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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규 퀘스트: <구몬 일본어 다섯 장 풀기>

회칙 2. 아주 작은 성공의 경험을 쌓기

by 이일리


 종종 생각한다. 단 한 번의 다이어트로 몸을 만들어 유지하는 사람이 다이어트의 고수일까, 아니면 몸을 만들었다가 망치고, 다시 만들고, 또 망치는 과정을 수차례 반복한, 그러니까 요요의 전문가가 된 사람이 고수일까. 여러 번의 고민 끝에 나는 후자라고 결론 내렸다. 다이어트를 ‘좋은 몸을 유지하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전자가 맞겠지만, ‘체중을 감량하고 근육량을 늘리는 것’으로 정의내린다면 후자도 맞을 것 같아서. 어떻게 하면 성공하는지뿐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실패하는지, 그리고 그 실패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도 실패와 성공을 반복한 사람이 더 잘 알 테니까. 물론 세상은 후자를 의지가 약한 사람이라 말하고, 나조차도 그런 내 모습을 긍정적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요요 전문가예요” 같은 느낌으로랄까.


 비슷한 이치로, 나는 자책에 관해서라면 자부할 수 있다. 정확히는 자책하고, 이겨내고, 그러다가도 다시 자책하고, 그럼에도 또 다시 이겨내는 그런 것. 비슷한 표현으로는 ‘작심삼일 전문가’가 있겠다. (작심삼일 전문가의 대단한 점은 마음을 먹으면 삼 일은 해낸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욱 대단한 점은 삼 일이나 해냈음에도 또 다시 실패한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생각을 서른이 넘어서 하게 되었기 때문에 나는 십 대 후반과 이십 대 시절을 매우 칙칙하게 보냈다. 늘 뭔가를 결심하고-이를테면 영어 공부, 다이어트, 일찍 일어나기, 매일 일기쓰기- 금세 포기했다. 이 중 나를 가장 우울하게 만든 것은 다이어트였다. 건강한 식단을 유지하며 운동을 열심히 하다 갑자기 왕창 폭식해버리고 후회의 늪에 빠지는 일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건 PMS 증상이었고, 피임약을 먹자 꽤 해결되었다.)


 자잘한 생활 습관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인생의 중요한 지점에서 몇 번의 도피를 했다. 가고 싶은 대학과 학과에 갈 성적이 안될 것 같아서 수능을 두 달 앞두고 목표 학과를 바꿨다. 대학에 입학해서도 내가 원하는 진로가 아닌 것 같아서 편입과 유학을 알아봤다. 성취한 것 없이 졸업하기가 무서워서 긴 휴학을 했다. 취직이 안 될 것 같아서 목표 직무를 바꿨다. 그 과정에서 얻게 된 건 ‘나는 진짜 게으르고 나약한 인간이구나’ 라는 부정적 확신이었다.


 잘 넘겼다고 생각해온 십 대 시절의 기억도 계속 떠올랐다. 공부방에서 내준 숙제를 주말 내내 미루다가 일요일 밤 열 시, 개그콘서트의 엔딩 음악까지 다 듣고 나서야 겨우 시작해 새벽 내내 울며 겨자먹는 마음으로 꾸역꾸역 하던 일, 그마저도 다 마무리하지 못해 공부방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수학 문제를 풀던 일, 중학생 시절 내내 시험기간이 되어서야 벼락치기를 하던 일, 일찍 일어난다든지 열심히 공부하겠다든지 하는 약속을 해놓고도 내내 게으름을 피우는 나에게 화난 엄마가 ‘너는 말해놓고 지키지도 않으니 거짓말쟁이나 다름 없다’고 하던 일…….


 우울했고 불안했고 괴로웠다. 나는 게으른 사람이니까, 지금까지 계속 이런 패턴을 반복해 살아왔으니까. 앞으로도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계속 이렇게 지지부진하게 살다 인생이 끝날 것 같았다.


 그렇지만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나는 멋진 삶을 살고 싶었다. 멋진 삶을 살려면, 일단은 그럭저럭 적당히 괜찮은 정도의 삶이라도 살아야 했다. 그러려면 그놈의 게으름이란 것을 극복하고 나약함을 이겨내야 했다. 그래서 매일 아주 조금씩, 부담 없이 꾸준히 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아주 작은 뿌듯함이나마 느낄 수 있을 만한 일이 없을지 고민했다.


 그러다 어디선가 구몬 학습지를 푸는 성인이 많다는 소식을 접했다. 직장인들이 구몬 선생님에게 ‘실수로 학습지를 파쇄했어요’, ‘강아지가 물어뜯었어요’라고 핑계를 댄다는 밈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나는 곧장 구몬 일본어를 시작했다. 선생님이 일주일에 한 번 집에 방문해 점검하고 숙제를 내주는 것과, 한 주에 한 번씩 집으로 그 주치의 학습지가 배송오는 것 중 고를 수 있었다. 나는 전자를 골랐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외부의 압력이 조금이라도 있는 게 나았다.


 일주일에 한 번 구몬 선생님이 방문해 그간 푼 숙제를 채점하고 하루에 다섯 장치의 숙제를 내주었다. 다섯 장이라고 해봐야 양은 얼마 되지 않았다. 난이도도 무척 낮았다. 취준생이던 나는 시간이 넘쳐났고, 하루 30분도 걸리지 않는 초 저난도의 일을 미룰 핑계는 없었기 때문에 거의 매일 구몬 일본어를 했다. (물론 하루이틀 빼먹은 날도 있었다. 하지만 선생님이 오기 전까지는 모든 숙제를 마쳤다.) 한국어와 어순이 같아 단어만 익숙해지면 문장을 조합해 말하기가 쉬웠고, 쉬우니까 더 재미있었다. 그렇게 나는 거의 매일, 못해도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은 꼭 구몬을 했다. 2017년 말에 시작된 퀘스트는 2019년 중반, 첫 직장에 다닌 지 몇 달이 지난 1년 반만에 막을 내렸다.


 고작 하루 다섯 장, 삼십 분짜리 과제였지만 1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꾸준히’ 해왔다는 사실은 나에게 제법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근 몇 년 간 스스로에게 되새겨온 ‘할 수 있다’라는 말은 관념의 영역이었지, 실재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런데 진짜로, 나는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몇 주간 반짝 공부를 해서 자격증을 취득했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나는 무언가를 꾸준히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자아상이 ‘나는 무언가를 꾸준히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아주 조금이나마 바뀌는 것 같았다. 누군가는 ‘고작 그게 뭐 대수라고?’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머리로만 아는 것과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걸 그때 확연하게 깨달았다. 이 아주 아주 작고 귀여울 정도로 사소해 보이는 경험이, 놀랍게도 내 정신 건강의 회복을 돕는 초석이 되었다.



회칙 2. 아주 작은 성공의 경험을 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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