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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프 Jan 05. 2022

언제는 세제 조금만 넣으라면서요

태세 전환이 거의 우디르급(은 아니지만)


얼마 전 남자친구가 말했다.


"세탁기 돌릴 때, 세제를 조금 더 넣어야겠어."


내가 물었다.


"왜, 갑자기?"


"아무리 빨래를 적게 돌려도 들어가는 최소한의 물 양이 있잖아. 세제를 너무 적게 넣으면 빨래가 제대로 안 될 것 같아."


"드럼세탁기용 세제는 그거까지 고려해서 양을 적어놓은 거잖아."


"아니, 그래도 말야. 아무래도 좀 그래. 세제 좀 더 넣는다고 큰일나는 거 아니니까 조금 더 넣어야겠어."


사실 나는 세탁기를 돌릴 때 세제를 조금 넣느냐 조금 더 넣느냐에는 관심이 없다. (따지자면 나는 좀 여유있게 넣는 편이다.)


이 대화가 웃겼던 이유는, 남자친구가 불과 얼마 전까지도 내가 세탁기를 돌릴 때마다 세제를 과하게 투입한 것이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세제를 많이 넣을 경우 세제 잔여물이 옷에 많이 남아 섬유에도 안 좋고, 그 잔여물이 계속 피부와 호흡기에 접촉해 건강도 해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 '세제를 좀 더 넣어도 상관없는 게 분명하니 세제를 좀 더 많이 넣는 것이 맞다'고 주장하니 그게 안 웃기냔 말이다.


그런데 사실 남자친구에게만 국한되는 얘기는 아니다. 나도 종종 이런 태도 변화를 보인다.


나는 이십몇 년 동안 화장실 롤휴지가 벽면에 붙도록 걸어두는 사람이었다. 그래야 휴지를 손에 감을 때 앞에서 뒤로 손을 굴릴 수 있어 더 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날 남자친구의 집에 갔다가 휴지가 바깥쪽을 향하도록 걸린 것을 보았다. 이유를 물었더니 휴지는 '원래' 그렇게 걸도록 고안된 것이란다.


그게 무슨 소리냐, 휴지를 그렇게 걸어두면 몸에 너무 가깝기도 하고 손에 감기도 불편하지 않느냐, 하면서 인터넷에 검색해보았더니 세상에. 롤휴지가 발명됐을 때의 도면을 보니 진짜로 남자친구 말이 맞는 것이다.


사실 휴지가 어떻게 걸도록 설계됐는지는 실사용자의 입장에서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그냥 본인이 편한대로 쓰면 된다.


그런데도 그걸 보고 나니 웬만하면 휴지를 발명 도면처럼 걸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그걸 재깍 바꿨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우리집 화장실에는 아직도 화장실이 그 도면처럼, 휴지가 벽에 붙지 않고 바깥쪽에서 달랑거리며 걸려 있다.


일상에서 이런 비슷한 일을 겪을 때마다 인간의 태도와 신념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신념이 태도를 결정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태도가 신념을 결정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이 방식이 맞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렇게 행동하기 때문에 이 방식이 맞다고 생각하는 것'임을 유념하며 살아야겠다.


나는 아는 게 조또 없고 만약 있다 해도 그게 꼭 맞는 것은 아니며 맞다고 해도 그걸 남들에게 들이밀지 말자는, 그러니까 인생 제발 좀 겸손하게 살자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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