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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프 Oct 08. 2020

나의 모든 정신병에 대하여

십대의 어느 시점부터 스스로를 규정짓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나를 어느정도 구해낸 것은 규정지음이었다. 어떤 규정짓기는 한계를 만들지만 어떤 규정짓기는 나를 꽤 정확하게 분류해 내가 느끼던 나의 한계를 조금 흐릿하게 만든다.


아직 대학교를 졸업하기 전, 그러나 졸업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던 그 시기에 나를 지독하게 괴롭히던 것들의 명칭은 우울증, 경조증, 약간의 대인기피증이었다. 불면증은 거기에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아주 기본적인 속성이었으며 자해욕구도 자살사고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병원에 다니고 상담을 받고 약을 먹고 꾸준히 운동을 하고 조금씩 나아지는 기미를 보이다가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 규칙적으로 출퇴근을 하고 월급을 받고 자아 실현에 꽤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것을 하면서는 대부분의 증세가 사라졌으니 얼마나 다행인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폭식을 하고(피임약을 먹으면서 많이 나아지긴 했다) 애착 문제가 생길 때는 말 그대로 돌아버릴 것 같고(불안증이 도질 때도 종종 있다) 극한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호흡곤란이 올까 두려워한다(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특히 그렇다).


20년 전에도 가지고 있던 버릇, 말이 좋아 버릇이지 아무튼 무언가 좋지 않은 그것을 종종 행하는 걸 보면 이건 또 분명 충동조절장애인데, 그럼 나는 다시 신경정신과에 돌아가 나의 모든 문제를 털어놓고 상담을 받고 약을 처방받아야 하는 건지, 아니면 이 모든 어이없는 정신병조각을 끌어안고도 이만큼 멀쩡해보이도록 사는 것에 감사하며 노오력을 더 해야 하는 건지 도대체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 신이 나에게 딱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말한다면 나는 이 세 가지를 고를 것이다.


첫째, 폭식증을 없애달라.

둘째, 애착 문제에서의 질투와 집착과 결핍과 아무튼 그런 나쁜 것들을 없애달라.

셋째, 한 달에 한 번씩 로또 1등에 당첨되게 해달라.


아 뭐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아무튼 그래서, 정말 나의 모든 정신병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한도끝도 없이 길어질 테고, 사실 애초부터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할 마음은 없던 와중에 왜 갑자기 정신병 이야기를 꺼냈냐 하면.


애인과 엄마, 가장 가까운 친구 한 명 외에는 사람 만나는 거 별로 안 좋아하고, 카톡이나 인스타그램 디엠으로 연락 길게 하는 것도 부담스러워하고, 누군가를 만나려는 약속을 잡기 위해서는 일단 마음의 준비부터 필요한 내 성향이 어쩌면 대인기피증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다.


뭐 물론 직장에서든 어디서든 사회생활 정말 잘하고 농도 잘 치고 어울리기도 잘 어울려서 성격 좋다는 소리도 많이 듣긴 하는데 일대일로 사람과 관계하는 걸 이렇게까지 부담스러워할 일인가... 싶으니 그런 생각까지 드는 거다. 누군가를 만나고 돌아올 때 옛날만큼 진빠지지는 않는데.


이게 단순히 그냥 성격 문제일 수도 있다. 나같은 성격의 사람들도 세상에 많은데 주변 사람들 보고 있으면 세상에 마상에 사람도 잘 만나고 카톡이나 디엠으로 얘기도 계속 주고받고 하는 걸 보고 있으니 문제의식을 갖는 걸 수도.


그러니까 백날천날 갖고 있는 정신병 얘기를 간만에 다시 꺼낸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이러이러한 정신병을 가지고 있다고 진단을 내리니 그 진단에 맞춰 치료해서 그 한계를 흐렸는데, 이제 와 그 진단이 다시 나를 옭아매며 한계를 만드는 것 같아서. 폭식증도 마찬가지다. 평범한 정도의 의지박약일 뿐인데 '폭식증'이라는 이름 아래 기대는 건 아닐지.


그러면서도 동시에 한창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던 때 생각이 난다. '사실 나 우울증 아닌 거 아닌가? 그냥 내가 나약한 건데 우울증 핑계대는 거 아닐까?' 하던 때. 뭐 우울증과 위에 언급한 두 가지는 결이 약간 다르지만요.


나도 모르겠다, 잘. 뭐 어쨌거나 결론은 내가 극복할 수 있는 문제는 최대한 극복하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살아가겠다는 건데 아니 그래서 정신과를 가야 돼, 말아야 돼... 원래 사람들 다 이만큼씩은 이상한데 겉으로는 멀쩡해보여서 못알아보는 걸까...? 내가 남들한테 그렇게 보이는 것처럼...?


2n년을 한 몸뚱아리에서 한 줄기의 정신을 갖고 살았는데 아직도 나 자신을 모르겠다. 대체 언제쯤에야 나를 제대로 알 수 있게 될까.


'조깅과 수영의 상관관계'라는 제목의 글을 쓰려고 하는데, 아직 조깅을 시작 안 해서 못쓰고 있다. 그때쯤 되면 또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뿜고 있을 거다.


물론 지금도 밝고 긍정적이긴 하다. 죽을 생각도, 나 자신을 망칠 생각도 없다는 점에서.


그래. 이게 가장 중요하다.


나 자신을 망칠 생각이 이제는 없다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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