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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레 중독 Jul 12. 2017

[캠핑카 유럽 여행] 여행을 지켜라

여행은 자발적으로 불확실성을 선택하는 결정이다

어쩐지 모든 게 너무 순조롭다 싶었다.


하긴 처음엔 항공권 예약도 만만치 않았다. 남인도 끝자락 우리 동네에서 유럽의 '어딘가'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으니 어려운 게 당연하다. 목적지가 불분명하니 여기저기 항공권 가격을 비교해 가며 후보지를 좁혀가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갈팡질팡하던 차에 경유 시간 짧은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표가 마음에 드는 가격에 눈에 들어왔다. 오만(Oman)의 무스카트(Muscat)를 경유하는 루트인데, 왕복 2~3시간만 공항에서 기다리면 된다. 가격도 60만 원 중반으로 알아보던 중에 제일 싸다. '이거다!'라는 느낌이 왔다. 항공권은 됐으니 이번엔 호텔이다.

저녁 7시가 넘어서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하기 때문에 캠핑카를 바로 받으러 갈 수가 없다. 자연스레 하루 밤을 머물 호텔이 필요하다. 차라리 잘됐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허둥지둥 그 많은 짐을 끌고 택시로 40분이나 가야 하는 프랑크푸르트 McRent 지점까지 갈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또 네 식구가 머물 마땅한 호텔이 없다. 마음에 드는 호텔이 바로 공항 옆에 하나 있긴 했는데, 4인 가족실은 벌써 누군가가 찜해버렸다. 날짜는 속절없이 흐르고, 선택 장애자인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애만 태우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호텔의 빈방을 체크해보려고 사이트에 다시 들어갔더니, 앞서 예약했던 사람이 취소를 했는지 4인실이 예약 가능하다고 떴다. 앗싸!~ 모든 게 척척 맞아 들어가는 것 같았다. 출발을 일주일 앞둔 그날 밤, 한통의 이메일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항공권을 예약했던 사이트에서 온 메일에는 항공사 사정으로 비행시간이 변경되는 바람에 도착이 12시간 늦어질 거라는 무지 기분 나쁜 내용이, 심지어 아주 사무적이고 딱딱한 문체로 담겨있었다. 게다가 빨리 답을 안 하면 벌금을 물게 될지도 모른단다. 이쯤 되면 거의 협박이다. 예쁘게 말해도 기분 나쁠 판에... 이건 뭐... 확! 취소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여행을 일주일밖에 안 남겨둔 상황에선 내가 절대 약자다. 꼬리를 내리고 다른 방법을 찾을 수밖에...


갑자기 호떡집에 불이 났다. 열을 엄청 받았지만, 그걸로는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일단 항공권 예약 사이트에 변경된 일정을 수용하겠다는 메일을 보냈다. '나 지금 몹시 화났으니 보상안을 제시하라'는 장황한 요구도 잊지 않았다. 물론 그들이 이런 요구를 들어줄 리가 없다. 하지만 '나만 열 받을 수 없으니 너희들도 기분 좀 상해봐라' 하는, 일종의 분풀이다.


바삐 호텔 취소 규정을 찾아보니 체크인 7일 전까지만 무료 취소가 된단다. 그런데 하필이면 6일 12시간 남겨두고 이런 일이 생겨버렸다. 예약해둔 호텔로 취소 요청 메일을 날렸다. 독일눔들(이럴 땐 '눔'이다.) 규칙에 엄청 집착한다더니, 아니다 다를까 택도 없다는 답이 왔다. 100% 다 몰수된단다. 돌아오는 일정에 맞춰 사용해볼까 싶어서 날짜를 바꿔 달라고 했더니, 그것도 안된단다. 덴장... 몰인정한 말을 엄청 친절한 글로 써 보냈네. 호텔답다.   


이제 호텔 예약했던 15만 원은 날아갔고, 오만 머스킷 공항에서 15시간을 버틸 작전을 짜야한다. 아이고 머리야.


