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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STR Aug 21. 2023

아내가 입원했다

임신 28주차에 찾아온 자궁수축

B와 나는 임신을 쉽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어려움이 얼마나 어려운지, 어떻게 어려운지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했다. 마치 미리 가보지 않은 날의 계획을 짜듯 구름처럼 잡히지 않는 상상을 함께 했을 뿐이다. 어느덧 28주차. 출산까지 퍼센트로 따지면 70%가 넘는 진행률. 많이 지나왔다.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 시간 동안 B는 스스로 당황스러운 몸의 변화를 받아들여야 했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몸의 상태에 민감해졌다. 사람이 사람을 만드는 것, 그리고 태중에서 충분히 성숙시켜 내보내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저절로 되는 건 없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어려움들이 튀어나오면서 B와 나는 때론 우울하기도, 때론 울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블로그에 남편이 아내의 출산 기록을 상세히 기록한 걸 봤다. 그러면서 “나중에 아이가 커서 엄마에게 감사할 수 있도록” 그 아프고 힘들었던 과정을 적어두었는데, 이번 일을 겪고 나도 꼭 기록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빠, 아랫배가 좀 아파”

B가 말했다. 새벽이었다. 어제 같이 밤 산책을 할 때, 배 뭉침이 심해지는 것 같아 이따금 쉬면서 돌다가 증상이 심해져서 집에 먼저 들어왔었었다. 그 밤 중에 일어난 일이다. B는 잠에 잘 들지 못했다. 거의 못 잤다. 정확히 아픈 곳은 왼쪽 아랫배였다. 나는 구글링을 시작했다. ‘임산부 왼쪽 아랫배 배뭉침‘ 등으로 검색했지만, 수확은 없었다. 배뭉침 자체는 임신 중 흔한 증상으로 쓰여있었고, 구체적으로 왼쪽 아랫배가 아픈 것은 자료가 없었다. 아이가 커지고 그러면서 산모의 근육과 인대를 자극해 아플 수 있다는 글은 봤다. 그걸 토대로 왼쪽으로 누워자니, 왼쪽 배가 눌려서 자극받은걸까, 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추측은 아무 쓸모 없었다. 처방이 필요했다. B는 아침밥 첫술도 뜨지 못했다. 컨디션이 눈에 띄게 안 좋아졌다.


나는 출근을 해야 했다. B에게는 병원을 가보자고 함께 이야기했다. 매번 같이 가는 병원에, 혼자 보내는 것이 맘이 쓰였지만 큰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큰일이 아니길 바란 걸 수도. 나는 저 멀리 서울까지 이동해 회사에 도착했고, B와 실시간으로 대화를 했다. 병원은 9시에 문을 연다. 증상이 있는 만큼 문 열자마자 가보자,라고 했지만 B는 그런 컨디션이 아니었다.

“쉬다가 하다가 하다 보니 아직도 준비하고 있네”

B는 웃는 이모티콘을 보내며 나에게 그렇게 이야기했다. 택시를 불러서 가라고 말했고, 안 그래도 택시를 불렀다고 이야기했다. 9시가 좀 넘어서 B가 병원에 도착했다. 산모가 많다고 했다. 좀 기다리다가 초음파를 보고, 태동검사와 자궁수축 검사를 했다. 수축검사는 20분가량 진행됐다. 뭔가 배가 뭉치거나 불편하면 손에 쥐어준 버튼을 누르라고 했다. B는 2번 정도 눌렀다고 했다. 그리고 약간 대기 후, 담당 선생님과 상담을 했다.


“또담이 1.4킬로래”

“와, 엄청 컸네”

“머리가 크고 몸무게가 3주 정도 빠르대, 그리고…“

의사 선생님은 주기적인 수축이 있다고 말씀했다. 이 말은 곧 조산기를 의미했다. 질초음파로 본 경부길이도 긴 곳은 2.9cm, 짧은 곳은 2.3cm로 지금 주차에 비해 많이 짧아졌다고 했다. B의 메시지에는 눈물 이모지가 붙어있었다.


“조심해야 한대… 이제 수액 맞아보고 상태가 괜찮으면 질정 처방하고, 안 좋으면 입원해야 된대”

상황이 급격히 진행됐다. B의 왼쪽 아랫배, 그러니까 정확히 치골 쪽이 아팠던 이유도 아기가 많이 내려와서 그런 거였다. 근육을 눌러서겠지. 생각지도 못하게 B가 입원실에서 수액을 맞게 되었다. B는 무섭다고 했다. 불안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러 안 좋은 생각과 염려, 걱정과 불안이 B와 나를 홍수처럼 뒤덮었다.


