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농업을 사랑하나. 작물의 생육 아니 생애를 그토록 애달파하면서도 아름다워 하나. 이 질문에는 옛날부터 같은 대답을 하고 있다. 미래의 성배는 어떤 대답을 할지 모르겠지만, 과거의 성배와 지금의 성배는 “살아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짧은 생임에도 열렬히 살아가는 것들이기에 나도 열렬히 사랑하고 있는 거라고 첨언하면서.
끽해야 수백 일을 사는 게 고작인 작물과 비교하면 인간의 생은 아득히 길다. 그런 긴 생을 사는 인간은 그래서 슬픔이나 아픔 따위에 달갑지 않은 감정도 생의 주기에 기꺼이 못 박으며 살아갈 수 있다. 그만큼 삶은 길기에. 여러 감정과 사연과 사정이 있어야 긴 삶의 이야기가 지루함 없이 보다 더 다채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다사다난한 삶이 말하는 이야기가 듣는 이에게 얼마나 큰 희열을 주는지, 선대의 이야기를 한 번이라도 들어 본 적 있는 후대라면 공감할 것이다. 선대의 일제강점기나 6.25 전쟁의 경험담을 가만히 듣노라면 가슴이 미어지지만, 동시에 광복과 휴전이라는 극적인 결말이 있어 이야기는 더욱 생생해지고, 나는 오롯이 안도하고, 그들의 삶은 더 빛이 나게 된다. 영화와 드라마, 소설 같은 픽션에마저도 슬픔과 행복이 고루 분포되어 있는 것도 이를 방증한다. 긴 삶의 이야기는 굴곡이 있어 아름답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삶이 긴 이들. 다시 말해 인간에 한정된 이야기다.
삶이 짧은 이들에게까지 굴곡지게 살라고 할 수는 없다. 짧게는 수십 일에서 길어야 수백 일을 사는 게 고작인 그들에게 행복만 하지 말고 슬퍼도 하고 아파도 하라니. 안 될 일이다. 짧은 생은 그 자체만으로도 슬프기 때문에. 행복만 하다가 가도 모자랄 생들이다. 그렇기에 작물은 유쾌하고 호탕한 사람의 손에서 살다 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기분 좋은 소란함 속에 정신이 팔려 자기가 짧게 살다 갈 운명이라는 것도 잊을 만큼 즐거이 있다 자기도 모르게 죽어야 한다.
이번에 만난 김태석 농부가 바로 그 손의 주인이다. 그의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틱톡은 온통 그의 호쾌한 웃음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가 기르는 무수한 작물들은 마치 그의 웃음을 따라 짓듯 짙은 채도로 반짝거린다. 마치 죽음을 모르는 듯 태평하게 자라고 있는 중이다.
전성배 안녕하세요. 농부님. 이제야 겨우 연락이 닿았네요. 약간의 사고로 일주일이나 약속을 미뤄 죄송합니다.
김태석 괜찮습니다. 작가님. 급박한 상황에서 이뤄지는 대화보다는 서로 마음의 여유가 될 때 갖는 대화가 더 좋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어 반갑고 또 고맙습니다. 그나저나 제 목소리가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전성배 목소리요? 괜찮으신 것 같은데 어디 편찮으신가요?
김태석 얼마 전 코로나 확진으로 목이 많이 상해서요. 지금은 증상은 많이 나아졌지만, 목은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전성배 이런. 늘 고된 노동을 하시는 와중에 코로나까지 겪으시다니.. 지금은 나아지셔서 다행입니다. 목소리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농부님의 목소리 충분히 듣기 좋습니다. 유쾌하실 뿐만 아니라 이리 섬세하기까지 하시네요.
김태석 투박하다고도 할 수 있는 성격의 제가 섬세하다는 소리를 다 듣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전성배 사실 농부님과 본격적인 대화를 하기도 전부터 친근감을 느낍니다. 이렇게 인터뷰를 하기에 앞서 사전에 먼저 연락을 나눈 시간이 2주가 넘은 게 이유라면 이유겠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로 농부님이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아무래도 농부님의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틱톡 덕분인 것 같네요.
김태석 아, 보셨군요. 조금 부끄럽네요.
전성배 전혀요. 너무 멋지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김태석 농부님처럼 각종 소셜 플랫폼을 활용하는 게 청년 농부님들 사이에서는 그리 특별할 건 없지만, 이렇게 유쾌하게 또 많은 분들의 관심 속에서 하시는 분은 드무니까요. 저만 해도 김태석 농부님의 사례가 처음입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작물에 대해서는 또 진심이시니, 장난스러워 보이지도 않아 조금 놀랍기도 합니다.
김태석 저도 그 부분을 최대한 유념하며 촬영하고 있습니다. 유쾌하고 신나는 농경 생활의 모습만을 보여주는 것이 자칫 누군가에게는 젊은 농부가 농사를 장난스레 대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 우려 때문에 즐거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 못지않게 저희 작물의 생육에 관해 실시간으로 전하는 것에도 꽤나 노력하고 있습니다.