문제는 늘 생긴다. 그리고 우리는 대부분 그 답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다만 이 둘 사이에 놓인 간극을 견디는 일이 만만치 않다. 그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일까? 이 달갑지 않은 상황은 도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위 동영상은 스토아 철학에 대해 설명한 유튜브 비디오다. 요약하자면 '세상은 원래 문제 투성이야. 너무 실망하지 마. 대신 넌 그걸 견뎌낼 만큼 충분한 내면의 힘을 갖고 있어. 그러니 남 신경 쓰지 말고 잘해봐. 힘내.' 정도가 되시겠다.


동영상 앞부분에 나오는 이야기를 내 식으로 풀어보면 이렇다. 인도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은 월세 80만 원짜리 아파트다. 모든 가구와 여러 대의 에어컨까지 포함된 가격이라 나름 적당하다고 스스로 믿고 있다. 문제는 집주인들이 세금을 피할 목적으로 11개월 단위로 계약을 한다는 점이다.


개발 정체기를 맞이한 우리나라와 달리 인도는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모든 물가가 가파르게 상승 중이다. 집세도 예외가 아니다. 따라서 임대차 계약을 연장할 때마다 월세를 얼마나 올릴지가 관건이다. 만약 계약서에 별다른 조건이 명시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집주인이 10%를 올려달라고 요구했다 치자. 어떤 기분이 들까? 사람에 따라 개인차가 있긴 하겠지만 나 같은 경우엔 높은 인상 요구에 기분을 잡치고 말 거다. 그리고는 이 10%가 적절한지 아닌지를 두고 집주인과 한바탕 전쟁을 벌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만약 계약서를 작성할 때 이 인상률에 대한 조건이 포함되어 있었다면 어떨까? 처음부터 계약서에 '계약 연장 시 월세를 10% 인상한다'라고 확실히 못 박아두었다면 위의 경우에 비해서 기분이 덜 상할까? 아마도 그럴 거다. 원래 가드를 올리고 맞으면 덜 아프다. 결국 똑같은 10%이지만 내 기대치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셈이다. 만약 계약서에 10%라고 못 박아두고도 집주인이 집세를 5%만 올리거나 아예 안 올리길 기대했다면, 그건 순전히 내 사정이다. 이래서 기대치 관리가 중요하다.


여행은 자발적으로 불확실성을 선택하는 결정이다. 집 떠나는 순간 내 맘대로 안 되는 것 투성이다. 수많은 교통과 숙박 예약, 날씨를 포함한 현지의 돌발상황, 그리고 여행팀 내부의 다툼까지, 변수가 너무 많다. 그러니 이걸 다 계획하고 통제하겠다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려움을 자초하는 바보 같은 짓이다. 그래서 마음을 좀 느긋하게 먹는 게 중요하다. 여행은 약간 느슨해야 좋다. 그래야 마음을 다치지 않고 여행을 지킬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했을까? 일단, 마음을 고쳐 먹기로 했다. 경유 시간에 쫓겨서 그냥 지나쳐야 했던 무스카트(Muscat) 시내 구경을 할 수 있게 된 행운을 누리기로! 취소할 수도 없는 호텔은 대신 다음 날 아침 캠핑카 픽업 가기 전까지 잠시나마 아지트로 활용하기로! 조식 뷔페 포함이니 배 터지게 먹고, 샤워하고 단 몇 시간이라도 밤샘 비행에 지친 몸을 쉬는 걸로~ 이렇게 마음을 고쳐먹고 보니, 기분이 한결 낫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호떡집만 불태운 스스로가 좀 안쓰럽긴 하지만...


아!~ 거기에 보너스 하나! 항공사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는데, 환승 시간이 너무 길어서 무스카트에서 경유하는 동안 공짜 호텔 숙박을 제공하겠단다. 아싸~ 이쯤 되면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하나?


이번 여행, 시작도 하기 전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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