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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나 Oct 09. 2023

오늘의 역사가 쓰여지는 밀라노

4. 밀라노 대성당, 최후의 만찬

이튿날은 우리가 밀라노에서 온전히 보낼 수 있는 유일한 하루였다. 전날 강행군 일정도 소화했겠다, 우리가  계획한 것은 딱 2가지였다. 밀라노 대성당과 최후의 만찬 구경하기. 고백하건대 예약 경쟁이 치열한 최후의 만찬 티켓을 손에 넣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모종의 성취감을 느낀 터라 실제 작품 관람으로 소임을 다하고 나면 밀라노에서의 나머지 시간은 쇼핑도 하고 즉흥적으로 채워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숙소는 성당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어 비교적 여유로운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어제 까르푸에서 사 온 요거트로 배를 간단히 채웠다. 자, 이제 밀라노 탐방을 시작해 볼까. 한껏 신난 발걸음으로 숙소를 나섰다.


나흘동안 천혜의 자연을 흠뻑 누리고 온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또 다른 세상이었다. 전날 밤 까르푸를 갔던 방향의 반대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위치한 대로변에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브랜드 상점이 길가를 따라 양옆으로 쭉 펼쳐져있고 출근길에 분주한 이들이 그 사이를 지나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면 유니클로며 세포라가 눈에 들어오던 그 거리에서 낯선 느낌을 받은 것은 머리 위로 늘어진 트램 전깃줄, 그리고 가게가 입점해 있는 건물 때문이었다. 어느 한 곳 하나 장인의 손길이 거치지 않은 곳이 없어 보이는 고풍스러운 건물들. 이태리에 온 것이 다시 한번 실감 났다.


감탄을 멈추고 다시 성당을 향해 걷던 우리의 발걸음을 또 한 번 잡아 세운건 다름 아닌 스타벅스였다. 길거리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는 쨍한 초록색의 시그니처 로고 대신 리저브 매장을 표시하는 R 사인을 은은하게 내건 밀라노 스타벅스의 모습은 마치 “계급 떼고 붙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커피왕국 이태리에서 실력으로 겨뤄보고 싶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을까. 우리 역시 그 승부의 현장이 궁금해 매장에 들어갔지만, 소중한 모닝커피는 다른 카페를 위해 아껴두기 위해 내부를 한 바퀴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우리의 사례 한정으로는 스타벅스의 패배인가 싶지만 2018년 밀라노 매장을 시작으로 이태리 시장에 진입한 스타벅스는 2023년 5월 몬테 치토리오 광장에 25번째 매장 문을 열며 로마 진출에까지 성공했다고 한다. 커피 자부심이 강한 이태리인들에게도 미국식 카페가 어필을 하는가 보다.

10분 거리의 짧은 길에서 멈추고 걷기를 반복하다 밀라오 대성당에 도착했을 때 광장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인파를 뚫고 성당 가까이 다가갔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부터 사진으로 보고 또 보면서 감탄을 멈출 수 없었던 건축물을 눈앞에 마주하는 것은 압도적인 경험이었다. 건물 기둥에서 첨탑 끝으로, 그 꼭대기에서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성인상을 차례로 훑고 지붕선, 창틀과 문짝 장식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시선을 돌리자 외벽을 이루는 대리석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각기 다른 색깔로 모자이크를 만들어내는 수천만 개의 조각은 몇 시간 동안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오래 기억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성당 구석구석을 사진으로 남기고, 다른 관광객들과 주거니 받거니 사진을 찍어주고 서로의 기억이 되어주기도 하며 시간을 한참 보냈다.

밀라노는 구글맵을 켜고 다닐 필요 없이 발길 닿는 곳마다 볼거리가 넘쳤다. 대성당 뒤편으로는 화려한 외관과 럭셔리 입점 브랜드의 시너지로 그 휘황찬란함이 배가되는 갤러리아가 있었고, 쇼핑몰을 빠져나오면 곧바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동상이, 다 빈치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라 스칼라 오페라 극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거리를 채우는 것은 일상을 살아가는 이태리 사람들, 그리고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관광객이었다. 같은 자리를 지키며 수백 년 역사의 현장이 된 곳에서 오늘의 이야기가 쓰이고 있는 중인 것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썼다. 저마다의 소원을 마음에 품은 사람들 사이에 껴서 갤러리아 바닥의 황소 거시기에 발 뒤꿈치를 대고 돌며 행운을 기원했고, 알싸한 가을 공기가 가을볕에 달궈져 입고 있던 자켓을 벗어버리고 싶어 질 때까지 정처 없이 걷기도, 눈에 띄어 들어간 카페의 노천 테이블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도시 한가운데에서 예상치 못하게 다 빈치상과 만난 순간은 이후 밀라노를 회상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기억 중 하나가 되었다. 별천지 갤러리아의 여운을 단번에 씻어내는 점잖은 아우라의 건물로 둘러싸인 광장, 그 중심에 제자 4명의 수호를 받은 채 우뚝 솟아있는 인류 최고 천재의 조각상, 그리고 그를 일상 속으로 데려와 자연스럽게 기리는 이태리인들에 대한 부러움 등 짧은 시간에 들었던 여러 인상이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조각상 근처 벤치에 앉아 각자의 시간을 즐기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한가로운 분위기도 한몫했다. 밀라노에서는 다 빈치가 남긴 수많은 유산을 추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각상마저 하나의 유산이 되어 있었다.


