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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프 Dec 06. 2020

부끄럽지만, 열등감


오늘 할 이야기는 몹시 부끄러운 이야기다. 그래서 브런치 닉네임을 실명에서 별 의미없는 단어로 바꿨다. 흔한 이름이지만 더 짙은 익명성 뒤로 숨고 싶던 것인데, 그런 것 치고는 또 굉장히 사적인 이야기다. 자주 하고 싶어지지만 가끔도 하기 힘든 이야기. 누군가를 붙잡고 털어놓고 싶지만 차라리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어하는 욕망을 분석하는 게 더 나을 그런 이야기. 그럼에도 내어놓는 건 이제 슬슬 덜 괴로워하고 싶기 때문이다. 다년간의 경험상, 어떤 것이든 뱉어놓고 나면 조금 나아지기 때문에.


열등감이라 하면 대부분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린다. 누군가를 질투하고, 시기하고, 그래서 추악해지고, 혹은 자신을 비하하고, 자신감과 자존감을 잃고, 사람들과 어울리기 힘들어하는 그런. 하지만 나는 열등감에 부정적인 면만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무언가에 열등감을 느낀다는 것은 자신이 그 분야에 관심이 있고 더 나아가 그 분야에서 도달하고 싶어하는 위치가 있는 거라고, 어쩌면 열등감을 느끼는 대상의 자리만큼 도달해보고 싶다는 열망이 있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나는 개발자의 코딩실력을 보며 열등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코딩이고 개발이고 하나도 아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전자책을 만들 때도 <head> </head> 등의 아주 간단한 양식을 긁어다 붙이면서도 온통 스트레스를 받았을 정도다. 아무리 개발이 차세대 필수 능력이라 해도 이것만은 도전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또 나는 이재용의 부를 보며 열등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비록 박탈감을 느끼기는 해도 말이다. 당장 내 통장 잔고에... 아 잠깐만 눈물 좀 닦고.


어쨌거나,


나는 맛있고 좋은 음식과 술을 잘 먹으러 다니고, 그걸 잘 알고 즐길 줄 아는 사람을 보면서 가끔 열등감을 느낀다. 내가 맛있고 좋은 음식과 술을 먹으러 다니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좋아하면서도 잘 알지는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먹고 있는 음식에 대한 셰프의 설명에 귀기울이고, 내가 마신 술에 대해 이것저것 검색해보고 기록해둔다. 그래야 내가 원하는 모습, '맛있고 좋은 음식과 술을 잘 먹으러 다니고, 그걸 잘 알고 즐길 줄 아는 사람'에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진을 잘 찍는 사람을 보면서도 열등감을 느낀다. 내가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고 '잘' 찍는 것에도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 기준에 잘 찍었다고 생각하는 사진을 자꾸만 들여다보며 그 사람의 시각에서 생각하고, 내가 무언가를 찍을 때 그 시각을 응용해보기도 한다. 어디 공모전에 낼 것도 아니지만, 어떤 대상을 아주 적합하게, 때로는 신선하게 담아내는 일이 즐겁고, 그렇게 탄생한 내 '작품'을 보며 감탄하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음 뭐 열등감 느끼는 것도 어느정도 건강한 상태인 것 같은데? 괜찮은데? 싶겠지만, 여기서 끝이라면 굳이 길고 긴 글을 서두랍시고 늘어놓지는 않았을 것.


이제 정말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자.


애인이 친구들을 만나 재밌게 이야기하고 취향을 공유하고 뭐 그런 것들, 정말 좋은 일인데 나는 거기에 자주 심통이 난다. 이 사람이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는 것에도, 이 사람에게는 취향을 공유하고 좋은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많다는 것에도. 전자만 놓고 본다면 단순한 질투로 치부할 수 있다. 애착 이슈 때문이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 사람이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만족해 나를 떠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서 나오는. 하지만 요즘 내가 더 중요하게 여기는 건 후자다.


나는 취향을 공유할 수 있는 관계를 아주 소중하게 여긴다. 그렇다고 분기마다 찾아가 꽃을 선물한다거나 달마다 의례행사처럼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다는 것은 아니다. 핑계를 대자면 나는 철저한 내향 인간이고(!) 한 달에 사람을 만나는 약속이 세 건 이상 잡혀 있으면 마음이 초조한 사람이다. (전에 썼던 글에서 내가 대인기피증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었는데, 그 후로 나를 지켜본 결과 대인기피증은 절대 아니고 다만 사람을 자주 만날 만큼의 외향 에너지는 없는 정도라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많으면 한 달에 한 번, 혹은 반 년에 한 번 정도 만나 함께 식사를 하고 거리를 조금 걷고 커피나 차를 마시며 몇 시간 동안 이야기를 하고 헤어지는 것을 좋아한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술을 앞에 놓고 나누는 이야기도 언제나 환영이다.) 사실 반 년에 한 번 정도 만나는 것도 그리 중요하지는 않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그들과의 만남, 그들과 나눴던 대화(오프라인에서든 온라인에서든), 그들과 주고받은 긍정적인 에너지 등을 떠올리며 그들과 만나지 않는 반 년, 1년, 2년, 혹은 그 이상을 애정어린 마음으로 지내는 것이다.


