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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영씨 Aug 08. 2019

대화가 필요해

크루즈의 정찬 레스토랑

일요일 저녁만 되면 유일하게 찾아보는 채널이 있었다. 바로 개그콘서트다. 그중에서도 꼭 빠뜨리지 않고 챙겨봤던 프로그램은 ‘대화가 필요해.’였다.


대화가 필요해 프로그램에서의 화면은 늘 식탁. 식사시간에 멈춰있다. 무뚝뚝한 경상도 남편과 애교 많은 경상도 부인의 식사시간은 문자 그대로 ‘食事時間’. 그 시간은 오로지 먹는 일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밥을 먹는 데에 집중을 해야 한다. 남편 김대희는 식사 시간에는 말이 없다. 아님 신문을 보거나, 티브이를 보기도 한다. 부인 신봉선은 적막함이 흐르는 식사시간이 싫다. 지친 하루 마지막 저녁시간 남편과 단둘이 식탁에 앉아 그날 하루 있었던 일들을 공유하고 싶고, 떠들고 싶다. 애교도 부려보고, 화려한 옷을 입어 주의도 끌어보고, 개그로 남편을 웃겨보려고도 하지만 결국 돌아오는 건 남편의 혼꾸멍이다.


‘밥묵자!’


이런 장면들을 보면서 당시에는 경상도 사람들의 일상과 참 많이 닮았다고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내가 보았던 ‘대화가 필요해’의 장면은 경상도 사람들의 모습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바로 크루즈에서 말이다.



크루즈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은 크게 두 곳으로 나뉜다. 뷔페 레스토랑과 정찬 레스토랑.


뷔페 레스토랑은 잘 아는 뷔페 스타일 레스토랑이다. 오픈 시간에 자유롭게 입장하여 먹을 수 있다. 정해진 식사 테이블도 없고, 내 전문 웨이터도 없다. 이 곳에서는 복장도 자유롭다. 맨발에 수영복이 아님 되고, 실내화에 목욕가운만 안 걸치면 된다. 이와 반면에 정찬 레스토랑은 상반된 곳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정해진 식사 시간이 있고, 내가 앉아야 할 테이블이 있다. 그 테이블을 책임지는 나의 전문 웨이터가 있다. 포멀, 스마트 캐주얼, 캐주얼, 빨간색, 하얀색의 의상 등 매일 저녁 갖춰 입어야 할 복장이 있다.


로열캐리비안 인터내셔널 스펙트럼호의 뷔페 레스토랑 Windjammer (출처: 로열캐리비안 인터네셔널)
스펙트럼호의 정찬 레스토랑 (출처: 로열캐리비안 인터내셔널)


물론 정찬 레스토랑이 뷔페 레스토랑과 비교했을 때 형식적이고,  편하게 쉬러 간 크루즈인데  굳이 식사시간에 맞추어 옷에 신경 쓰고 그날의 테마에 맞춰한다는 점이 귀찮게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 크루즈이기 때문에, 크루즈여서 해볼 수 있는 것 아닐까?  사람들마다 크루즈 여행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장면들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 그 장면은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배우자와 와인잔을 기울이며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장면이었다. 크루즈에서 웨이트리스로 근무 중일 때에도 포멀 나잇이 되면 기분이 평소와는 달랐다. 크루즈에서 근무하고 있지만 정말 크루즈에 있는 느낌이었다.  며칠 전 까지만 해도 편하게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했던 손님인데도, 포멀 나잇에 드레스를 멋지게 입고 나타나면 나도 모르게 내 억양이나 목소리에 더 신경을 쓰고 더 우아하게 손짓을 건네기도 했다.


몇 년 뒤 크루즈 여행자로 그동안 꿈꾸던 크루즈 장면을 연출할 수 있다는 설렘은 얼마나 컸던지 한 달을 쇼핑해도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고르지 못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막상 크루즈에 타서 정찬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다 보니 나의 화려한 드레스도, 우아한 음악도, 나만의 전문 웨이터도 꿈꾸던 크루즈 장면을 완성하지 못했다.

그 장면을 완성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대화’였다.


누군가가 나에게 정찬 레스토랑과 뷔페 레스토랑의 차이가 무엇인가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대화를 할 수 있어서요.’라고 말할 것이다.



정찬 레스토랑에서는 코스요리가 준비되어있다. 식전 빵, 애피타이저, 메인, 디저트 코스로 나오며 애피타이저를 2가지 정도 주문하는 경우가 많아 웨이터가 총 4-5번 정도의 서빙과 4-5번의 테이블 정리를 해주고 나면 식사시간은 보통 1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 소요된다. 여기에 와인과 식후 커피까지 곁들이면 더 길어질 수도 있다. 식사시간으로 2시간을 쓴다는 건 아마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일은 아닐 것이다.  만약 크루즈가 아니라 집이었다면 저녁을 차려 30-40분 안에 먹고, 거실에서 과일을 먹으며 티브이를 본다던지, 각자 책을 읽거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휴식을 취했을 것이다.


크루즈에선 이러한 2시간의 식사시간이 매일매일 주어진다.  식사를 하면서 티브이를 볼 수도 없고, 먼저 먹고 상대방을 기다릴 수도 없다. 식사는 같이 나오니까. 식사 속도도 서로 맞추어야 한다.  그러니 2시간의 식사시간은 온전히 나와 식사를 함께 하고 있는 동행자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다.  서로의 일 이야기부터,  앞으로 어떻게 살면 좋을지, 다음 여행은 어디로 갈지, 왜 나는 어벤저스를 안 보는지, 연애 때는 괜찮다고 하더니 결혼 후에는 왜 안 괜찮다고 하는지. 크루즈 여행 동안 매일 2시간은 다양한 주제로 시공간을 넘나들며 대화를 했다. 그리고 이 시간이 나에겐 크루즈 여행 중에서 가장 가치 있고, 잊지 못할 시간이기도 했다.


크루즈 여행 전에는 이 저녁식사 2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지 몰랐다.

길다고 생각했던 2시간이 부족할 것이라고도 몰랐다.

크루즈의 정찬 레스토랑은 지금 이 순간 나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이 사람과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해 주었다.


왜 매일 저녁 다른 테마로 옷을 갈아입게 하라고 했는지도 알 것 같았다.  입는 옷의 분위기에 따라 대화의 내용도 그에 맞게 어울려지는 것 같았다.  다른 승객이 입은 옷들을 보면서 또 대화거리가 생기기도 했다.  서로 입은 드레스를 칭찬하면서 낯선 사람들과도 이야기의 물꼬를 트기도 했다.


구글에서 Cruise formal night이라고 검색하면 볼 수 있는 크루즈에서의 포멀나잇 사진들.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게 둘이서 한참을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디저트가 우리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벌써 2시간 가까이 시간이 흐른 것이다. 주변의 다른 테이블들을 둘러보았다.  어쩜 다들 우리처럼 할 말이 많은지 시끌벅적하다. 식사가 끝난 뒤에도 레스토랑을 떠나면서 이야기를 이어가고,  센트롬 바로 가자고 한다. 아마 그곳에서도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 갈 것이다.


저녁이 있는 삶. 그 속에는 대화가 빠져있다.  

대화가 있는 저녁.  그리고 그 저녁이 삶으로 이어질 때 우리는 진정으로 저녁이 있는 삶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난 크루즈에서 그것을 느끼고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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