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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예수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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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민 Feb 20. 2024

38년 동안 누워있는 기독교인

"구원받고 싶으냐?"

낫고 싶으냐?


주님은 38년 동안 누워있는 환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아픈데 낫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왜 예수님은 이 환자가 낫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셨을까?


예수님께서 병자를 치료하실 때 크게 2가지 환자 스타일이 있다.

첫 번째는 낫기를 진실로 간구하는 사람들이다. 

백부장, 회당장, 혈우병 여인 등 …이런 사람들은 정말로 간절히 낫기를 구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낫기를 생각도 못 한 사람에게 다가가서 강제적으로 낫게 하신다. 

손이 마른 사람, 태어나면서 장님 등

그런데 환자에게 '낫고 싶으냐?'라고 의견을 물어본 사람은 없다.


예수님은 38년 된 환자에게 물어보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38년 환자는 낫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자신의 처지와 어려움, 특히 자신보다 먼저 뛰어 들어가는 환자에 대해 원망했다.

자신도 낫을 수 있는데 다른 사람 덕분에 낫지 못한다고 했다.


예수님은 38년 동안 누워있던 사람에게 ‘낫고 싶으냐?’라고 물었던 이유는 아마도 그는 38년 동안 낫고 싶다고 하나님께 기도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요 5:6, 새 번역] 예수께서 누워 있는 그 사람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랜 세월을 그렇게 보내고 있는 것을 아시고는 물으셨다. "낫고 싶으냐?"


이 상황이 나의 신앙과 겹쳐 보인다.


예수께서 40년 동안 주일 예배를 위해 앉아 있는 나를 보시고 또 이미 오랜 세월 그렇게 교회에 다니고 있는 것을 보시고 물으셨다.

“예배드리고 싶으냐?”



[요 5:7-8, 새 번역]

7 그 병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

8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나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 같다. 

“주님 저에게 은혜를 주시면 제가 더 복음적으로 살고 싶은 사람인데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나를 인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남들이 나보다 더 먼저 은혜를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네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믿지 말고 진짜 나를 믿어라.”



“구원받고 싶으냐?”주님이 이렇게 물으셨다.

나는 대답했다.

“요즘 예배 스타일이 저랑 맞지 않아서 예배드리기도 힘들고, 요즘 새로운 회사에 입사해서 바빠져서 성경도 읽지 못하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 실망이 많아서 이제는 제 나름대로 계획과 돈으로 살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보다는 지금은 쉬고 싶고, 성경적으로 살고 싶은데 내 업무가 그렇고, 그래서 하나님께 이런 회사로 가고 싶다고 했는데 이곳으로 보내셨고 …”


나는 구원받고 싶은데, 구원에 집중하지 못한 이유를 이렇게 주절주절 변명 중인 것 같다.


“구원받고 싶으냐? ”

주님은 내가 스스로 믿고 있고, 나의 의를 높이는 생각에서 일어나서 걸으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내가 낫고자(구원받고자) 하는 마음을 듣기 원하신다. 

주님은 내가 나를 위한, 나를 설명하기 위한 변명을 듣고 싶어 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내가 구원받고 싶으면 구원받지 못할 것 같은 내 생각, 습관, 환경에서 일어나라고 하신다. 


내가 기독교인이 된 것도 40년이 지났다. 그런 나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고 싶으냐?"

“네가 기독교인이 되고 싶으냐?”

“네가 구원받고 싶으냐?”

“네가 부활하고 싶으냐?”

나는 무엇이라고 말할까? 

"예 주님, 저는 기독교인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아 부활하는 것을 믿습니다 "라고 말을 할까? 

아니면 “주님 기독교인이 되고 싶었는데 저의 직장과 제 삶이 그리고 좋은 교회를 다니지 못해서 그리고 말씀의 은사를 받지 않아서….”라고 말을 할까?



"주님,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는 기도하지 않았다. 

기도 대신에 사람의 도움을 구했다.

”주님, 저에게는 좋은 부모와 환경이 없었습니다. 기독교 집안도 아닙니다. 

나는 기도하지 않았다. 기도 대신에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에 대한 기대가 컸다.


이제 자리를 들고일어나자. 어제와 같은, 1년 전과 같은 10년 전과 똑같은 이 모습에서 일어나자. 

38년 된 기독교인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기독교 짬밥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도 은혜만 받기를 원해 여전히 앉아 있는가? 아니면 받은 은혜로 충분해서 남들에게 나누고 있는가? 나는 믿음이 생기기를 기다리고 있는가? 아니면 그 믿음을 얻고자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가?

아무것도 행하지(기도와 묵상, 예배)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그저 40년 된 ‘자칭’ 기독교인이 아닐까?

주일 예배 때 내 눈앞에 은혜라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면서 40년 동안 예배에 참석하는 기독교 회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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