고백하건대 내가 취향을 공유하거나 정말 정말 사랑하는 대화를 편안하게 주고받을 수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다. 그 사람들 중 근 한 달 동안 만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고, 반 년 동안 만난 사람도 고작해야 두 명이다. (애인은 예외로 두자.)


이런 나에 비해 애인은 만나는 사람도 많고(외향 인간은 아니지만, 내가 워낙 사람을 많이 안 만나니 상대적으로) 취향을 공유하고 꽤 괜찮은 대화를 나누는 사람도 많아 보인다. 물론 내가 손에 꼽은 그  사람들과만 진정성 넘치는 대화를 하고 마음에 사랑과 감사를 담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내 사람들에게 세운 기준은 너무 빠듯하고, 애인의 사람들에게 세운 기준은 널널한 것도 있다. 애인이 나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람들과 '깊은' 이야기를 덜 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나는 '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그걸 즐기는 편이고, 애인은 '주변'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기 때문에. 또 애인의 경우 나보다 친구의 풀이 넓기 때문에 취향이 겹치는 사람이 당연히 나보다 많을 수밖에 없고, 그러니 그 사람들과 좀 더 가까워지기도 할 것이다.


음, 그러니까.


이런 이유들을 모두 알고 있고, 애인이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은 좋은 일이고, 그런 관계 속에서 애인의 세계가 넓어진다면 당연히 나에게도 좋은 것인데, 그런데도 마음이 요상하게 꿈틀거린다는 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아까도 말했듯이 맛있는 음식과 술을 즐긴다거나, 사진을 찍는다거나 하는 것은 내가 노력할 여지가 있다. 물론 둘 다 한계는 있을 것이고, 나는 어떤 수준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열등감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노력할 여지가 있다'는 것은 나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된다. 그게 열등감이 나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취향이 비슷하고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 주변에 많다'는 것은 조금 다르다. 이런 열등감이 내게 긍정적으로 작용하려면 이 사람, 저 사람을 많이 만나며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나를 움직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만나는 사람의 풀을 늘린다든지, 소모임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아예 취향이 맞는 사람을 타겟으로 만나본다든지 하는 방법을 택해야 한다. 하지만 여기엔 문제가 좀 있다. 첫째, 상대가 나와 관계를 얼마나/어떻게 유지하고 싶어하는지를 고려해야 하기에 나 혼자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니고, 둘째,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쉽지가 않으며, 셋째, 무엇보다 나는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사람을 만나고 싶지가 않다! 이 얼마나 슬픈 모순인가. 주변에 좋은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지만 사람들을 많이/자주 만나고 싶지는 않다니. 속이 터진다, 터져.


여기서 나는 하나를 깨닫게 된 것이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욕망에는 언제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라는 수식어가 몰래 따라붙는다는 것을. 그간 내가 움직인 원동력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라기만 하기에는 너무 염치도 양심도 없지 않냐?' 하는 마음의 좋게 말해 속삭임, 솔직히 말해 쌍욕 때문이었음을.


글을 쓰는 것과 남에게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은 비슷한 데가 있다. 첫째, 배설욕을 충족시켜준다는 것, 둘째, 딱히 해결책을 바라지 않으며 하는 일이라는 것.


그런 말이 있다. 누군가가 고민상담을 요청해와도 절대 해결책을 내놓으려 하지 말라고. 해결 방안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것이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은 그저 들어주면서 이야기하는 사람의 안에 있는 답을 건져낼 수 있게 더 깊은 이야기를 끌어내면 되는 거라고.


글을 쓸 때, 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자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된다. 나는 고민을 이야기하고 동시에 그 고민을 들어주면서 내 안에 있는 답을 건져낼 수 있도록 이야기를 조금 더 끌어내본다.


그래서 이번 글을 쓰면서 해결책을 찾았냐고? 아니. 모든 고민상담에 꼭 해결책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일단 이야기하는 사람의 속이라도 시원해지면 된 거다. 물론 듣는 사람의 속은 상하지 않는 선에서. 나는 내 길고 구차하고 별 것 없는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의 시간과 에너지와 속을 생각해서 이렇게 글을 쓰는 쪽을 택했다. 그러니, 이 길고 구차하고 별 것 없는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준 사람에게는 심심한 위로와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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