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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x Oct 20. 2016

비웃지도 울지도 화내지도 않고

『스피노자와 정치』 서평

발리바르 지음, 진태원 옮김 (2014)

    『스피노자와 정치』(Spinoza Et La Politique)는 우리에게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합니다. 스피노자(Benedictus de Spinoza)라는 사상가가 과연 우리에게 정치에 대해서 무엇을 알려줄 수 있겠느냐고 말이죠. 정치란 무릇 인간의 구체적인 행위 양식으로 무척이나 복잡다단하고 변화무쌍해보입니다. 인간주체들의 행동과 의지에 따라서 쉴새없이 변모하죠. 그런데 반면 스피노자의 철학적 방법론은 데카르트와 근대 과학혁명의 영향으로 수학적이고 형이상학적입니다. 예컨대 『윤리학』(Ethica)의 서술방식이 마치 수학적 증명을 하듯이 정의와 공리를 먼저 설정하고 그로부터 연역되는 정리들을 논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우주를 관통하는 원리가 존재하며 그것을 알기 위한 바람직한 방법은 고도로 추상화된 수학적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당대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때 현실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형이상학적인 철학과 변화무쌍한 현실의 정치는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요? 만약 그 두 가지가 연결된다고 하면 그건 지나치게 거리가 있는 두 영역을 억지로 끼워맞추는 것은 아닐까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는 여기서 스피노자 연구에 대해 중요한 변환점을 가져왔던 두 사람의 연구를 참고하여 문제에 대응합니다. 한 사람은 알렉상드르 마트롱(Alexandre Matheron)입니다. 마트롱은 스피노자 연구의 기념비적 저작인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Individu et communauté chez Spinoza)를 남겼습니다. 발리바르는 마트롱으로부터, 그리고 개체화의 철학자인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어 '관개체성(trans-individuality)' 개념을 통해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을 규명하고자 합니다. 관개체성이라 함은 간단히 말해 존재하는 개체는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다른 개체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즉, 개체는 통일적인 하나의 속성으로 점철된 단일자나 원자로서 파악해서는 안 되고 언제나 다양한 복합체로서 파악해야 된는 것이죠. 특히 『윤리학』의 정리 26부터 정리 29에 이르는 부분을 정리하면서 발리바르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실체의 무한한 생산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실존과 작업은 사실상 동의어들이다. 곧 실존하기는 작업하기, 또는 다른 실재들에 대해 활동하기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 작업 자체는 항상 필연적으로 다른 실재 또는 원인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원인짓다"는 다른 실재가 작업하는(또는 결과를 생산하는) 방식 자체를 변양시키는(또는 시몽동이 신호이론의 어휘를 빌려 와서 말하듯이 "변조하는") 실재의 작업이다. 이 때문에 원인들의 무한한 연관은 독립적인 선형적 계열들의 추가나 원인과 결과의 계보(A는 B를 "원인짓고", B는 C를 "원인짓고", C는……)가 아니라, 독특한 변조들의 무한한 연관망에 의해서만, 또는 변조하면서 동시에 변조되는 활동들의 동역학적 통일성에 의해서만 제대로 표상될 수 있다(어떤 작업에 대한 B의 변조 화동은 어떤 C들의 활동에 의해 변조되며, C들은 어떤 D들의 활동에 의해 또한 변조되고……).
─『스피노자와 정치』, pp.216-217


