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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성배 Nov 12. 2023

무턱대고 살 수 있던 날

밤 10시 20분. 경주터미널은 어두웠다. 허름한 터미널 건물이 곳곳에 불빛을 달고 발광하고 있었지만, 터미널을 둘러싼 어둠을 이겨낼 재간은 없었다. 건물에서 몇 발짝만 떨어지면 몇 치 앞은 그저 암흑이었다. 어둠이 이 정도로 깊어지니 저 멀리 띄엄띄엄 서 있는 가로등의 불빛도 거뭇했다. 그래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빛은 빛이라고, 검은 때가 묻어도 내가 걸어야 할 길 정도는 밝혀줄 것이었다. 버스도 택시도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 예약한 숙소까지는 족히 4km는 걸린다는 예고가 휴대폰 화면 속 지도 위에 떴다. 내 걸음으로는 오십여 분 정도 걸리는 거리. 가장 가까운 숙소를 잡은 게 이 정도였다. 다른 숙소는 오늘 내로 발이 닿기 힘들었다. 숙소가 예쁘고 안 예쁘고, 싸고 비싸고 따지지 않고 오직 거리만으로 골랐으나 때마침 가까운 곳에 있던 숙소는 매우 저렴했다. 싸고 좋은 건 없다는 말을 따라 숙소는 사진으로만 봐도 볼품없었다.


예상보다 조금 더 시간을 들인 끝에 숙소에 도착했다. 사진보다 더 허름한 외관과 역시나 더 허름해 보이는 방을 배정받았다. 나는 오늘 여기서 하룻밤만 묵고 다시 인천으로 돌아갈 생각이지만 그건 어디까지 내일의 나에게 달렸다. 얼마든지 더 있으려면 있을 수도 있다. 이 정도 숙소라면 혼자 자기에 부족함이 없고, 이런 숙소만 찾아다닌다면 수중의 돈만으로도 족히 며칠은 경주에 머무를 수 있었다. 모든 건 다음 날 내게 달렸다. 스물여섯의 늦가을은 그런  변덕과 전가로 살아도 되는 시절이었다. 무턱대고 가장 빠른 차편으로,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곳으로 홀연히 떠날 수 있고, 숙소를 선택하는 데에는 잠잘 수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한. 다른 건 필요 없이 그저 나만 생각하면 되는 시절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눈을 떠 숙소를 나섰다. 경주의 새벽 공기가 인천보다 더 좋아서, 이 숙소에서 하루 더 묵기로 마음먹었다.


서른셋이 되어 맞이한 가을의 체류 기간은 여느 해보다 길었다. 원래라면 10월 말에는 뭔 가을이 이리도 짧냐는 볼멘소리를 입김과 함께 뱉어야 하는데, 11월 5일을 넘기고도 겨울은 감감무소식이었다. 그야말로 가을이라고 말할 만한 시간이 계속되고 있다. 매해 가을은 찰나를 형상화한 듯 빨리도 지나가서, 가을이어도 가을이 그리웠다. 어깨 빵빵한 여름과 겨울 사이에 끼어 주눅 든 가을은 안쓰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작년까지 매년 그리 보였다. 그러나 올해는 가을이 벼르기라도 한 듯 어깨에 한껏 힘을 주고 다니고 있다. 슬슬 겨울이 될 법한 시기에도 여전히 가을이다. 11월에도 여전히 완연해서 오래전 경주에서 보낸 가을이 생각날 정도로.


여느 해와 다르게 가을이 길다고 해도, 무턱대고 살던 날의 가을과 무턱대고 살 수 없는 지금의 가을은 여전히 같다. 하늘은 여전히 높고, 밤과 낮의 온도 차이는 아득히 멀고, 어떤 옷을 입든 하루에 한 번은 꼭 후회를 하게 된다. 나이는 먹으나 늙지 않는 가을은 그렇게 매년 똑같은 모습으로 똑같은 경험을 준다. 나이도 먹고 늙기도 잘 늙는 나는 그게 몹시 부럽다. 변치 않는 가을을 보내는 나는 이제 많이 늙어 경주 때처럼 가을을 살 수 없으니까. 오늘을 무턱대고 살면 내일은 더 불안해진다. 내일 더 잘 살기 위해 오늘을 살기보단 내일 하루를 더 살기 위해 지금을 사는 중이다. 열심히 산다고 살아도 불안은 사는 만큼 더 늘어갈 뿐이다. 어차피 늘어날 불안에 두 손 놓고 망연하게 살까 싶지만, 그럼 불안이 늘어나는 속도는 몇 배로 껑충 뛴다. 불안의 증식 속도를 늦추기 위해 사는 것이다.


이런 사실만을 생각하면 생이 야박해서 뒤돌아 서고 싶어진다. 욕이나 시원하게 박아주고 생이 없는 곳으로 홀연히 떠나고 싶다. 무턱대고 그러고 싶다. 그럼에도 내가 사는 건 세상이 나에게만 야박하게 구는 게 아니어서다. 당신도 당신의 옆 사람도, 우리는 완전히 같을 순 없어도 비슷한 처지로 세상의 눈치를 보며 살고 있다. 나에게 경주의 가을이 있듯 당신도 무턱대고 살던 어느 한 시절이, 어떤 계절이 있을 것이다. 지금은 그렇게 살 수 없어 그립기만 한. 그래서 때마다 그런 계절이 되면 너무도 그리워져서, 그냥 빨리 이 계절이 지나가길 바랄 것이다.


가을이 하루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바삐 사는 와중에 한숨 돌리려 고개를 들었을 때 여전히 가을인 게 싫다. 계절이 어디쯤 인지 모르게 살아야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다. 내게 그런 시절이 없다는 듯 살고 싶다.


다행히 간밤에 잠든 사이 계절은 겨울이 되었다. 뜬눈으로 배웅하지 못한 가을이 아쉽지 않다. 네가 너무도 오래 있어, 내가 그리운 시간이 너무도 길었다.



<이름이 없어도 살아지겠지만>

"설령 같은 이름으로 같은 인생을 산다 해도 역시나 세상은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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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배田性培 : 1991년 여름에 태어났다. 지은 책으로는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 『너와 나의 야자 시간』 이  있다. 생生이 격동하는 시기에 태어나 그런지 몰라도 땅에 붙어사는 농부와 농산물에 지대한 사랑을 갖고 있다.


aq137ok@naver.com

https://litt.ly/aq137ok :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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