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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성배 Mar 29. 2024

사랑의 범주

내가 나누는 사랑의 범주를 생각한다. 범주 안의 사랑은 행동까지 바꾸게 한다. 너를 위해 기꺼이, 당신을 위해 기꺼이 나의 행동을 바꾸고,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는 것. 그 안의 사랑은 어떤 뇌 과학자가 말했던, 내가 ‘나’라고 지각하는 영역의 외연이 ‘너’로 확장된 개념이다. 나의 사랑의 범주 안에는 나리와 그의 가족, 나의 가족, 나의 몇 없는 친구가 속해 있다. 나는 그들을 ‘나’라고 발음할 수 있다.


한편 범위 밖의 사랑은 같은 말을 공유할 뿐 이들에게 나눈 사랑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결코 내가 될 수 없는 사랑들이다. 이웃, 직장 동료, 거래처 직원 같은 사람들이 그 사랑들이다. 상대를 애정하는 마음을 한 단어로 표현할 때 쓸 만한 게 지금은 사랑뿐이라 그렇지, 만약 더 적합한 단어가 있다면 당장이라도 바꾸고 싶다. 그 정도로 내가 된 사랑과 내가 되지 않은 사랑의 결은 판이하게 다르다. 그러나 지금도 이 모든 이들을 ‘사랑’이라 이름 지어 부르니 어지간히 마뜩잖다. 그리고 나는 타인도 그럴 것이라 짐작한다. 모든 타인이 예외 없이 그럴 거라고.


이른 아침 늘 같은 시간에 출근하는 사람이 있다. 언제나 가슴팍까지 내려오는 머리칼을 힘 있게 떨구며 인사하는 그는 이런 나의 짐작을 자꾸만 뒤흔드는 사람이다. 그가 동료들에게 보이는 사랑이 내가 나라고 말하는 사랑들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아침이면 종종 내미는 수제 샌드위치를 몇 번이나 먹었는지 모른다. 2층 사무실 인원수에 꼭 맞게 만들어진 샌드위치들의 수는 누가 봐도 오직 동료만을 생각하며 만든 것이다. 이걸 만들기 위해 그가 할애했을 주말의 일부가 얼마나 소중한지 우리는 안다. 나를 위해, 범주 안의 사랑들을 위해 써도 부족한 시간이니까. 적지 않은 인원들의 수를 맞추기 위해 들였을 돈은 어떠한가. 그는 범주 밖의 사랑에게 그 두 가지를 모두 쓴 것이다. 이건 마치 내가 범주 안의 사랑들에게 하는 것과 같았다.


나보다 두 단계는 더 높은 직급을 가진 그는 평소 행실마저도 놀랍다. 점심 식사 자리에서는 먼저 컵과 수저를 둔다. 회식 메뉴로 고깃집이 정해지면 집게와 가위를 먼저 드는 것도 그다. 탕비실에 무언가 떨어지면 채우는 것조차 그다. 누가 해라 정해진 것은 없으나 적어도 그가 해도 되지 않는 일인 건 분명한데, 나의 몫이어야 할 일을 그가 자꾸 대신한다. 먼저 재빠르게 움직여도 그때마다 그는 늘 나보다 더 많은 걸 우리를 위해 하고 있다.


이쯤이면 궁금하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을까. 그가 정의하고 있는 사랑의 범주에서. 모르긴 몰라도 우리는 어정쩡한 위치에서 선을 밟고 있을 것 같다. 그의 사랑이 절묘하게 분별력을 잃는 지점. 거기서 우리는 어영부영 그의 사랑을 주변애로 받고 있다. 이번만큼은 나의 짐작이 맞을 것이다.


어느 날 누군가 내게 너는 그 사람의 사랑을 아냐고 묻거든, 나는 조금은 진지한 얼굴로 안다고 말하고 싶다. 어정쩡한 곳에 서서 새어 나오는 사랑 정도만 받은 게 고작이라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진짜 사랑은 사실 어떤지 모르지만, 상관없다. 우리가 받은 사랑보다 곱절은 더 큰 게 거기 있을 게 뻔할 테니. 안 봐도 비디오다. 그저 저 안의 사랑은 내가 말한 것보다 몇 배는 더 살갑고, 상대를 몸 둘 바 모르게 할 거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정작 그는 자신의 사랑을 느껴본 적이 있을지, 진심으로 궁금해할 것이다.


언젠간 내가 먼저 그에게 간식을 내밀고 싶다. 먼저 빈칸을 채우고, 수저를 두고, 회식 때는 먼저 고기를 굽고, 두툼한 고기 몇 점을 그의 접시에 말없이 놓아두고 싶다. 나는 그렇게, 다른 동료는 또 자신만의 방법으로 그에게 우리가 받은 사랑을 되갚으며, 그의 사랑을 나도 그에게 알려 주고 싶다. 사랑이 꼭 범주 안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님을. 결국 애정하는 마음은 사랑 말곤 표현할 말이 없음을 그를 통해 배웠다.



전성배田性培 : 1991년 여름에 태어났다. 지은 책으로는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 『너와 나의 야자 시간』 이  있다. 생生이 격동하는 시기에 태어나 그런지 몰라도 땅에 붙어사는 농부와 농산물에 지대한 사랑을 갖고 있다.


aq137ok@naver.com

https://litt.ly/aq137ok :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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