그래도 희망은 있었다. 수액을 맞고 상태가 괜찮아지면, 이라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B도 아랫배가 많이 편해졌고 치골도 덜 아프다고 했다. 수축검사는 수액을 맞으면서 한번 더 했다. 검사를 해주시는 분이 결과를 보고 바로 말씀을 해주셨나 보다.

“아까보다는 나아졌지만, 그렇다고 확 좋아지진 않았대.“

B는 입원하라고 하면 어떡하지,라고 걱정했다. 진료가 끝난 B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B는 무거운 목소리로 “입원해야 된대”라고 말했다. 입원이 결정됐다. 수요일 어느 평범한 날이었다. 나는 출근한 상태였고, B는 개학을 2일 남겨둔 날이었다.


나는 그때 회사 책상에 앉아있었는데, 내 상태가 좋지 않은 걸 본 동료가 괜찮냐고 묻자 눈물이 터졌다. 이제껏 그런 적이 없었어서 스스로도 당황했다. 멘탈이 나간 상태에서 내 이야기를 들은 동료가 먼저 아내에게 얼른 가보라고 이야기를 해줘서, 정신을 차렸다. 임원 분께 전화를 드렸고, 임원 분도 “아내가…”라는 말을 듣자마자 얼른 가보라고 했다. 그래도 명색이 팀장이기 때문에 팀방에 사정을 메시지를 남기고, 서둘러 회사를 나왔다.


먼저 집에 들렀다. 입원을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에, 챙길 것들이 많았다. 세면도구부터 속옷까지. 집에서 영통을 하면서 같이 챙겼다. 쇼핑백에 후다닥 챙기고, 병원에 도착했다. 코로나 검사를 하고, 입원 병동에 들어갈 수 있었다. 413호. B는 침대에 누워있었고 팔에 수액을 꼽고 있었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B는 “오빠!”라고 반가워하다가 이내 곧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B가 오전에 혼자서 그 두려움을 감당해야 했던 것과, B가 안 좋은 상태에도 출근해서 멀리 떨어지게 됐던 그 모든 상황이 내 탓 같아 미안했다. 그저 미안했다. B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제 같이 있으니까 괜찮아”라고 말할 뿐이었다.


B는 1인실에 입원했다. 이곳은 다인실과 1인실 시스템이었는데, B는 호기롭게 “1인실로 들어갈게요”라고 했다가 나중에 비용을 듣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얼만데?”라고 하니, 1인실은 식대 불포함으로 하루 16만 원이고, 다인실은 식대 포함해서 2만 원이라는 것이다. 다인실과 1인실 차이가 엄청나구나. 그래도 잘했다고 했다. “안 그래도 입원 생활이 낯설고 불안한데, 1인실로 잘한 거야”라고 했다. B가 불편하지 않았으면 했다. 지금은 안정이 최우선이었다.


B는 장모님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걱정 어린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 들렸다. “돈 걱정 말고 편안하게 있어”라고 장모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들렸다. 그 말을 듣고 B는 또 한 번 울었다. 엄마 아빠 전화도 받았고, B의 주변 친구들 연락도 받았다. 많은 사람이 애정 어린 걱정을 해주었다. 당장 내일은 B를 두고 출근해야 하나, 어쩌지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회사 임원 분이 연락이 와서 내일은 재택을 해도 된다고 하셨다. 입원실 재택. 감사했다. 감사한 일은 언제나 어떻게든 뿌리를 내리고 찾아온다.


병원의 간호사 분들도 매우 친절했다. 수액을 갈아주시던 분, 수축검사를 해주시던 분, 식사를 가져다주시던 분 모두 B의 안위를 진심으로 위해주셨다. 덕분에 입원실 생활이 점점 편해졌다. 하지만 입원실의 안 좋았던 점도 있었다. 가장 컸던 건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창문은 있었지만, 건물 벽이 바로 보이는 벽뷰였다. 햇볕을 좋아하는 B는 그걸 가장 아쉬워했다. 나는 조명이 아쉬웠다. 흰 주광색 조명이었는데, 흰 조명은 본능적으로 사람을 긴장하게 하는 영향이 있다. 일부러 우리집에 노란 전구색만 켜놓는 것도, 가장 편안한 공간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었다. 그런데 몸이 불편하고 마음이 불안한 사람이 쉬는 공간에 주광색 조명이라니. 조금 더 세심히 꾸몄으면 좋았을걸 아쉬웠다. “수면등이라도 가져다 둘까 봐”라며 아쉬움을 둘러댔다.


B는 거동이 힘들었기 때문에 밖에 나가질 못했다. 그래서 이 공간에 대해 더 답답해했다.