    이러한 발리바르의 논지를 따라가보면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실존이란 단순히 A와 B, B와 C가 선형적으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무수히 다양한 요소들이 서로 맞물려 변화하는 가운데에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스피노자는 처음부터 모든 개체는 자신의 형태와 실존을 보존하기 위해 다른 개체들을 요구한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p.222)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관개체성이 왜 중요할까요? 이 개념은 스피노자의 철학이 단순히 세계와 실체의 원리로부터 경험세계를 구성하는 변양의 질서가 지배된다는 환원적 논변이 아님을 밝혀주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서 스피노자의 철학은 실체에 대한 형이상학적 논의에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파악하고 살피는 데 적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즉, 관개체성의 철학자로서 파악될 때 비로소 스피노자는 단순히 실체의 원리에 대해서 기술하고자 했던 형이상학자에서 벗어나 인간과 인간이 정동과 이성에 따라 상호작용하며 만들어내는 여러 가지 사회성의 효과들과 그것의 동역학적 움직임에 주목한 정치철학자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한 사람의 스피노자 연구자는 바로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입니다. 네그리는 『야생적 별종』(The Savage Anomaly)이라는 책을 통해 스피노자 연구에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마트롱과는 달리 네그리는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이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적 연구와는 다소간 독립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에서의 핵심 개념은 물티투도(multitudo), 즉 '다중(multitude)'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여기서 다중의 역량이야말로 정치체의 근간이 된다고 분석하는 스피노자의 논변들을 가져와 자신의 자율주의(autonomia)를 발전시키는 자양분으로 삼습니다. 즉, 다중에게는 스스로의 삶을 능동적으로 조직해나갈 수 있는 역량이 존재하기 때문에 다중은 권력에 저항해 해방을 쟁취하고 자율적 삶을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죠. 이는 정치적 변화의 주체를 단일한 정치적 의식이나 이해관계에 놓인 통일적 집단으로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복수의 인간들이 상호작용하는 다중으로 이해함으로써 정치철학의 새로운 화두를 형성하는 것이었습니다.

    발리바르 역시 네그리의 이러한 연구성과들을 받아들입니다. 다만 발리바르는 물티투도가 지닌 다수성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 대중들(masses)이라는 번역어를 채택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으며, 더 결정적으로는 바로 그 대중들에 대한 스피노자의 양가적 입장을 고려한다는 점에서 네그리의 스피노자 독해와는 전혀 다른 방향성을 갖게 됩니다. 스피노자는 분명 대중들의 역량이야말로 정치체의 근간이라고 보았지만 동시에 대중들로의 복귀에 대해서도 아주 부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대중들은 이성에 의해서만 사회성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동요하며 파괴적인 결과로 치닫을 수 있는 정념에 의해서도 사회성을 구축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입장은 스피노자가 경험했던 당대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죠. 당시 유럽에서 가장 선진적인 공화정 체제를 구축했던 네덜란드에서 귀족 오라녜(Oranje) 가문의 선동으로 인한 대중 폭동에 의해 공화정 지도부가 살해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한때 지나치게 충격을 받은 스피노자는 이에 분개하여 '극도의 야만(Ultimi barbarorum)'이라고 쓴 천을 내걸려고 하다가 친구들의 제지를 받기도 했습니다. 마음을 다잡은 스피노자는 정념에 이끌리는 대중들의 모습을 '비웃거나 울거나 화내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자 했습니다. 그런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대중들은 그 자체로 사회를 지탱하고 움직이는 역량을 지닌 주체들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신의 예속이나 파멸을 위해서도 움직일 수 있는 주체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를 유념하면서 발리바르는 '대중들로의 복귀'에 대한 스피노자의 조심스러운 입장을 고려하는 가운데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을 이해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스피노자와 철학』은 관개체성과 대중들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스피노자가 민주주의에 대해 갖고 있는 관점들을 상세하게 풀어나가기 시작합니다. 가장 먼저 『신학정치론』(Tractatus Theologico-Politicus)을 분석하면서 발리바르는 대중들의 속성으로부터 스피노자가 민주주의를 '가장 자연스러운 정체'로 규정하는 과정을 따라갑니다. 대중들은 억압될 수 없는 최소한, 즉 각자의 경험세계로부터 유래한 자신만의 기질(ingenium)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한편 주권자는 분할되지 않는 절대적 주권을 유지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국가는 여러 집단의 이해관계에 의해 쪼개어져 유지될 수 없을 테니까요. 그러니 이 두 가지를 모두 만족시키면서 정체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대중들의 서로 다른 기질을 억압하지 않으면서 다소간 그것을 수용하는 정체, 즉 민주주의가 형성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스피노자가 민주주의를 가장 자연스러운 정체로 보았던 이유죠.