전성배 말이 나온 김에 작물에 대해서도 질문을 드리고 싶어요. 농부님의 인스타그램을 보면 생각보다 다양한 작물을 다루시는 것 같은데, 혹 주력 작물이 따로 있을까요?
김태석 네, 감자와 토마토, 방울토마토 총 세 개를 주력으로 기르고 있습니다. 이 외 인스타그램에서 보이는 다른 작물들은 일부 남는 밭자리를 이용해 소량으로 재배하고 있는 거랍니다. 잠깐 우리 농장에서 취급하는 주력 작물의 품종과 특징을 간단하게라도 이야기해 볼까요? 감자는 <두백>과<설봉>, 방울토마토는 <베타티니>, 찰토마토는 <썸머탑>을 기르고 있습니다. <두백 감자>는 부드러운 식감과 고소한 맛이 특징인데, 전분량이 많아서 ‘분감자’라고도 불리는데요. 쪄 먹거나 감자전, 옹심이 등으로 만들어 먹기에 좋은 품종입니다. <설봉 감자>는 두백과 비교해 살이 단단하고 쫀득한 게 특징인데 활용도는 두백과 비슷하고요.
다음으로 <베타티니 방울토마토>는 익히 알고 계시는 ‘대추 방울토마토’라 불리는 종으로 과육이 단단하면서 단맛, 신맛, 감칠맛 등의 조화가 좋아 생으로 먹기에 아주 좋은 품종입니다. <썸머탑 토마토>는 비교적 최근에 나온 신품종인데, 열과(갈라짐) 현상에 강해서 여름에 재배하기가 좋아요. 맛도 맛이지만 착과량도 많고 착색도 좋아서 농가에서 인기가 좋답니다.
전성배 농사를 지은 지 얼마 안 되신 걸로 아는데 이 정도까지 설명해 주시다니 여러모로 저를 놀라게 하시네요.
김태석 직접 농사에 뛰어든 건 올해로 2년 차에 불과하지만, 어릴 적부터 부모님의 농일을 도와드렸으니 어깨너머 듣고 배운 게 많죠. 여건만 된다면 더 많은 이야기를 더 오래 들려 드릴 수도 있는걸요.
전성배 농가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면 부모의 농일을 도우는 건 어쩌면 숙명인가 봅니다. 그간 제가 만나 온 청년 농부님들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거든요. 농부님께서 정식으로 농부가 된 건 이제 2년 차라고 하셨는데, 그전에는 다른 일을 하셨나요?
김태석 네, 타일공으로 일했습니다. 전국을 다니며 신축 건물의 타일을 붙이며 살았죠.
전성배 아, 타일공! 잘은 모르지만, 확실한 건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라고 하죠? 저희 아버지께서 인테리어 업을 하고 계시다 보니 아버지 주변에 타일공으로 일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건너 건너 들었습니다. 나름 자유도도 높은 직업이라고 하던데, 왜 농부가 되신 건가요?
김태석분명 돈벌이나 시간적 여유 면에서 장점이 많은 직업이기는 하지만, 농부가 된 건 음.. 먼저 세계 여행이 계기였답니다.
전성배 세계 여행이오!?
김태석 네, 사실 저는 아내와 농부가 되기 전 그러니까 코로나 직전까지 세계 여행 중이었습니다. 아내의 오래된 꿈이었거든요. 내내 가슴에 간직하고 살다가 몇 해 전에 행동으로 옮겼죠. 마침 아내의 직업도 대학병원 간호사였던 터라 저희 둘 다 일을 그만두더라도 언제든 다시 구해서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도 있었고요. 당시 살던 집까지 정리해서 떠날 정도로 세계 여행에 진심이었답니다.
전성배 근데 하필 코로나가 터진 거군요.
김태석 네, 여행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가 터졌죠. 초반에는 그리 심각하지 않았지만, 그마저도 얼마 안 가 급진적으로 격화되더니 결국 8개월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게 2020년이네요. 급하게 귀국한 만큼 직장은 고사하고 당장 살 집도 구하지 못했던 터라 우선은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전성배 그리고 그 시간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거군요. 그럼 어쩌다가 농부가 되기로 결심하신 건가요?
김태석 이 나이가 되어 다시금 부모님의 모습을 봤기 때문입니다. 농사짓는 모습을요. 제가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전성배 어떤 사연이라도?
김태석 제가 돌아왔을 당시 부모님은 밭자리 중 약 1만 평 정도를 옥수수 계약 농사로 짓고 계셨어요. 소위 ‘밭떼기’라고 하죠? 그런데 하필이면 그해 장마가 두 달이나 이어지면서 옥수수 품위가 크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전성배 저도 기억해요. 역대 최장기간 장마였죠. 매일 비가 땅을 적시는 통에 더위는 덜했던 여름.