“광복절에 오빠랑 카페도 가고, 돈가스도 먹고 했는데, 그게 꿈같네.”

“그러게. 회복하는 공간이긴 한데 분위기도 그렇고 더욱이 나가질 못하니까 감옥 같기도 하다. 아니, 군대 느낌이 맞겠다. “

“군대는 그래도 햇빛은 보잖아.”

“영외에 나가진 못해도 야외활동은 하지. 감옥도 그렇고.”

“그렇다는 건 지금 감옥보다 척박한?”

“하하하“


B는 병원 밥에도 잘 적응을 못했다. 밥맛이 없다고 했다. 병원 밥은 회복을 위한 식단으로, 간이 좀 덜한 음식처럼 보였다. 그래도 매끼 단백질과 식이섬유, 탄수화물이 골고루 들어간 메뉴들이었다. 첫날은 미역국이 연속으로 나왔다. 메인 반찬으로는 생선이 나오고, 돈가스 비슷한 것, 가라아게 같은 치킨도 나왔다. 첫날 저녁은 보호자 식단도 같이 나와서 나도 함께 먹었다. 둘째 날은 내가 화상 미팅차 집에 들렀다 왔어야 했기 때문에 편의점에 들러 김밥, 샌드위치와 요거트 따위를 사갔다. B는 병원식 말고 내가 가져온 편의점 음식에 더 관심을 보였다. 나는 아이 돌보듯 다 먹고 뭐 먹자 식으로 미끼를 던졌고, 몇 번은 성공했고 몇 번은 실패했다. 입원 후반부에는 식단 하나를 가지고 B와 내가 나눠먹었다. 내가 밥과 반찬을 떠다 주고 나 한입 먹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잘 먹어야지 잘 회복하지”라며.


자궁수축 검사는 하루 2번 정도 했다. 간호사 분이 B의 배에 수신기(?) 같은 걸 2개 붙이고 나가셨다. 그래서 검사 기계를 유심히 살펴볼 시간이 좀 있었다. 수신기가 연결된 기계 머니터에는 실시간으로 그래프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종이로 출력됐다. 하나는 또담이의 심장 박동수, 그리고 하나는 자궁수축 정도를 숫자로 환산한 그래프였다. 또담이는 박동이 빠른 아이였다. 어느 다큐에서 태아일 때 심장 박동수가 높으면 나중에 예민한 아이가 된다고 해서 B에게 같이 이야기한 게 기억난다. 다큐에서 비교한 태아의 심박수가 한 명은 110대, 또 한 명은 150대였는데, 또담이는 보통 140대였고 높으면 180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활동적인 아이구나 싶었다. 그리고 또담이의 박동수는 자궁수축과도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중에 들어보니 자궁수축 수치가 MAX 100에 차면 출산 임박이라고 했다. 평온할 때는 0이다가 살짝 있을 때 2~3, 높아지면 50까지도 수치가 올라갔다. B는 본인이 실제로 느낄 뿐, 그게 자궁수축인지는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프를 볼 수 있는 나에게 계속해서 물어봤다. “조금 올라갔어.”라는 말에 우리 둘은 조금 침울해져 있다가, “그래도 처음 왔을 때보다는 나아진 것 같아”라는 말로 안심시키곤 했다.


내가 자리를 비웠던 2일 차 오전의 자궁수축 검사에서는 수축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B는 ”경과가 괜찮아서 계속 이렇게 나오면 퇴원도 할 수 있대!“라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덩달아 들떴다. 오전 미팅을 마치고 집에서 추가로 필요한 물품들을 캐리어에 실었다. 칼에 크게 베인 후에 한동안 쥐지 않았던 칼로 B가 지나가면서 먹고 싶다고 했던 복숭아도 깎았다. 오랫동안 여행을 떠나는 사람 마냥 짐을 챙기고, 병원 입원실로 돌아왔다. B는 그 와중에 꼬여버린 계획을 풀어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출산예정일에 맞춰 출산휴가를 쓰고, 육아휴직을 내는 걸 계획했었다. 하지만 당장 다음 주 개학인데 퇴원이 확실치 않은 상황. 게다가 의사 선생님은 집에서 최대한 안정을 찾으라고 한다. B는 전화를 돌리며 자신의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 조언을 얻었다. 다행히 주변에 선뜻 도움을 주고, 긴 시간을 할애해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B의 곁에는 있었다. 풀리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계획은 주변의 도움으로 일단락이 났다. 그것은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후 B가 받은 수축 검사에서는 수축이 다시 일어났다. 필시 고민하고 걱정하는 와중에 받았던 스트레스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전에는 괜찮아서 이대로면 퇴원해도 될 것 같았는데, 지금은 수축이 좀 있네요”라는 간호사의 말에 B와 나는 서로를 말없이 쳐다봤다.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B는 그래서 더 어려운 마음을 갖게 됐다. 그저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내 몸에서 자동으로 일어나는 수축이 덜 일어나거나 안 일어나길 바라는 것 밖에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으면 불안한 법이다. B는 불안했고, 이대로 퇴원을 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좋은 점도 있었다.