    그러나 『신학정치론』의 이러한 분석은 순환논리에 빠지게 됩니다. 이론적으로는 국가의 성립조건 자체를 규정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조건들을 겹쳐놓았다는 점에서 순환논리가 발생합니다. 즉, 이 경우에 국가를 안정적으로 형성하는 조건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의 답은 민주주의가 되고, 반대로 민주주의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의 답은 국가를 안정적으로 형성하는 조건이라고 답하게 되는 것이죠. 또 한편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스피노자의 분석은 실천적 순환논리에 빠지게 됩니다. 민주주의적으로 기능하지 않는 국가는 알아서 쇠락하고 민주주의적으로 기능하는 국가는 알아서 잘 유지된다는 논리 하에서라면 더 나은 국가를 위해서 실천적으로 개입할 여지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어떤 조건들' 하에서 국가와 정치가 기능하는가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죠. 나아가 오라녜 파의 반혁명이라는 결정적인 계기를 맞게 되면서 스피노자는『정치론』(Tractatus Politicus)을 집필하게 됩니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해당 저작을 통해 상이한 정치체들은 사실상 추상화된 개념이며 이 개념의 실질적인 부분은 대중들의 역량이 나타나는 양상이라는 점을 짚습니다. 그리고 이들 상이한 정치체들이 어떤 조건 속에서 민주주의로 나아가게 되는지, 즉 대중들의 역량이 나타나는 양상은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한 논변이 제시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부분은 스피노자가 『정치론』의 여백으로 남겨놓은 마지막 부분(민주주의에 대한 부분)을 해석하는 발리바르의 방식입니다. 발리바르는 이 빈 공간이 스피노자의 건강 악화로 인한 것이 아니라 스피노자가 논리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극복하기 힘든 난관(aporia)에 봉착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즉, 아파서 쓰지 못한 게 아니라 쓰고 싶어도 뭐라고 써야할지 몰라서 비우게 되었다는 것이죠. 하지만 발리바르는 도리어 이러한 공백으로 남겨진 민주주의에 대한 설명이야말로 스피노자 정치철학의 강점을 이루는 것이라고 봅니다. 바로 민주주의를 어떤 구체적인 원리나 내용을 가진 정체로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의 운동과 성격, 그리고 그에 대응하는 정치적 지배의 원리(imperium)의 동학에 따라 이행하게 되는 방향으로 제시함으로써 '봉기와 헌정의 끝없는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 내지는 '민주주의의 민주화'라는 기획에 대한 통찰을 제공해주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발리바르는 『윤리학』에서 전개되는 스피노자의 논변을 따라서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의 핵심적인 요소로서의 사회성, 복종, 교통의 문제를 다룹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 유명한 스피노자의 정념과 이성에 대한 분석이 제시되죠. 이성을 통해 조직되는 사회성은 능동적인 것으로서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는 관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인간 서로가 서로의 삶에 중요한 기반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나가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인식과 철학이라는 것은 곧 그 자체로 인간적으로 더 나은 삶의 방향으로 전환하기 위한 하나의 실천이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를 발리바르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죠.


이로써 우리는 왜 스피노자식 민주주의의 본질적 측면은 처음부터 교통의 자유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또한 '정치적 신체' 이론은 왜 단순한 권력의 물리학이 아니고, 대중들의 복종의 심리학도, 법질서를 형식화하기 위한 수단도 아니며, 가능한 최대 다수가 가능한 최대한을 인식하기(『윤리학』 5부 정리 5~0)를 구호로 내건 집단적 해방의 전략에 대한 탐구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스피노자와 정치』, p.146


    한편, 사회성을 조직하는 데에는 이성만이 작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정념 또한 작용하는데요. 인간 집단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동일한 방식으로 사랑하는 자들과 동질감을 느끼고 집단적 정체성을 공유하게 됩니다. 예컨대 민족정체성이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입니다. 국가라는 동일한 대상을 동일한 방식(동일한 예법, 예컨대 국기에 대한 경례라거나 국가대표 응원이라거나 등등)으로 사랑할 때 우리는 동일한 민족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하나가 되었음을 체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념에 의한 사회성은 언제나 내부에 '차이에 대한 공포'를 포함하고 있는 양가적인 것입니다. 즉, 동일한 대상을 동일한 방식으로 사랑하지 않았을 때 대중들로부터 받게 될 미움과 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항상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죠. 그리하여 이러한 정념은 양가성 속에서 동요하게 됩니다. 게다가 정념은 인간이 쉽게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능동성에 해당하는 이성과 정반대로 수동성의 영역에 속합니다.

