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 때문에 캠핑카 여행을 망설이고 있다면...
누구에게나 지우고 싶은 기억 한두 가지는 있다.
내게 두 번째로 지우고 싶은 기억은 운전에 대한 것이다. (첫 번째 치욕적인 기억에 대해선 묻지 마라. 무덤까지 가지고 갈 거다.) 아직 첫 만남의 설렘이 가시지도 않았던 연애 시절 이야기다. 당시 영양사로 일하고 있던 아내는 회사 차였던 수동 봉고를 자유자재로 몰고 다녔다. 면허만 수동으로 땄지, 완전 장롱 면허 보유자였던 내게 아내의 운전 실력은 대단한 능력으로 보였다.
하루는 아내가 모는 차를 타고 은행에 갔다. 주차장은 이미 만차 상태였고, 잠시 망설이던 아내는 차들이 오가는 통로에 차를 잠시 세우고 내게 차를 맡긴 채 은행으로 들어갔다. 여차해서 필요하면 내가 차를 비켜주리라 생각한 거다. 이 부분 기억이 좀 흐릿한데, 내가 운전을 못한다는 말을 아내에게 안 했던 모양이다. 나는 멍청하게도 그 짧은 시간 동안 뭐 별일이 생기겠냐고 안일하게 생각하고 말았다.
불과 몇 분 지나지 않아 문제가 터졌다. 주차를 하러 진입하는 차들과 빠져나가려는 차들 사이에 우리 차가 낀 꼴이 되고 말았다. 당황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혹시 아내가 달려오지 않을까 연신 두리번거렸지만 슬픈 기대는 늘 그렇듯 소용이 없었다. 차들이 하나둘씩 빵빵 대기 시작하자, 조수석에 뻘쭘하게 앉아 있던 난 진짜 할 수 없이 운전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근데, 할 줄 모르는 수동차 운전이 갑자기 될 리가 있나. 마음이 편한 상황에서 차분히 해도 어려울 판에 앞뒤로 차가 빵빵대며 눈치를 주는 상황에서야 오죽하겠는가?
클러치와 브레이크 사이에서 헛발질을 하는 사이 차는 크게 꿀렁거리며 시동이 꺼져버렸다. 똑같은 헛짓거리를 끝도 없이 되풀이했다.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앞뒤로 빵빵 거리는 차들,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 차, 오지 않는 아내...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진짜 차고 뭐고 다 버리고 도망가고 싶은 맘뿐이었다. 부끄러움과 당황스러움에 반쯤 숨이 넘어가려는 그때 아내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앞뒤 차들에게 연신 사과를 하며 운전석으로 다가오는 아내에게 자리를 양보하려 차문을 열고 나서는데, 그 참담함이란... 벌써 15년이 지났지만 그 순간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이 사건은 그렇게 내게 수동차 운전에 대한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 이후 오토매틱 차로 운전은 배웠지만, 수동차를 운전할 기회는 없었다. 덕분에 수동차 운전을 못해서 생긴 치욕을 만회할 기회는 오지 않았다. 무려 15년이나...
막상 캠핑카로 유럽 여행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캠핑카를 예약하려고 보니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유럽에서 렌트할 수 있는 대부분의 캠핑카가 수동 기어를 달고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사실이었다. 당장 예약을 하고 여행을 떠나야 하는 판에 아예 발이 묶여 버린 셈이다. 아무리 자기 최면을 걸어봐도 그 날의 악몽이 떠올라서 엄두가 나질 않았다. 서울이라면 급히 운전 학원에 연락해서 연수라도 받아 보겠지만 여긴 자그마치 인도다. (저희 가족은 인도에서 7년째 살고 있습니다.)