“아직 수축 억제하는 약품 맞지는 않았으니까, 그래도 이 정도면 굉장히 노력하고 있는 거야.”

“그건 정말 다행이야.”

“맞아.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다고 해서 나는 걱정 많았거든.”

라보파 이야기였다. 처음에 B가 입원하고 수액을 맞고 있다고 해서, 급히 찾아봤더니 라보파 이야기가 많았다. 내용은 좋지 않았다. 속이 울렁거리고 토하는 게 보통이라고 했다. 그래도 우리는 이 라보파를 투여할 만큼 심각한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울한 상황이었지만, 그저 우울하지만은 않았다.


입원실에 이틀을 있다 보니, 굉장히 익숙해졌다. 원래는 보호자용 침대를 빙자한 쿠션에서 내가 자야 했다. B는 내가 불편하다며 작은 침대지만 같이 누워서 자자고 했다. B는 한쪽에서 수액을 맞고 있고 그 반대쪽에 누워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아이패드로 드라마도 보고, 첫째 날 밤에는 또담이의 이름을 지으면서 둘 다 잠에 들었다.


“퇴원 결정 안 나면, 다인실로 옮겨달라고 하자. 너무 비싸.”

B가 고민하며 말했다.

“그러게. 근데 더 불편해지는 거 아냐?“

“화장실도 같이 쓰고, 무엇보다 오빠가 잘 공간이 애매해. 나 다인실에 가면 오빠는 집에 가서 자. 그게 낫겠어.”

B는 첫날부터 계속 집에 가서 편하게 있으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기 때문에 불편하게 있는 것 같다며 미안해했다. B는 항상 그랬다. B가 고군분투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는 B 곁에 있어주는 일 밖에 할 수 없는데. 그 무력감을 애써 “괜찮아질 거야”라고 되뇌며, 행복의 주문을 외워주는 일로 채웠었다.


3일째 되던 날, 이날은 원래 또담이를 보기로 한 정기검진일이었다. 나는 오후 반차를 썼었다. 원래는 출근을 했다가 다시 병원에 오는 걸로 계획했었는데, 퇴원을 하거나 병실을 옮기게 되면 입원실에 쌓아둔 많은 짐들 정리를 해야 했다. 지금 B의 상태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반차를 추가로 쓰고 금요일은 회사를 쉬기로 했다. 그리고 오전 일찍, 수축 검사를 다시 했다.


“흠, 어제 살짝 올라온 걸로도 선생님이 좀 보자고 하셨는데, 이번에도 수축이 좀 있네요. 어쩌면 더 있으셔야 할 수도 있겠어요.”

간호사가 출력된 그래프를 보더니 말했다. B와 나는 그 말을 듣고, 마음을 비우자고 같이 이야기했다. 점심쯤에는 수액을 빼고 수축 검사를 한번 더 했다. 수액과 항생제가 수축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는데, 이를 제거하고서도 수축이 적으면 퇴원하자는 계획이었다. 어쩌면 마지막 시험이었다. 편안한 상태로 있자고 했다. 학교 생각도, 어떤 불안한 생각도 - 생각이 사람 마음대로 되지 않지만 - 하지 않고 그냥 평안한 상태로. 아이패드로 같이 드라마를 봤고, 그래도 B는 편안했는데 옆에서 금세 잠이 들었다. 그 와중에 검사가 끝났다.


B는 휠체어를 타고, 정기 검진을 하러 병동으로 내려갔다. 입원동만 있다가 사람이 바글바글한 공간에 오니, B는 기분이 이상하다고 했다. 나도 우리에게 어떤 알 같은 게 싸여있어서 저들과 분리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래 병원에 속해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먼저 또담이를 보기 위해 초음파실 앞에 앉아있었다.

“오빠, 나 많이 걱정돼.”

“어떤 마음이야?”

“그냥 불안해. 말로 표현을 잘못하겠어.”

