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나는 주님의 일을 하기 원하는가?
주님의 일과 나의 일.
저는 주님의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솔직히 말한다면(저의 속셈은), 제 일을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주님의 일처럼 보이고 싶(었)습니다.
제 일을 주님의 일이라고 믿고 싶었던 이유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도 있지만 저 자신이 주님과 사람들 앞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돌이켜 보니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결국에는 저 자신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제가 붙잡았던 모든 비전, 미션, 명분, 목적은 주님의 일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나의 일이며 나를 드러내는 일이었습니다.
내가 행하는 모든 일들은 결국에는 [나를 위한] 것들입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뻔뻔한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주님의 일을 한다고 믿었고 저 자신에게도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세뇌했죠.
하지만 주님의 일을 하면 할수록 제 본심이 드러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렇게 제 실체를 알게 된 계기는 마르다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마리아의 언니 그리고 나사로의 여동생 마르다 때문에 제가 주님과 사람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했던 모든 것들이 위선이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눅10:41-42, 새번역]
41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대답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42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서 다 아실 것입니다.
저는 주님이 마르다에게 이런 말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 불편했습니다.
주님 말씀이 불편한 이유는 아마도 제가 마리아보다는 마르다 계열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가 일 중심적이어서 불편한 것은 아닙니다.
냉정하게 본다면 나의 선악 기준이 주님과 대치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섬뜩합니다)
저는 아침 9시와 오후 5시에 사람을 채용해서 같은 일당을 주는 주인에 대해서 불의하다고 생각하는 아침 9시 채용된 남자와 같은 정서입니다.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를 편애하는 주님이 불편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기준에 대해 나의 선악 체계가 주님에게 반대하는 사탄적 마인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탄이 물러가라]와 같은 연장선입니다.
그렇다면 왜 나는 주님의 이야기가 불편할까?
그것은 주님의 일이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너무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말씀 듣는 것이 주님의 일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주님을 위해서(?)-솔직히 말하면 주님과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했던 모든 일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교회 봉사, 교회 직책, 제자를 세우겠다고 했던 나의 비즈니스, 성경적이라고 믿었던 나의 프로젝트 등 … 이런 모든 일들이 마르다처럼 나의 염려에서 나온 일이라는 것이죠.
주님께서 내가 추구했던 그 모든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심각한 것은 ‘나는 마리아처럼 말씀을 사모한 적이 있었던가?’입니다.
저는 마르다처럼 염려함으로 주님 일을 했지만, 마리아처럼 우선순위를 말씀에 두고 사모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까지 주님의 일을 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진짜 성도일까?
마리아는 나를 여기까지 끌고 내려왔습니다.
지금 나는 마리아를 원망하는 것 같지만 주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 것은 이번 마르다와 마리아 사건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수1:8, 새번역] 이 율법책의 말씀을 늘 읽고 밤낮으로 그것을 공부하여, 이 율법책에 쓰인 대로, 모든 것을 성심껏 실천하여라. 그리하면 네가 가는 길이 순조로울 것이며, 네가 성공할 것이다.
시편 1장은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내 말이 너희가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온통 말씀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지만 나는 말씀을 이렇게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처럼 말씀을 사랑하고 즐거워하여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핑계 대고 싶지 않지만, 저를 이렇게 만든 것 중의 하나가 QT 때문입니다.
언제나 했던 아침 큐티가 의무적으로 되었습니다.
아침에 큐티하면 점심 큐티, 저녁 큐티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일종에 법칙을 저 스스로 만들었습니다.
종교 생활처럼 했던 QT는 [종일 묵상하고 주야로 묵상하지 않아도 되는 큐티]가 되었습니다.
물론 큐티가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아침 큐티로 신앙인의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저의 사악함이 문제입니다. 큐티를 의무라고 생각한 것이 바로 마르다의 노선에 합류한 것입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읽고 묵상하는 것이 주님의 일이라면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것은?
내가 비전을 가지고 준비한 미래의 프로젝트는?
내가 주님의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럴싸하게 만든 것들은?
내가 주님께 그렇게 기도했던 모든 것들은?
말씀을 사모하는 것만이 주님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나 자신은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베드로와 같은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했습니다.
저도 제 일만 생각하는 존재로 베드로와 같은 꾸중을 받아야 합니다.
내 마음이 마르다를 편들었던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예수님의 기준이 못마땅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얄미운 것은 나의 선악 기준으로 예수님과 마리아가 나를 짜증 나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의 일은 말씀을 듣는 것일까요?
이 질문보다 더 솔직한 질문은 말씀만 보는 것으로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일 것입니다.
말씀 보는 것이 너무 쉽고, 누구나 할 수 있고, 언제나 제 손에 있기 때문에 말씀이 하찮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착시와 착각 때문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 당시에 여인이 말씀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성경책은 성전에 있었고 그것을 듣기 위해서는 안식일에, 성전에 가야만 했습니다.
여인의 뜰에서 성전에 읽는 성경 소리가 들렸을까요? 사마리아 여인이 예배를 갈망한 것처럼 당시에 말씀과 예배는 특정인과 남자에게만 국한된 특권이었습니다.
나는 매주 예배라는 이름으로 주일 예배에 참여하여 선포되는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마리아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사건입니다.
제 손에는 언제든지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앱이 있고, 집에는 장식용이 되어버린 성경책이 7권이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성경에 나와 있는 인물 중에 그 누가 상상을 했을까요? 하늘 3천 층까지 갔던 바울도 상상하지 못할 은혜를 지금 우리는 누리는 중입니다.
말씀을 듣고 보는 것이 귀한 그때와 비교해서 주님의 기준이 달라졌을까요?
주님의 일이 상대성 비교가 달라졌을까요? 아닙니다.
천지가 없어져도 남아 있을 말씀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성경이 귀했다면 지금은 성경을 사모하는 마음이 귀합니다.
주님의 일은 마리아가 있었을 때나 지금이나, 여호수아와 다윗의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습니다.
말씀입니다.
주님의 일은 은밀합니다. 사랑은 오직 둘만이 누리고 즐거워하는 권리입니다.
주님은 우리 자신과 골방에서 기도함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보험금 납입 같은 아침 큐티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매시간 생각하는 것처럼 말씀을 보고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저처럼 마음에서 이런 질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럼, 일은 언제 하지?”
“그럼, 나의 비전은 어떻게 이루지?”
“내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은 포기해야 하나?”
오늘, 지금, 여기에서 나에게 주어진 일은 최선을 다해서 일하면 됩니다.
이것은 필요한 것을 모두 아시는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오늘의 일입니다.
단지 미래에 대한 비전, 그러니까 비전과 주님의 일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가치 있게 하려고 했던 일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은 말씀을 보는 것이기에 다른 것에 주님의 일이라는 포장을 씌우지 않는 것입니다.
마리아 때는 말씀을 듣는 것이 귀하고 흔한 일이 아닙니다.
지금은 기회는 많습니다. (물론 모슬렘, 북한 같은 곳은 아닙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말씀만으로 살아가려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말씀만 의지하려는 신앙이 없습니다.
참고로
저는 원천침례교회 / 민트교회(담임목사 이계원)의 교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