김태석 엄연히 계약을 한 만큼 상인 입장에서도 어느 정도 참작을 하려고 했지만, 당시 피해가 워낙 컸던 터라 결국 아버지는 물건값을 반밖에 못 건지고 말았어요. 그마저도 아버지가 상인에게 사정사정하며 받아낸 값이었고요. 그때 아버지의 모습이 여태 잊히지가 않아요. 그전까지는 그러려니 하며 지켜보던 아버지의 모습이 그때는 뭐랄까. 참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어깨는 왜 그리 축 처지시고, 열심히 일하신 걸 제가 아는데 정작 상인에게는 왜 아쉬운 소리밖에 할 수 없는지..
그날 이후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아, 언제까지고 두 분이서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구나.” “이제는 힘에 부쳐 하시는구나.” “내가 이렇게 있어서는 안 되겠구나”라고. 그래서 고심 끝에 결국 농부가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다행히 아내도 그 결정을 존중해 주었고요.
전성배 아버님께서 반기시던가요?
김태석 처음에는 말리셨죠. 힘든 일이니만큼 아들이 다른 일을 했으면 싶고, 또 그냥 잠시 호기를 부리는 건 아닐까, 이러다가 힘들면 떠나는 건 아닐까 등의 걱정을 하시면서. 그런데 보세요. 지금은 이렇게 보란 듯이 잘 해내고 있습니다. 이제는 아버지와 어머니만이 아니라 아내와 저까지 함께 이름을 걸고 이 농장을 꾸려 나가고 있습니다.
전성배 그야말로 가족 농장이군요. 보기 좋습니다. 아 그럼 세계 여행의 꿈은 완전히 접으신 건가요?
김태석 아니요. 다만 나중으로 미뤄뒀습니다. 이제 갓 농부가 된 만큼 해야 할 일과 해내야 할 일들이 많아 한시도 농장을 비울 수가 없어서요. 물론 아직 코로나가 종식된 게 아니라서 그 때문에라도 지금 세계 여행을 떠나는 건 무리지만, 종식이 돼도 한동안은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농부로서 충분한 시간을 다져 놓아야죠.
전성배 그게 현재 김태석 농부님의 목표군요. 그나저나 세계 여행을 꿈꾸는 사람이 한 땅에 머물며 산다는 게 결코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두 분 모두 결심이 대단하시네요.
김태석 아내에게 그저 고맙죠. 엄밀히 말해 그 꿈은 아내가 먼저 꾸고 제게 나눠준 거니까요.
전성배 두 분 아니 가족분들의 농부로서의 삶과 목표, 꿈 모두를 진심으로 응원하겠습니다. 자, 다음으로는 농부님의 일 년이 궁금한데요. 계절별로 나눠 얘기해 주셔도 좋으니 일 년 동안 어떤 일을 하시는지, 농부로서의 일과를 말씀해 주시겠어요.?
김태석 그럼요. 음 계절별로 나눠 이야기하는 게 좋겠네요. 먼저 봄에는 농사지을 준비를 합니다. 고라니나 멧돼지 같은 야생 동물에게서 작물을 지키기 위해 울타리를 보수하고, 비료를 준비하고, 쟁기질을 하고 ….
우리의 대화는 그로부터 얼마간 더 이어졌다. 통화를 시작했던 밤은 이미 반발의 여지가 없이 늦었고, 우리는 이미 많은 이야기를 나눈 상태였지만 그만큼의 이야기가 뒤로 더 이어졌다. 그의 봄여름가을겨울의 일과와 조금 더 구체적인 그의 농부로서의 목표, 언젠간 아내의 꿈인 세계 여행길에 다시 오르겠다는 다짐. 일반인 치고는 예사롭지 않은 사진 기술과 영상 편집 기술의 실체가 실은 언론 영상학을 전공했기 때문이라는 것까지. 대화는 쉼이 없었고, 주제는 다채로웠지만 내내 변치 않던 사실은 균일한 활기가 함께였다는 것이었다. 그건 그가 가진 특유의 기운인 것 같았다. 작물과 가족에게까지 전염되는. 이름을 붙이자면 '호탕한 활기'? 정도면 적당할까.
지면의 여유가 더 있었다면 그의 이야기를 조금 더 길게 해도 좋았을 테지만, 시간과 지면은 한정적이고 애써 더 많이 쓴다고 한들 아쉬운 마음이 사리지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니 딱 이 정도의 아쉬움으로 그의 이야기를 멈춘다.
독자들에게 그를 이야기할 수 있어 참 다행이다. 생이 짧아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애달픈 것들 곁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그런 삶의 곁에는 반드시 김태석 그와 같은 사람이 있었야 한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어 참 다행이다.
2022. 6. 7
전성배田性培 : 1991년에 태어났다. [격간隔刊 전성배 산문]의 발행인이며, 농산물을 이야기하고 농부를 인터뷰한다. 농업계 이슈에 관심이 많고, 여러 주제로 글을 쓰지만 대부분 삶의 테두리 안에 머문다. 지은 책으로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가 있다. 계속해서 우리나라 농부에게 도움이 될 글을 쓰는 것과 더불어 문학적으로 완성도 있는 글을 쓰는 것이 목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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