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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신이 기대하는 성공 스토리는 아니겠지만

회칙 1. 저 사람이 할 수 있으면 나도 할 수 있다

by 이일리


 나는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이야길 보고 있으면 배알이 꼴린다고 해야 하나. ‘나도 저 사람처럼 열심히 노력해서 저런 성과를 내야지’ 생각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님은 이미 조건이 좋았잖아요. 그게 의지와 노력만으로 된답니까?’ 하는 생각이 주를 이루는 걸 보면 아무래도 단단히 꼬인 사람인 모양이다. 그렇다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강한 의지와 노력으로 큰 성취를 이룬 사람들을 보고 감명받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나는 저 사람만큼 의지가 강하지 않으니 안 되겠네.’ 그런 생각을 한다. 그렇다고 ’실패해도 괜찮아’,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 하는 다독임에 위로받는 타입이냐 하면 그건 더더욱 아니다. 위로 몇 마디에 맞아, 나 이대로도 괜찮아, love myself :) 하고 안주하고 싶지는 않다. 세상에 널린 각종 자기계발서와 자기위안서 사이에서 나는 언제나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특별한 재능도, 든든한 뒷배도, 타고난 감각도, 하다못해 끈질긴 의지와 노력 정신도 없었다. 차라리 무언가 하나 크게 부족한 점이라도 있으면 그 핑계라도 댈 텐데, 그럴 만한 핑곗거리도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잘 살고는 싶었다. 잘 사는 게 뭔지도 잘 모르겠으면서. 평범성 속에서도 무언가를 꽃피워야 한다는 욕망은 꽤 오랫동안 내 정신 건강을 갉아먹었다.


 우스울 정도로 평범하게도, 첫 번째 고난은 대학 진학을 앞둔 시점이었다. 가고 싶은 학과가 있었고, 그 학과가 있는 곳 중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좋은 대학교에 가고 싶었다. 비록 ‘SKY’는 아니더라도 이 정도쯤은 갈 수 있지 않을까. 아니, 꼭 가야지. 그렇게 생각했다. 좋은 대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면 쫓아내겠다거나 은근히 눈치를 준다거나 하는 부모님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오직 나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나라면 응당 이 정도는 되어야지, 하는 그런 자존심.


 수능을 두 달 앞둔 고3 9월, 수능 전 마지막 모의고사 성적을 받아 들고 나는 갑자기 다른 학과를 지망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다른 학과’는 문예창작학과였다.) 표면적인 이유는 ‘글을 쓰고 싶다, 나는 원래도 글 쓰는 것을 좋아했다’였지만 사실 내 성적으로는 ‘좋은 대학의’ 내가 원하는 학과에 갈 수 없음이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상대적으로 성적 커트라인이 낮은 문예창작학과를 간다면 내가 원하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다른 사람뿐 아니라 나 자신까지 속이며 나는 내 인생의 첫 번째 도피를 수행했다.


 운 좋게 원하는 대학교에 입학해 즐거운 캠퍼스 라이프를 즐겼지만 그것도 잠시, 나에게는 등단할 만큼의 실력도, 의지도 없으며 심지어는 문예창작학과에 다니는 학생치고 책이나 콘텐츠에 관심이 많지 않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제야 원래 희망하던 학과의 복수전공, 전과, 편입, 심지어는 유학까지 부랴부랴 알아봤지만 정말 무섭게도, 여전히, 나에게는 그만한 의지가 없었다. 물론 의지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복수전공이나 전과 등을 하기에는 이미 타이밍을 놓쳤고, 편입이나 유학을 알아보기에는 공부에 걸리는 기간이 추가로 필요했다. 그 기간 동안 교육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었다. 결국 그마저도 포기하고, 일단 졸업을 한 후 어디로든 취직하기로 마음을 정리했다. 하지만 어떤 분야로 취직해야 할지도 모르겠는 데다가 졸업작품집을 써내야 하는 현실이 막막해 무턱대고 휴학을 했다. 내 인생의 두 번째 도피였다.


 욕심을 내려놓든 끈질긴 노력을 하든 둘 중 하나는 해야 했는데 도무지 그게 되지 않았다. 이런 나약한 의지로 도대체 뭘 할 수 있을까? 나의 앞길이 그려지지 않았다. 처음엔 자존심의 영역에서 시작한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생존의 영역으로 번졌다. 단순히 졸업과 취직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그게 트리거인 건 명확했다. 영원히 이렇게 지지부진한 인생을 살 것 같은 두려움이 나를 덮쳤다. 가벼운 마음으로 방문했던 학교 상담센터를 벗어나 나는 정신과에 방문해 상담을 받고 약을 먹었다. 가끔 죽고 싶었지만 정말로 죽을 용기는 없었다. 당연했다. 나는 의지박약에 게으른 사람이니까.


