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산타 루치아역, 산마르코 광장
<아빠와 함께한 베니스 여행>. 스톡홀름 출신의 벤델라와 아빠의 베니스 여행기를 담은 이 동화책을 나는 초등학교 도서관에서 빌리고 또 빌리곤 했었다. 벤델라가 연극 속에 뛰어든 것 같다고 표현했던 베니스는 어렸던 나의 눈에도 상상 속에나 존재할 법한 도시 같았다. 자동차 대신 곤돌라가 다니는 물의 도시라니. 이태리 여행 계획을 시작한 무렵 세월 속에 잊힌 이 책이 머리를 불현듯 스치고 지나갔을 때는 숨겨두었다가 까먹고 있던 보물을 찾기라도 한 듯 반가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베니스에 갈 생각에 들떴던 것은 아니다. 베니스는 유난히 호불호가 갈리는 도시였다. 여행 후기에서 심심치 않게 거론되는 물냄새며 바가지 물가, 기동성의 제한과 같은 부정적 평가는 베니스에 꼭 가야 할지 고민하게 만드는 이유에 하나씩 추가되었다. 베니스, 도로 대신 수로가 뚫려있다는 것을 빼면 특별할 게 있을까?
그러나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낭만이 넘실대는 물의 도시. 베니스에 꼭 맞는 이 수식어는 앞서 베니스행을 주저하게 만든 이유들을 단번에 상쇄하기에 충분했다. 골목 사이로 난 도랑을 한 바퀴 돌고 대운하에서 만난 물이 건물 옆에 나란히 만들어낸 수평선과, 그런 수평선 너머로 해가 저물어가는 풍경은 얼마나 멋있을까. 이태리까지 가서 어렸을 적 환상을 심어준 베니스를 못 보고 온다면 아쉬움이 너무 클 것 같았다. 그리하여 무라노도, 부라노도 빼고 3박 4일을 베니스 본섬에 머무는 일정이 만들어졌다.
밀라노에서 출발한 기차가 베니스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경이었다. 기차역을 오고 가는 여행객들과 수상버스며 택시 기사가 한데 섞여 한창 북적일 시간이었다. 역을 나서자마자 도보 바로 밑까지 차오른 물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 신기한 풍경을 감상할 겨를도 없이 캐리어 3개에 배낭을 하나씩 짊어진 우리에게 포터가 접근했다.
호텔 이름을 대자 택시 요금을 알려주고 자기를 따라오면 된단다. 버스를 타도 되지만 한참 걸어야 할 거라는 설명도 빼놓지 않는다. 택시 회사에 연계된 서비스겠거니 순진하게 생각한 우리의 캐리어는 순식간에 포터의 수레에 실려 택시로 향했다.
근처에 정박되어 있는 택시 안으로 짐을 내려준 포터는 좀 전까지의 안면에 가득하던 웃음기는 싹 지우고 수고비로 20유로를 청구했다. 캐리어를 싣고 몇 발자국 오지도 않았을 뿐인데! 억울하고 수법이 치사하기 그지없지만 어쩔 수 없다. 역시 바가지가 심한 도시인가. 눈 뜨고 코 베인 관광객이 된 기분에 시무룩해졌지만 택시가 속도를 내자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평화롭던 도시의 길거리에 누군가 냅다 물을 들이부어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베네치안들은 어쩌면 밤사이 바뀌어버린 도시의 모습에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태연히 곤돌라를 만들어 타고 평화로운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니 더욱 사랑스럽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 춥지도 덥지도 않은 완벽한 기온의 날씨조차 동화 같다는 생각을 하며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푹 빠져있었다. '오길 정말 잘했네'. 한껏 들뜬 마음으로 호텔에 도착했다.
체크인을 마친 우리는 객실이 준비되기를 기다리는 시간을 이용해 호텔 주변 구경에 나섰다. 대운하로 연결된 입구 대신 도보로 뚫린 문으로 나오며 건물 한 겹 안으로 들어왔을 뿐인데, 눈앞에는 다른 세상이 펼쳐져있었다. 우리는 미로처럼 얽혀있는 길을 따라 사람 둘이 겨우 지나갈만한 골목을 걸었다가 명품거리를 구경했고, 뱃사공들이 쉬고 있는 작은 부둣가를 지났다.
