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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예수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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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민 Jan 25. 2024

기도해 줄게.

“그런데 밥이나 한번 먹자!”

같은 교회 교인에게 중보 기도를 부탁하면 정말 기도해 줄까?

나를 위해 기도해 준다는 말이 의심스러운 것은 나도 기도 부탁을 받지만 중보다운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안쓰러운 마음으로 기도는 하지만 그것이 중보 기도일까?


내가 다른 사람에게 기도 부탁을 받고 기도 제목을 잊는 이유가 있다.

기도를 부탁한 사람도 자기 기도를 잊기 때문이다.

'급하게' 주변 성도들에게 기도 부탁하지만 정작 자신은 기도하지 않는다.

예전에 나는 기도 부탁을 받으면 중보 기도를 하면서 부탁한 사람에게 기도 이후 변화를 수시로 확인했다.

기도 응답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무엇을 더 기도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서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기도 부탁한 사람이 자기 기도 제목에 진지하지 않았다.

부탁할 때는 간절했는데 지금 그 간절함은 사라진 듯 ... (이것도 응답일까?)

심지어 기도 부탁을 했지만, 자신이 기도를 통해서 응답받기를 기대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중보 기도하고 있지만 기도 부탁한 사람에게 피드백이 없는 경우도 대부분이다.

나중에 확인해 보면 기도할 필요가 없이 그냥 넘어갔거나 기도를 포기한 경우다.

기도 부탁에 대한 피드백이 없는 사람은 ‘카톡 일씹’과 비슷하다.


‘기도 부탁드립니다.’와 ‘기도해 줄게’ 

이 말은 ‘언제 밥이나 한번 먹자’와 비슷한 종교적 클리셰이다. 


알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중보기도를 ‘일단’ 부탁하는 사람은 중보기도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른다. 자기가 중보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모른다.

‘기도해 줄게’라고 쉽게 말하는 사람도 중보기도를 모른다. 

눈 감고 주님에게 ‘불쌍히 여겨주세요. 측은합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이 중보 기도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아쉬운 사람은 기도 부탁은 했지만, 기도의 열매를 나누지 않는 사람이다.

중보기도로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단지 기도를 부탁했으면 기도 응답 혹은 기도 결과에 대해서 하나님의 놀라움을 기도 부탁한 사람과 나누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기도 응답과 주님 역사에 관한 나눔 그리고 연락도 없다.


성경에는 이와 유사한 일이 있다.


[눅17:14-19, 새 번역]

14 예수께서는 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그런데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15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자기의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되돌아와서,

16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런데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7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

18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되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 사람 한 명밖에 없느냐?"

19 그런 다음에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중보 기도 부탁에 관한 피드백이 없는 사람, 하나님의 응답에 대해서 나눔이 없는 사람에게 기도 부탁은 무엇일까?

 여러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압력을 넣으려는 것일까? 아니면 중보자를 기도 응답 분위기를 만드는 바람잡이로 생각하는 것일까?


물론 이런 입장을 이해된다. 

나도 중보기도를 부탁했지만 대부분 사람은 나의 기도 제목을 잊는다. 

그때는 내 힘든 사연을 듣고 기도해 주겠다고 말은 하지만 기도하지 않는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까?'  

내가 부탁한 기도 제목에 대해서 사랑과 걱정으로 묻지 않기 때문이다. 


중보 기도를 부탁한 사람과 다시 만나도 그는 내가 부탁한 기도 제목을 잊고 있다. 

이런 것을 피차일반이라고 하나? 


특히 가장 치명적인 것은 기도 제목을 부탁했는데 이것이 교회 내에서 돌고 돌아서 가십거리가 된다. 주님께 올려드리는 기도 제목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는 경우다.

지금까지 중보기도를 부탁받고(부탁하고) 그 이후에 피드백을 받은 경우는 거의 없다.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을 보면 없는 것 같다.


예수님은 기도 부탁을 한 후에 제자들에게 3번이나 피드백을 해주었다.

[막 14:37, 새 번역]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보시니,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시몬아, 자고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느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 제목을 나누지 않으셨다. 깨어 있으라고 요청하셨다. 예수님이 왜 그들에게 깨어있으라고 하셨을까? 전혀 도움이 안 되고 쓸모없는 중보기도 부탁을 왜 하셨을까? 왜 제자들이 예수님이기도 하시는 것을 보길 원하셨을까? 결과적으로 성경에 이렇게 기록하기 위해서라고 생각된다.

 중보기도의 기준은 아마도 부모가 자식을 위한 기도가 아닐까? 모든 부모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의 경우에 자식을 위한 중보기도만 진심으로 기도한 것 같다.


자식을 위해 중보기도 할 때 느껴보지 못하는 영적 아픔을 느낀다.

자식 대신에 내가 대신 아프고, 내가 대신 고통스러워도, 내가 대신할 수 있다면 내가 대신하고 싶다고 기도한다.


비로소 예수님의 마음, 십자가에서 죽을 수 있는 용기 있는 마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눅23:34, 새 번역] [그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제비를 뽑아서,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


사랑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배신할 제자를 위해 중보기도하셨다. 

[눅22:31-32, 새 번역]

31 "시몬아, 시몬아, 보아라. 사탄이 밀처럼 너희를 체질하려고 너희를 손아귀에 넣기를 요구하였다.

32 그러나 나는 네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네가 다시 돌아올 때에는, 네 형제를 굳세게 하여라."


중보기도에는 용서가 있다. 



예수님은 중보기도를 하신다.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롬 8:34, 새 번역] 누가 감히 그들을 정죄하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는 죽으셨지만 오히려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하여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님도 나를 위해서 기도하신다. 내 안에서 기도하신다.

[롬 8:26, 새 번역]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중보 하신다. 성령님도 중보 하신다.

그런데 사람이 ‘진짜’ 중보기도를 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할 수 없어도 중보기도를 해야 한다. 

중보기도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특권이기 때문이다.

중보 기도는 하나님만 할 수 있는 영역으로 우리를 이렇게 초대하셨다.


[마26:36, 새번역]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고 하는 곳에 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하는 동안에, 너희는 여기에 앉아 있어라."




참고로

저는 원천침례교회 / 민트교회(담임목사 이계원)의 교인입니다. 

https://www.woncho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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