어느새 최후의 만찬 예약 시간이 다가왔다. 작품이 위치한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은 지하철로 네 정거장 떨어진 곳에 있었다. 출구를 따라 올라온 지상의 모습은 비교적 한산한 주택가처럼 보였다. 하교를 막 마친듯한 아이들 무리에 섞여 무채색 건물을 양 옆에 둔 길을 따라가며 이런 곳에 성당이 있을까 의구심이 생길 때쯤 멀리서 분홍색의 아담한 성당이 눈에 띄었다. 성당 앞에는 입장을 기다리는 관광객, 주민처럼 보이는 학부모와 뛰어노는 학생들이 한데 섞여 번잡하지만 생기로 가득 찬 모습이었다.

락커에 짐을 맡기고 나서 입장 대기 중인 30명 남짓의 그룹에 합류했다. 우리에게 허락된 단 15분의 시간 동안 함께 작품을 감상하고 나올 사람들이었다. 주의사항 몇 가지를 듣고 입장을 해도 좋다는 사인이 떨어지자 작품이 있는 장소로 이동했다. 문이 열리자 어둡고 서늘한 공간이 나타났다. 예전에 수도원의 식당으로 쓰였다는 이곳은 현재 벤치 몇 개를 제외하고는 텅 비어있고 한쪽 벽면을 최후의 만찬, 그 반대편을 지오반니 도나토의 십자가형(The Crucifixion)이 장식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높다란 천장까지 꽉 차있는 장소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십자가형을 앞둔 식사 자리에 흘렀을 애달픔과 무력함의 현현인지, 혹은 그 장면을 바라보는 관람객의 경건함인지 모를 그 느낌을 뒤로하고 작품 앞에 섰다. 


사진으로만 보던 그림이 내 눈앞에 있었다. 몇천 년 전 최후의 만찬을 가진 예수와 열두 제자, 그 모습을 상상하며 그림으로 남긴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리고 다시 몇백 년이 흐른 지금 이 그림을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관광객이 모여든 것이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뒤편으로 잠시 물러났을 때 이런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액자식 구성의 변주는 이미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성당을 나와 저녁을 먹으러 가기 전 숙소에 들리기 위해 다시 밀라노 대성당을 지났다. 해질 무렵의 빛을 받은 성당은 오전보다 더욱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하늘이 붉게 물든 가운데 노란 조명으로 밝혀진 상점이 늘어선 숙소 앞 거리는 더 이상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밀라노에서의 마지막 밤은 근사한 분위기의 식당에서 보냈다. 완벽한 마무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훌륭한 음식과 서비스가 있는 곳이었다. 3시간에 달하는 식사 시간을 지나온 여행 이야기, 다가올 도시 이야기로 한가득 채우고 식당을 나와서는 소화를 시킬 겸 이미 깜깜해진 지 오래인 밤길을 산책을 했다. 전날 맥도날드에 갈 때 지났던 골목보다 더 인적이 드문  길이었지만 겁이 나지 않았다. 서너 명 정도 마주친 이들은 길었던 하루를 마치고 집에 가는 사람, 친구들과 늦은 시간까지 어울리는 사람, 혹은 혼자 산책을 하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한잔 걸친 술기운 때문에 용기백배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택시를 타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불과 이틀 전 밤 도착했을 때는 신경 쓸 겨를이 없던 밀라노역이 눈에 들어왔다. 여느 건축물과 마찬가지로 밀라노 역사의 벽면, 천장 하나하나 정성이 깃들지 않은 곳이 없었다.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주변을 둘러보며, 하지만 캐리어는 마지막까지 온몸으로 사수하며, 베니스행 기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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