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고미 계속_경봉스님, 레비스트로스, 선불교, 고려청자, 부작란도
경봉 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 문득 경봉스님이 극락암에 계실 때 피카소의 간접적인 영향으로 문화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한 레비스트로스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스님은 늘 하던 대로
“극락에 길이 없는데 어떻게 오셨는고?” 하고 물었다.
레비스트로스는 그 질문에 대답을 못했다고 하는데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마음을 돌리니(비우니) 그 곳이 극락이더이다’가 되겠지만 조금 이라도 망설인다면 방할이 떨어질 것이다. 방할을 하는 이유는 몽둥이로 맞거나 고함을 들으면 생각이 멈추고 생각이 멈추면 깨달을 확률이 높아진다.
명상은 서양에서 어떤 주제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동양에서는 마음을 비우는 것을 말한다. 경봉스님은 타심통 즉 남의 마음을 아는 능력으로 유명한데 이것은 자기 생각이 완전히 비워져야 가능한 경지일 것이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에서 성인이 나타나는 것은 명상 중에 생각에 지쳐 무심한 상태가 되고 무심중에 깨달음을 얻거나 간절한 기도 끝에 자아관념이 사라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선문에 대한 답은 독창성이 있어야 하는데 1)신발을 벗어 머리 위에 올리고 돌아서서 가는 것이 답이 될 수 있고, 2)발을 굴려 ‘탁!’ 소리를 내는 것이 답일 수 있고, 3)말없이 툇마루에 앉는 것이 답일 수도 있다.
첫 번째는 생각의 근원인 머리에서 가장 먼 발에 신는 신발을 올려 마음이 비워졌다는 것을 표현함과 동시에 난센스인 질문에 난센스한 행동으로 응수하고 돌아서서 가는 행동은 당신이 친 관념의 그물에 걸려들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시이다.
이 행동은 조주스님의 선례에 따른 것으로 지식에 의한 답으로 평가될 수 있겠다.
“니(너) 그 무거운 지식을 머리에 이고 대이니라고(다니느라고) 고생이 많겠다.”라는 뜻의 말을 듣기 십상이다.
두 번째 행동의 의미는 발을 구르는 인과 땅의 연이 만나 ‘탁’소리가 나듯이 우리의 인연이 닿아서 이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고 ‘탁’소리에 자아의식이 없듯이 나도 모든 불행감의 씨앗인 자아의식이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행동을 한다면 경봉스님은 재미가 나서 과연 자아의식이 없는지 시험하는 질문을 던질 것이다. 부처님은 자아의식이 사라졌기에 자기 자신을 지칭할 때 여래라고 했다.
‘같을 여, 올 래’니까 온 것 같은 존재라는 뜻이 된다. 인연에 의해서 이렇게 나타나 있지만 인연이 다하면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도 첫 설교에서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의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마음을 비워야 행복해진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어린아이가 되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도 했다.
기독교인은 대부분 이 말을 어린아이 같이 순진하게 믿어야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해석하는데 이 해석은 자칫 사람을 맹신으로 이끌 수 있어 위험하다. 그 해석보다는 미처 자아의식이 형성되지 않은 아이처럼 자아의식이 사라져야지 복을 누릴 수 있다고 해석하는 게 타당하다.
세 번째 행동의 의미는 관념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자유인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배고프면 밥 먹고 곤하면 잔다는 식으로 여기까지 오느라 다리가 아프니 쉬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이다.
경봉스님은 자유인인지 확인하는 질문을 하거나 방으로 말없이 들어갈지도 모른다.
이 행동이 궁금하다면 이미 진 것이다.
만약 경봉스님이 방으로 들어간다면 방문을 향해 깊은 감사의 염을 담은 절을 하고 극락암을 떠나면 된다.
여기까지가 나의 상상인데 실제 상황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
경봉스님이 내방객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선불교와의 인연을 만들기 위함이라고 짐작한다.
고려청자는 깊은 색감과 조형미 때문에 숭고미를 느꼈고, 시화 중에서는 추사의 부작란도에서 숨이 멎을 듯한 충격과 숭고미를 느꼈다.
이 작품은 서예의 운필을 응용한 반추상적인 작품으로 필선의 기세와 잎과 꽃의 완벽한 조화로 숭고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난 그림에 부친 칠언율시의 첫 구절이 부작난화 이십년으로 시작한다.
이 구절을 해석하면 이십년 동안 난을 치지 않았다는 이야긴데 실체적 진실은 알 수 없으나 아마 잘 그려보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무아지경에서 그리려고 노력한 지 이십년이 되었다는 뜻이 아닐까? 무아지경에서 그려 무의식적으로 추사체의 필법이 나타난 것으로 여겨진다.
추사체로 쓴 화제와 절묘하게 조화되는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만약 행서체로 썼다면 그 위화감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경봉 스님 http://m.blog.daum.net/hk2027/7582262?np_nil_a=2
레비스트로스 http://mmstudies.com/strauss/
청자상감운학문매병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11,00680000,11&pageNo=5_2_1_0#
김정희 부작란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4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