완전히 꼬리를 내리고 아내에게 이실직고하며 도움을 청했다. 근데, 아내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자기도 15년 동안이나 수동차 운전을 안 해서 자신 없단다. 하물며 승용차도 아니고 집채만 한 캠핑카는 운전하고 싶지도 않단다. 계획도 제대로 짜 보기 전에 여행이 좌초의 운명을 맞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런 우리 가족도 50일이나 되는 기간 동안 아무 사고 없이 잘 다녀왔다. 운이 좋았던 부분을 부정하거나 축소하고 싶지는 않다. 주차할 장소를 찾다가 잘못 들어갔던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일방통행로에서, 아무 생각 없이 구글맵만 믿고 따라갔던 피렌체의 좁은 골목길에서, 알프스를 봤다는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공포를 맛봐야 했던 스위스의 산악 도로에서, 우리는 운이 좋았다. 하지만 이 정도 행운은 스스로의 운전 실력을 과신하지 않는 조심스러운 운전자라면 누구나 누려 마땅한 것이라 믿는다.
캠핑카 운전의 모든 어려움은 그 '크기'에서 나온다. 우리가 렌트했던 독일 Sunlight 사의 T69L 모델은 길이가 7.4미터에 폭이 2.3미터 정도 되는 덩치 큰 괴물이다. 괴물이란 표현이 좀 그렇긴 한데, 처음 렌트하러 가서 만난 차의 위압감은 딱! 괴물 그 자체였다. 기본 자체의 7.4미터 길이에 자전거 랙을 더하면 거의 8미터에 육박한다. 자전거도 없으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욕심을 부린 결과다. 늘 이 욕심이 문제다. 아반떼가 4.5미터 정도 되니까 거의 두 배 가까이 되는 셈이다. 크기가 크다 보니 당연히 무겁다. 빈차만 3.5톤이다. 여기다가 짐 싣고 사람 타면 훨씬 더 무겁다. 2,300cc 피아트 엔진과 차체에다가 이 어마무시한 덩치를 얹어 놓았으니 영 힘이 달린다. 오르막만 보이면 이마에 땀이 맺힌다.
운전만 어려운 게 아니다. 세우는 건 더 어렵다. 유럽 대부분의 도시는 태생적으로 운전하기 어렵게 생겨먹었다. 원래 걸어 다니거나 마차 타고 다니던 시절에 만들어져서 그런지 운전하고 주차하는데 애로가 많다. 거기에 더해 도시 환경 보호를 위한 제약들도 많다. 이탈리아의 ZTL(Zona Traffico Limitato)이나 독일의 LEZ(Low Emission Zone)이 대표적이다. 여차하면 벌금 폭탄을 맞게 된다. 설사 무사히 시내로 차를 끌고 들어가 마땅한 자리를 찾았다 하더라도 만만치 않은 주차비가 또 한 번 발목을 잡는다.
이쯤 되면 캠핑카 여행에 대한 핑크빛 희망을 접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단점만 있다면 어느 누가 미쳤다고 캠핑카 여행을 떠나겠는가? 소소한(?) 단점들을 뛰어넘을 만한 확실한 장점들이 잔뜩 있다. 이제부터 좋은 점을 살펴보자. 우선 제일 중요한 거! 비용이 절감된다. 캠핑카는 일반 승용차에 비해 렌트비가 비싸다. 덩치가 커서 연비도 떨어진다. 주차비도 더 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볼 때 비용이 적게 든다. 식비와 숙박비 때문이다.
나라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밥 한 끼 제대로 먹으려면 상당한 지출을 각오해야 한다. 특히 스위스나 영국처럼 물가가 비싼 나라에선 한 끼 식사에 일인당 최소 1~2만 원 정도는 생각해야 한다. 4인 가족이라면 여기에 4를 곱하면 된다. 한두 끼 먹고 끝나는 여행이라면 가는 곳마다 유명한 맛집을 찾아다니며 식도락을 즐겨야 마땅하겠지만 길게 여행 다니는 입장에서 이게 쉽지 않다. 꼭 비용 때문이 아니더라도 유럽 음식이라는 게 대체로 들척지근하고 느끼하다. 잘 먹고 일어서는 순간, 칼칼한 국물과 시원한 김치 생각이 솟구친다. 이건 뭐 유전자에 새겨진 문제니까 어쩔 수가 없다. 덜 부담스럽게 끼니를 해결하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값도 싸고 맛도 나쁘지 않은 피자나 샌드위치 같은 길거리 음식을 즐기면 된다. 그러나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지, 계속 피자를 먹을 수는 없다. 두 번만 피자를 먹으면 그다음부터는 피자집이 보여도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게 된다.
