨에 따라 시키는 집도 있고, 안 시키는 집들도 있다.


처음에는 이렇게 비효율적인 시스템이 너무 답답하고 아이들이 허구한 날 생산적이지 못하게 시간만 때우는 것 같았지만 점점 이런 라이프스타일의 장점도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놀 줄 아는 아이들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하루의 시간을 꽉 꽉 채워 넣는 것만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니다. 확실한 것은, 일본에서 교육열이 제일 높다는 도쿄라는 도시의 아이들은 번아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아이들의 학습과 사교육 활동 시간이 효율적으로 딱딱 지켜질 수가 없으므로 인해서 많고 많은 잉여시간에 공원에서 놀고, 종이 접기를 하고, 도서관을 가는 등 자극이 없어도 스스로 재충전하는 방법을 익히게 된다. 엄마는 고단할지언정 아이의 입장에서는 꽤나 괜찮은 일상이다.


또 다른 장점은 아이에게 피아노 레슨을 시키면서 느낀 것인데, 아이도 선생님도 익히는 스킬보다는 피아노라는 악기를 배우는 과정에 의의를 두는 것 같다. 따라서 진도도 더디고, 무엇이든 반복학습을 엄청 많이 한다. 물론, 내 아이가 피아노 영재라서 손가락을 휘날리며 콩쿠르에서 상을 휩쓴다면 다른 얘기이겠지만, 그렇지 못한 99프로 아이들은 평생의 귀중한 취미생활로 큰 스트레스 없이 악기를 배울 수 있다. 레슨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노력과 연습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 같다.



진도는 엄청 느리고, 시간은 비효율적이고, 엄마는 답답하고 힘들지만, 아이들은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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