    그리하여 인간 집단은, 그리고 정치체는 이성(능동성)과 정념(수동성)의 복잡한 결합 속에 마련된 사회성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를 이해하는 것이 곧 정치를 이해하는 하나의 중요한 방식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스피노자의 분석이 우리에게 어떤 소용이 있을까요? 발리바르는 이러한 분석을 마르크스주의의 공백으로 남아있던 정치론을 구성하는데 적용하고자 했습니다. 마르크스(Karl Marx)와 엥겔스(Friedrich Engels)부터 레닌(Vladimir Lenin)으로까지 이어지는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토대-상부구조의 장소론적(topographical) 도식에서는 상부구조와 이데올로기의 기능이 충분히 규명되지 않은 채 남아있었습니다. 토대로서의 생산양식(생산관계-생산력)의 모순이 극대화되면 변혁의 움직임이 창출되며 이에 따라 상부구조는 자동적으로 변화에 뒤따르게 되는 것으로 이해되었죠.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란 허위의식에 불과하며 변혁의 과정에서 '외부'로부터 개입하여 제거해야 할 대상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관점에서는 경제적 층위의 모순이 심화되고 있음에도 이행이 이뤄지지 않는 문제점들을 충분히 설명해낼 수 없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자본주의 경제의 위기와 모순의 심화 속에서 파시즘이 태동한 것이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자로서의 계급 정체성보다 앞서서 그들을 '민족의 구성원'으로 규정하고 호명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해 이해하고 그에 개입할 필요가 있었음에도 그렇지 못했고 그리하여 만국의 노동자들이 단결하기는커녕 오히려 자국의 이익을 위해 폭력과 야만을 옹호하는 비극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리하여 발리바르의 스승인 알튀세르(Louis Althusser)와 그 제자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의 원인으로 이데올로기 개념의 동요를 꼽고 마르크스주의의 일반화(즉, 보다 더 확장된 과학성)를 위하여 이데올로기론을 발전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알튀세르가 스피노자, 프로이트(Sigmund Freud), 그리고 라캉(Jacques Lacan)과 푸코(Michel Foucault)의 이론을 통해서 호명과 개인의 주체화라는 문제를 주로 연구했다면, 발리바르는 그 중에서도 특히 스피노자에 역점을 두어 그것을 보다 사회적인 층위로까지 확대하여 규명하고자 했던 것이죠. 특히 『스피노자와 정치』는 그런 의미에서 발리바르가 스승인 알튀세르와 국가에 대해 이견을 보이고 독자적인 사상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국가와 정치체를 독창적으로 이해하고자 한 시도의 산물이며,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넘어선 마르크스주의의 기획을 이해하는 중요한 저작 중 하나인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스피노자와 정치』가 소개하는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이란 변화와 해방을 위해 오늘날 우리가 살펴야 할 지점은 바로 대중들의 역량과 그들의 역량이 조직되는 방식임을 보여주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래 정치란 다수의 사람들의 역량이 뒷받침되어야만 그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정치적으로 어떤 결단이 내려졌다고 하더라도 그 정치가 강제성을 갖지 못한다거나 대중들이 이에 반발하여 따르지 않는다면 그 결단은 의미가 없을 테니까요. 결국 정치란 항상 사회적인 보편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대중들이 정치적으로 내려진 결정과 통제에 순응한다는 전제에서만 기능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정치는 항상 대중들의 역량에 기초해서만 가능하다는 스피노자의 지적은 우리에게 큰 깨달음을 줍니다. 더 나아가 스피노자가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 그 대중들이 때로는 자신들의 자유와 이익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변화와 해방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라면 그것에 비참해하며 눈물 흘리거나 냉소적으로 비웃거나 그들과 자신을 구분하며 우중을 향해 화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포함된 이 사회의 구조와 관계망을 냉철히 따지고 살펴야 한다는 것이죠.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은 그래서 단순히 그 내용적인 함의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스피노자가 철학에 접근하고자 했던 자세로부터도 큰 울림이 나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는?

프랑스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 루이 알튀세르, 장 이폴리트, 조르주 캉길렘, 자크 데리다에게서 사사했다. 현재 프랑스 파리10대학교(낭테르) 명예 교수 및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어바인 캠퍼스 특훈 교수로 일하고 있다. 맑스, 스피노자 등을 연구하며 맑스주의 및 근대 정치철학의 주요 범주들을 재구성하고 있다. 『스피노자와 정치』(1985/2005), 『대중들의 공포』(1997/2007), 『정치체에 대한 권리』(1998/2911), 『우리, 유럽의 시민들?』(2001/2010) 등이 국역되어 있으며, 그밖의 주요 저서로 『『자본』을 읽자』(Lire le Capital, 1965)와 『평등자유 명제』(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2010) 등이 있다.

(진태원 선생님이 쓰신 소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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