그때 예고도 없이 성 마르코 광장이 나타났다. 좀 전까지 지나온 좁은 길과 대비되어 더욱 개방된 느낌을 주는 광장의 끝에는 성 마르코 대성당과 종탑이 강렬한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광장 한켠의 플로리안 카페에서는 라이브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광장 반대편으로 빠져나올 때쯤에는 중천에서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하는 해가 공기를 나른하게 달구고 있었다. 한편에는 두칼레 궁전을 두고 다른 한편에는 대운하에서 이어지는 바다가 펼쳐진 길을 걸었다. 햇빛을 받아 도도하게 반짝이는 바다, 각기 다른 나라 말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와 웃음소리. 100% 행복했던 순간이다.
시험 삼아 들어선 좁은 길에서는 악명 높은 베니스의 물냄새도 경험했고, 골목을 몇 번 헤맨 끝에 호텔로 복귀했을 때에는 잘 정돈된 방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테라스에 나갔을 때는 마침 해가 수평선 너머로 저물기 직전의 시간이었다. 곤돌라 몇 대가 운하를 유유히 지나가고, 뱃사공들이 부르는 노래가 이따금씩 들려왔다. 하늘색 돔이 얹어진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 옆으로 하늘이 붉게 물들며 평생 기억하고 싶은 풍경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내 밤의 시간이 찾아왔다. 방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던 우리는 호텔에서 추천해 준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기 위해 길을 나섰다. 저녁 시간 베니스의 거리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산책하는 사람들이 서너 무리씩 지나다닐 뿐 왁자지껄하던 낮의 모습과는 판이했다. 이 차분한 거리에서 대낮에 찬란히 빛나던 운하를 희미하게나마 연상시키는 건 건물 사이로 흐르는 도랑과 그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였다.
차분한 분위기의 거리와 달리 만석인 식당에서는 목요일 밤 각양각색의 그룹으로 구성된 저녁 모임이 한창이었다. 우리는 화려하게 차려입은 중년의 백인 여성 무리의 옆 테이블에 앉았다. 식당의 추천을 받아 해산물 요리를 에피타이저로 시키고 파스타를 하나씩 주문했다. 와인도 한 잔 따르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낯선 언어 여러 개가 뒤섞인 공허한 소음 속에서 여행 일주일차에 접어들며 쌓인 피로가 느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노련해 보이는 서버가 에피타이저를 가져다주며 지어준 환한 미소에 밋밋하게 대꾸하고 관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노란색의 따끈한 크리미한 소스에 어우러진 부드러운 관자는 입에서 녹는다는 표현이 딱 어울렸다. 거기에 와인을 한 모금 마시자 온몸의 감각이 한결 예민하게 살아나며 맛이 극대화되었다. 옆 테이블 여인들의 열정적인 대화, 식당 구석구석을 능숙하게 오가는 서버들, 곳곳에서 한 번씩 효과음처럼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가 한데 모여 만들어내는 활기찬 에너지에 비로소 동화되는 느낌이 들었다. 베니스의 한 좁은 골목에 있는 떠들썩한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는 그래서 아주 따듯한 기억이 되었다. 이어서 서빙된 파스타 역시 아주 훌륭했음은 물론이다.
따듯한 음식으로 배를 든든히 채우고 술을 한 잔 걸쳐 기분이 좋았던 탓일까, 식당을 나설 때쯤 나는 운하와 곤돌라 뒤에 감춰진 이 도시의 조용한 밤거리에 반해있었다. 20년 전 책을 통해 빠져든 베니스를 이제는 내 추억을 통해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건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일이었다. 호텔에 돌아가는 길 우리 둘의 발걸음만 들릴 만큼 고요한 거리, 좁은 길가를 따라 나있는 도랑, 대낮의 부산함이 한바탕 지나간 뒤 남은 텅 빈 돌바닥을 노랗게 비추는 할로겐 가로등 하나하나의 모습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