 그 시기로부터 수년이 지난 지금, 나는 현재의 삶에 매우 만족하며 몸과 정신이 모두 건강하고 대체로 즐겁게 살고 있다. 내 곁에서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들을 믿고 사랑하며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석하고 에너지를 주려 한다. 그간 다닌 회사들에서 크고 작은 성과를 냈고 이를 인정받았으며, 지금은 제법 큰 규모의 회사에서 나의 능력치와 흥미에 완벽히 부합하는 업무를 맡아 일하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더 이상 나를 미워하거나 나를 망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뭔가 조금 잘못되어도 다시 잘 회복할 수 있을 거라 스스로를 믿는다. ‘프로-자책러’였던 나는 이제 스스로를 ‘프로-자책방지러’라고 칭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그 과정에서 내게 힘이 되어준 건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따뜻한 위로를 건네주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냥 적당히 평범하게 일하고 평범하게 즐기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 같은 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이를테면 이런 거였다. 전공과 전혀 관계없는 일을 하며 이대로도 괜찮을까 걱정하던 중, 일 잘하고 멋져 보이는 팀장님이 현재의 업무와 전혀 관계 없는 전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공과 업무는 크게 상관이 없을 수도 있겠다고, 저 사람이 잘 해냈다면 나도 잘 해낼 가능성이 있겠다고 생각했다. 직장인으로서 높은 위치에 있는 나를 구체적으로 상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남자 팀장만 가득한 회사에서 처음으로 여성 임원을 만났다. 어떻게 그 자리에 도달했는지, 어떤 노력과 어려움이 있었는지를 묻고 들었다. 많은 노력과 다양한 운과 조건과 환경이 있었겠지만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취 외의 영역에서도 비슷한 깨달음이 있었다.


 이십 대 내내 취미라곤 독서와 음악 감상, 전시회 관람 등 정적인 게 전부였지만 겨울 내내 보드를 타러 다니는 친구를 보고 서른이 넘어서야 보드를 타러 가봤다. 의외로 재미있었다. 자전거를 즐겨 타는 직장 동료들과 따릉이를 타고 어울리다 100만 원이 넘는 돈을 주고 자전거를 사서 타기 시작했다. 취미로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라는 타이틀이 새로 생겼다. 한번도 상상해 보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하는 거라면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1년 만에 고시 합격이나 3년 만에 1억 모으기 같은 건 어렵겠지만 애초에 그런 삶을 바란 적은 없었다.)


 세상을 둘러보면 꽤 많은 사람이 필요 이상으로 자책하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것 같다. 나도 그랬다.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글쎄, 성장과 발전에 필요한 반성의 정도를 넘어 자기 자신을 깎아내리고 자신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수준인 것 같달까. 그 자책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기까지 오래 걸렸지만, 덕분에 이제는 안다. 사람은 자신을 믿는 만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걸. 그리고 그 믿음은 누가 대신 심어주는 게 아니라, 아주 작은 ‘할 수 있을지도 몰라’라는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것도.


 남에게 보이는 글을 쓸 때마다 고민한다. 내가 쓰는 글이 읽힐 가치가 있을까. 이미 콘텐츠가 차고 넘치는 이 세상에서, 굳이 내 얘기까지 구구절절 풀어놓을 필요가 있을까. 그에 대해 확실히 그렇다고 대답하지는 못하겠다. 다만, 어딘가엔 나처럼 평범한 사람이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며 조금씩 나아가는 이야기를 읽고 싶어 하는 사람이, 그래서 나를 보고 ‘저 사람이 할 수 있으면 나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명언 몇 줄에 설득되는 연역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나처럼 다양한 사례를 들어보아야 설득되는 귀납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그래서, 굳이 내 얘기를 구구절절 풀어놓아 보기로 했다. 당신이 기대하는 성공 스토리는 아니겠지만, 이 글의 마지막쯤에는 ‘저 사람이 할 수 있으면 나도 할 수 있다’의 ‘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담아서.



회칙 1. 저 사람이 할 수 있으면 나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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