유럽의 물가가 비싼 건 주로 인건비 때문이다. 그래서 조리하고 서빙하는 사람이 필요한 식당의 음식은 비쌀 수밖에 없다. 반면 식자재 가격은 오히려 한국보다 싼 경우가 많다. 그중에서도 육류, 주류(맥주, 와인), 유제품, 채소, 과일 등은 깜짝 놀랄 만큼 싸다. 식당에서 한 끼 먹을 돈으로 Aldi나 Lidl 같은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면 2~3일 훌륭하게 식사가 해결된다. 제법 한국스럽게, 엄청 푸짐하게 먹을 수 있다. 요리하는 수고가 필요하지만, 아낀 돈 생각하면 설거지하면서 콧노래가 나온다.
숙박비도 마찬가지다. 자동차 호텔이나 호스텔도 4인 가족 기준으로 10~15만 원은 한다. 이보다 싼 곳도 있지만 품질을 보증하기 어렵다. 다인실 도미토리에 가족이나 연인이 끼어서 자는 건 아무래도 불편하다. 이에 반해 캠핑카로 제대로 된 캠핑장에서 숙박을 하게 되면 4~7만 원 정도면 된다. 도시 간 이동 시에는 때로 고속도로 휴게실을 캠핑장 대신 이용하기도 한다. 이건 공짜다. 2~3일에 한 번만 차숙을 해도 평균 숙박비는 더 내려간다. 이처럼 식비와 숙박비에서의 차이가 워낙 뚜렷하기 때문에 여행 기간이 길어질수록 비용 차이는 더 분명해진다.
비용 못지않게 중요한 부분이 이동의 편의성이다. 한두 번만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여행은 짐 싸느라 떠나기도 전에 지친다. 처음에 짐 싸는 거야 여행의 설렘을 북돋우는 전희의 일부로 즐길 수도 있겠지만 이걸 여행 내내 아침마다 반복해야 한다면 이건 그냥 노동이다. 여행 기간이 길어지는 만큼 짐도 커진다. 배낭과 트렁크를 메고 이고 지고 끌고, 버스나 기차 시간에 맞춰 허둥지둥 뛰어다니다 보면 한겨울에도 등줄기로 땀이 흐른다. 캠핑카 여행은 매번 다음 잠자리와 교통편을 예약하느라 속을 태울 필요도 없다. 하루 종일 시내를 구경하다가 저녁 무렵 다음 도시로 느긋하게 떠날 수 있다. 그렇게 가다가 피곤하면 고속도로 휴게실에 차를 세우고 차숙을 하면 된다.
매일 바뀌는 숙박업소의 잠자리와 달리 캠핑카의 잠자리는 익숙하고 아늑하다. 캠핑카의 침대는 충분히 넓고 편하다. 한국에서 공수한 전기장판을 깔고, 독일 이케아에서 산 포근한 이불을 덮고, 옆에 누운 아이를 꼭 끌어안으면 거기가 바로 천국이다. 이동 중에도 피곤하다 싶으면 고속도로 변 주차 공간에 잠깐 차를 세우고 침대로 뛰어들면 된다. 이보다 더 편한 이동 방법이 있을까?
여행 중간중간, 그리고 돌아와서 아이들에게 여행하는 동안 뭐가 제일 좋았냐고 묻곤 했다. 아이들 대답은 한결 같이 '캠핑카'였다. 눈물을 찔찔 흘리며 꼭 돌아오겠다고 다짐했던 스위스의 고르너그라트 전망대도 아니고, 닌텐도 스위치를 갖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던 바티칸의 대성당도 아니고, '캠핑카'가 제일 좋았단다. 그렇다. 다른 모든 장점을 떠나서 캠핑카 여행이 갖는 그만의 독특한 매력과 즐거움은 비용으로 환산할 수 없다.
캠핑카는 세우는 순간 또 다른 여행이 시작된다. 한번 떠올려보자. 그림 같은 알프스 산맥의 설산을 배경으로 푸른 잔디 깔린 캠핑장에서 삼겹살을 구워가며 와인 한잔 기울이는 모습을... 이 정도면 조금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더라도 두 눈 질끈 감고 캠핑카로 떠나볼 만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