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프 Apr 01. 2019

나/의 경멸스러운 사랑/에게

2018년 10월 30일의 글



 시를 옮겨 적는 중이었다. 새벽은 언제나처럼 고요했다. 펜촉이 종이 위에서 부드럽게 움직이며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하루 중 가장 사랑하는 시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는 그를 경멸한다’라는 문장을 적어놓고, 온점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본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독 긴 침묵이 내려앉았다. 시집에 적힌 문장은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였다.



 나는 그를 경멸한다


 사랑의 종말과 함께 경멸이 찾아왔다. 사랑의 종말에 대한 선언은 그다음의 일이었다. 사랑이 식어서 경멸하게 된 건지 혹은 경멸하게 돼서 사랑이 식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둘 사이에는 분명한 상관관계가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경멸하면서 동시에 사랑할 수는 없으므로.

 경멸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다. 숨겨야 할 속내를 숨기지 못할 때라든지, 겸손하기 위해 타인의 호의를 배려하지 못한다든지, 타인에게 무안을 줄 때라든지, 문장의 주술호응을 지나치게 틀릴 때라든지, 보기 싫은 행동을 한다든지,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낸다든지, 깊게 생각하지 않고 말을 뱉는다든지, 자신의 생활에 충실하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든지, 나와의 약속을 중요시하지 않는 것처럼 군다든지, 혹은 너무 중요시하는 것처럼 군다든지, 너무 큰 단어들을 사용한다든지, 혹은 너무 작은 단어들을 사용한다든지…….

 못 견뎌 하는 게 많은 사람들이 못 견뎌 하는 자신의 많은 부분을 절삭하고 얻어낸 정갈함이 좋다, 고 누군가가 말했고 나는 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좋았다. 숨겨야 할 속내를 숨기기 위해 노력하는 내가, 겸손하게 굴면서도 타인의 호의를 배려할 수 있는 표현을 찾아낸 내가, 문장의 주술호응을 신경 쓰는 내가, 그러니까 내가 견디지 못하겠는 것 중 내 안에도 있을 법한, 혹은 이미 있는 것들을 절삭하고 자신을 정갈하게 치장하는 내가 좋았다. 그리고 때로, 경멸스러웠다.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나에게도 종교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정확히는 종교라기보다 신앙에 가까운 것. 변치 않는 무언가에 집중하고 의존할 수 있다면 내가 덜 흔들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 대상을 나 자신으로 삼기에 나에게는 그러한 자격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고, 나의 연인으로 삼기에는 관계에 있어 내가 흔들릴 것이 두려웠다.

 나는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람의 좋은 점에만 집중하고 나쁜 점은 의도적으로 외면하려고 해왔다. 이 사람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다시는 이런 사람 없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태도는 거의 신성화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어쩌면 그래야만 했던 건지도 모른다. 옳다고 생각되는, 높이 있다고 생각되는 가치를 그에게 부여하고 그를 사랑함으로써 내가 맞게 가고 있다는 안정을 얻을 수 있으니까. 그러다 그를 더는 사랑하지 않게 되었을 때, 혹은 더는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올 때 그동안 눌러두었던 것들을 모조리 꺼내어 비난하려 든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틀린 게 아니라 잠시 속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이미 알고 있던 것이다. 그가 누구든 어떤 사람이든 나에게 있어 신앙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신앙이라는 것은, 믿으려 하는 순간부터 이미 부재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견디는 것을 견디고 싶지 않아질 때부터 경멸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만일, 견디는 것을 견디고 싶지 않아 시작한 경멸조차도 견디고 싶지 않아지는 순간이 도래한다면.



 나는 그를


 무언가를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은 간단하다. 그 말에 숨겨진 의미에 비해서는 지나치리만큼 간단하다.

 싫어하는 것 중 하나를 골라 이야기해보자. 이를테면 타인을 곁에 두고 혼잣말을 하는 행위.

 타인을 곁에 두고 혼잣말을 하는 행위를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바로 여기에, 타인을 곁에 두고 혼잣말을 하는 행위를 싫어하는 ‘내’가 있다. ‘타인을 곁에 두고 혼잣말을 하는 행위를 싫어하는 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타인을 곁에 두고 혼잣말을 하는 행위를 싫어하기 때문에 그러한 행위를 하지 않는 나’도 있다. 이 간결하고 동시다발적인 세 가지의 존재 증명이 나를 황홀하게 그리고 비겁하게 만들었다. 아니다. 나는 비겁했다. 비겁해서 경멸했다.

 내가 원치 않는 삶이나 모습에 대한 자기반성과 경계의 도구로서의 경멸은 괜찮았다. 그러나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싫어할 만큼의 섬세함과 예민함을 가진 것처럼 보이기 위한 도구로서의 경멸은, 아니었다. 나의 옳음을 증명하려는 노력이 나의 경멸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나 자신이 역겨웠다.

숱한 관계의 종언 후 오랜 시간이 지났다. 문득 지난 연애들을 되짚어볼 때마다 애틋한 경멸이 치밀어 오른다. 여전히 그들의 어떤 면을 사랑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어떤 면을 경멸한다. 아직 오지도 않은 다음 연애의 경멸을 상상할 때마다 나 자신이 우습게 느껴진다. 느껴진다. 나 자신이.

 그래서 나는 이곳에 있다. 여전히 비겁한 채로. 마치 경멸이 나의 신앙이라도 되는 양 굴면서.




keyword
작가의 이전글 무릉도원의 복숭아는 딱복일까 물복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