초음파실 앞에서 앉아 대기하고 있는 우리 둘. 한쪽에는 휠체어가 있고, 나는 B를 토닥여준다. 금세 눈물이 차올라 뚝뚝 떨어지는 B를 보면서, 나는 B 손을 꼭 잡았다. 나 스스로도 ‘괜찮아. 잘될 거야. 걱정하지마’라고 되뇌였다. 또담이를 본다고 설렜던 게 엊그제인데, 그 이야기는 위에 올라오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 걱정이 많은 부부였다. 초음파실에서 B를 불렀고, B는 눈물을 서둘러 닦았다.


또담이는 건강하게 잘 있었다. 대견했다. 평균보다 좀 크긴 하지만 초음파를 봐주시는 분은, ”이 정도는 괜찮아요“라고 말씀하셨다. 그런 한마디가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이날은 또담이의 입체 초음파를 찍는 날이었다. 마치 4컷사진 같았다. 여러 초음파를 찍고 버튼을 이리저리 조작하더니 신기하게 또담이의 입체 형상이 나타났다. 그런데 코가 뭉툭했다. 만화영화에 나오는 동그란 코처럼. 그걸 눈치챘는지 초음파사 분은 ”지금 자궁 벽에 눌려있어서 그런 거예요. 원래 이런 경우가 많아요.“라고 몇 번이나 우리에게 이야기했다. 어떤 초음파는 잔뜩 얼굴을 찡그린 표정이었다. 그게 귀여웠다. 벽에 얼굴을 대고 있어서 잘 안 나온다고 아쉬워하다가 마지막에 폭풍 촬영을 하시더니, 몇 장을 건졌다. 신기했다. 이제 눈코입 다 있고, 심지어 볼살까지 있는 생명이 되었구나. 정말 생명체였다. B는 대기하면서 들었던 감정들이, 또담이 얼굴을 보자마자 몇 번을 푸하하 웃더니 사르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또담이가 엄마를 지켜주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웠다. 초음파사 분이 뽑아준 사진을 들고 나와 한참을 보면서도 또 한참을 웃었다. 다른 입체 초음파 사진을 검색해 보니, 태아인데도 코가 오뚝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그걸 보고 우리는 ”또담이 잘 생긴 건 아닌 거 같아, 그치.“라며 깔깔 웃었고, ”그래도 귀엽다.“라며 몇번이고 사진을 봤다.


그리고 대망의 진찰 시간. 마지막 수축검사 시험 결과표를 받는 시간이다. 의사 선생님도 우리 마음을 알아서일까, 들어가 앉자마자 본론을 이야기하셨다.

”지금 수액 빼고 이 정도면 퇴원해도 될 거 같아요. 대신 한 주 뒤에 다시 봅시다. 절대 안정 취하시고요. “

감사합니다, 소리가 절로 나왔다. 만세라도 부르고 싶었다. 마음을 비우고 있었는데, 그 말을 들으니 더욱 기뻤다. 질정 처방을 받고, 절대안정 처방을 받았다. 절대안정이란, 계속 누워있으라는 말이었다. 그래도 집에 갈 수 있다는 사실과, 엄청나게 답답했을 B를 데리고 바깥에 나올 수 있는 것 자체가 감사했다.


그렇게 우리는 입원실을 정리하고, 가져온 짐들을 캐리어에 모두 넣고, 입원 병동의 감사한 간호사 분들에게 인사를 돌린 뒤, 병원을 나왔다. 차에 탄 B는 한결 개운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또 다른 불안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었다.

"오빠, 나 좀 뒤로 젖히고 갈게."

보조석에서 길을 같이 봐줘야 한다며, 내가 항상 뒤로 젖히고 쉬라고 해도 안된다고 하던 B였다. 그만큼 B는 절대안정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병원을 나온 뒤에 있을 수도 있는 아픈 상황을 어떻게 대비해야 하지,라는 걱정도. 나는 그 부담과 걱정을 덮어줘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오늘은 퇴원 기념으로 맛있는 거 먹자."

나름 파티처럼 족발까지 시켜서 먹었지만, B는 잘 먹지 못했다. 당기지 않는다고 했다. B는 육아 커뮤니티에 '눕눕'을 검색해 보면서, 절대 누워있어야 하는 처방에 대해 적응하려고 애썼다. 퇴원은 분명 기쁨이었다. 하지만 마음에 홍수가 날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스스로 계획하고 조절하지 못하는 무력감, 놓고 온 일들에 대한 스트레스,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이 밀려오기 시작하는 때였다.


나는 그런 B를 쓰다듬으며 “괜찮아”라고 말하고, 햇살이 들어오는 소파 위에서 근사한 노래를 듣는다. 괜찮아질거다. B는 결국 잘 버텨낼 것이고, 웃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야지. 그런 가족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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