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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적(?)으로 살기

두 번째 나

by 권민

나는 이상하게 양자역학에 관심이 많다.

제대로 이해도 하지 못하고, 누군가에게도 설명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이상하게 양자역학에 끌린다.

그냥 ‘일단 믿으면 구원받아’라는 광신도의 전도에 그냥 믿고 있는 수준인데도,

양자역학의 기괴한 논리가 너무 매력적이다.


마음만 끌리는 것이 아니다.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듯이,

나는 키움 미국 양자 컴퓨팅 ETF 주식도 가지고 있다.

내가 양자역학에 관심이 있는 것은, 양자역학처럼 살았기 때문이다.


물리학은 오래전부터 이런 질문을 던져왔다.

“우리가 세계를 관찰하지 않는다면, 세계는 존재할까?”


양자역학의 답은 단호하다.

“아니요. 존재하지 않습니다.”


입자는 관찰되기 전까지

‘입자’도 아니고 ‘파동’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의 가능성으로 떠다닌다.

수많은 경로가 동시에 존재하다가

누군가의 눈길이 닿는 순간, 단 하나의 현실로 붕괴된다.

그것이 관찰자 효과(Observer Effect)다.

즉, 관찰이 곧 창조다.


내가 양자역학을 적용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나를 관찰하면서 살았다.

나는 미래에서 온 내가 현재의 나를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진짜 그렇게 믿는 또라이는 아니다. 2035년의 나의 모습을 구축하고, 2035년의 내가 되기 위해서 2025년을 사는 것이다.

어찌 보면 계획대로 사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단순히 계획을 이루는 것과 이미 이루어진 미래를 지금 사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나는 미래에서 온 나를 [두 번째 나]라고 정했고,

2000년부터 지금까지 이 방법으로 살았고 그 여정에 대해 책까지 썼다.


『두 번째 나』에서 말하는 ‘나의 변화’는

지식이나 경험의 축적이 아니라, 관찰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과거로부터 설명한다.

“나는 이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이런 사람이다.”

그러나 ‘두 번째 나’는 그 방향을 뒤집는다.

“나는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싶은가”라는 미래의 시선으로 현재를 관찰한다.

이때 나의 정체성은 ‘결과’가 아니라 ‘관찰의 산물’이 된다.

즉, 나를 바라보는 방식이 나를 결정한다.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관찰이 이루어지는 순간 입자의 위치가 결정된다.

그전까지 입자는 무한한 가능성 속에서 부유하지만,

관찰이 닿는 순간 — 단 하나의 결과로 수축된다.


인간의 삶도 같다.

미래는 무수한 가능성의 파동으로 존재한다.

그중 어떤 미래가 현실이 될지는 내가 어떤 나를 바라보는가,

어떤 시선으로 지금의 나를 관찰하는가에 달려 있다.


‘두 번째 나’로 산다는 건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를 바라보는 일이다.

그 시선이 닿는 순간, ‘가능성으로서의 나’는 하나의 현실로 붕괴된다.

즉, 관찰이 존재를 낳는다.


양자역학은 이렇게 속삭인다.

“세상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비로소 태어난다.”

이 말이 너무 매력적이다.


“나는 과거로부터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내가 바라본 미래로부터 오는 존재다.”

이 한 문장이 ‘두 번째 나’의 관찰자 실험의 전부다.

실제로 나는 이런 양자역학적 삶을 25년 동안 살았다.

나의 인생 실험에 만족스럽다.


아마 물리학과 양자역학을 아는 사람이 이 글을 읽는다면,

또라이가 아니라 무식한 해석과 적용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나도 양자역학을 처음부터 대입해서 이런 삶을 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를 관찰하는 삶은 나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는 것은 증명할 수 있다.

물론 이것도 개인적 실험이기에 …


그리고 양자역학 컴퓨팅 테마 기술 주식 ETF는 17,000원에 샀는데,

계속 떨어져 지금은 15,000원이다.

주식 차트는 계속 관찰할수록 마음만 쫄아드는 것 같다.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양자역학을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The Character of Physical Law (1965) / 리처드 파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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