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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세연 Nov 08. 2018

'미쓰백'을 보고

풍부한 서사를 갖는 여성 주인공을 위하여

#미쓰백 #슈니들이_지켜줄게

미쓰백을 보고 왔다. 동생과 함께 영화관으로 향하며 주연 한지민 씨가 동생과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1년에 몇천 명씩 졸업생들이 쏟아져 나오는 마당에 그게 무슨 의미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어지는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미쓰백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진 과정, 소재의 중요성에 공감한 재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영화관 한 관을 대여해 단체 관람을 할 정도로 서울여대에서 이 영화가 화제가 된 것이다. 서로를 슈니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학우들은 인스타그램에서 '#슈니들이 지켜줄게, #슈돕슈' 해쉬태그를 남기며 인증샷을 올리고 있고, 놀랍게도 한지민 배우 역시 이를 확인하고 좋아요나 댓글로 응답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미쓰백이 다루고 있는 주제가 모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도 선뜻 나서서 이야기하지 않는 '아동학대'라는 점, 그리고 이 영화가 드물게도(!) 여성 감독의 작품이며, 두 주연 배우가 모두 여성이라는 점, 또한 스텝들도 대다수가 여성이었다는 점에서 서울여대생들의 미쓰백 단체관람이 단지 학교 선후배 간의 끈끈한 학연을 나타낸 게 아니라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주제 중 하나인 '여성 간의 연대'를 현실에서 멋지게 구현한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가  화제가 되는 이유가 정확히 뭘까?

영화를 보러 가기 전 동생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영화가  화제가 되는 이유가 정확히 뭘까? 영화판에서의 소수자인 여성들이 만든 영화(감독, 배우, 스텝 모든 면에서)라는 점에서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참여적 의미에서 일까? 아니면 정말 영화가 좋아서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나서의 내 답은 '그 둘은 분리할 수 없는 질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영화는 여성들이 만들었기에 그동안 주목되지 않았던 이야기를 담을 수 있었고, 그렇기에 특별해진 것이다. 영화의 서사 속의 구원자, 피해자 그리고 악역까지도 모두 여자다. 남자들은 이번만큼은(드물게도) 조력자, 주변부 역할이며 그 점은 사소해 보이지만 특별한 차이를 만든다. 바로 영화를 통해 우리가 단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여성 캐릭터를 만날 수 있다는 거다.


영화(뿐 아니라 현시대의 거의 모든 대중문화의 서사 속에서) 속 여성은 주로 피해자와 조력자 역할에 머문다. 영화 '아저씨' 속 원빈이 새론이를 구하던 장면을 기억한다. '살려야만 한다!'라는 맹렬한 의지를 바탕으로 죽음을 불사하고 악의 무리를 소탕하는 남자 주인공, 화려한 액션으로 육체미를 보여준 후 보상처구해지는(또는 주어지는) 피해자 여성.(과연 여기서 피해자 역할의 여성을 주인공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라는 의문마저 든다)

특히 범죄와 액션을 담은 영화 속에서 여성들은 정말 약속이나 한 듯 동일하게 묘사된다. (아닌 경우를 알려주면 제정신건강과 문화생활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관객인 나는 어느 순간부터 여성을 묘사하는 이 스테레오 타입이 지겨워졌고, 예고편에서  소리 나는 영화, 하정우와 이병헌이 양복 입고 나오는 영화를 피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쓰백은 낯설다

미쓰백은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한 사람이다. 가족도 돈도 빽도 뭣도 없다. 가족은 울타리가 되어주기는커녕 어린 미쓰백을 학대했고 결국 버렸다. 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강해질 수밖에 없었고 자기편 하나 없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그것은 억척스러움, 냉소, 담배와 시도 때도 없이 내뱉는 욕설과 동의어이기도 했다. 그런 미쓰백이 숨기지도 않고 보란 듯이 내보이는 억척스러움은 낯설다. 팬티가 보이든 말든 아무렇게나 앉아서 다리를 벅벅 긁으며 고된 육체노동으로 인한 허기를 달래기 위해 국밥을 입에 크게 떠 넣는 장면에서 우리는 미쓰백이 그동안 한국 영화가 자주 다뤘던 '여성 캐릭터'와는 분명 다르다는 걸 알게 된다.

세차장 알바하는 미쓰백

그녀는 타인의 보호를 거부한다. 세상의 풍파를 견디느라 얼핏 차갑지만 (남자와의) 사랑을 알고 변화하는 '캔디'에서 '나의 아저씨'까지 이어지는 고리타분한 유형의 여성 캐릭터를 말하는 게 아니다. 정신적으로도(사건에 연루될 때마다 장섭은 형사의 신분을 활용해 그녀를 돕는다), 물질적으로도(그는 그녀에게 결을 제안한다) 장섭은 미쓰백을 보호하려고 하나 그녀는 꾸준히 그를 밀어낸다. 남녀 간 사랑의 역학 관계 속에 담긴 '밀당' 이 아니다. 그녀는 '낭만적 관계' 는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게 없는 삶을 선택한다. 어찌 보면 이는 자연스럽다. 앞에 말했던 캔디 유형의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서사에서는 볼 수 없는 선택이지만 말이다. (그녀들의 서사에서는 모든 역경은 '사랑'을 통해 극복되곤 한다.)

왜냐면 그녀의 상처는 애초에 '낭만적 관계'를 통해 치유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그녀를 버리는 상처를 줬을지언정, 아빠는 애초에 그녀의 삶에 등장한 적도 없었다. 또한 홀로 남겨져 살아가던 중 그녀는 성범죄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전과자가 되었다. 이런 삶을 겪어낸 사람이 '낭만적 관계'를 통해 본인을 구원하려고 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현실에 대입하여 생각해보아도 가능성은 낮기만 하다. (대중문화 서사는 이 어려운 걸 자 해내라고 한다.)

미쓰백과 지은

아무도 의지하지 않을 것 같던 그녀는 자신과 닮은 상처를 가진 지은을 만났을 때 비로소 무너진다. 같은 상처를 지닌 자들이야말로 서로를 위로할 가장 적합한 자격을 갖는다. 동정의 마음으로 겪어보지 않은 고통을 위로하려 하는 몸짓은 다정할지언정 상처를 치유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장섭이 미쓰백의 어머니의 죽음을 대신 수습한 후 그녀를 대신하여 과거 미쓰백에게 한 행동을 변론할 때, 관객은 상처를 위로하려 했던 의도를 읽고 따뜻하다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미쓰백은 "시발 네깟게 뭘 안다고" 라며 자리를 박차고 나갈 뿐이다.

그래서 지은과 미쓰백의 관계가 특별하다. 지은을 만나 보듬는 과정에서 미쓰백은 자주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지은처럼 학대받고, 버려졌고, 외로웠던 시절. 같은 상처를 가진 자들끼리의 연대는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껴안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미쓰백이 지은을 보호하기로 마음먹고 달려가는 장면에서 마음이 배로 먹먹해졌던 것 같다. 미쓰백이 달리는 그 길은 지은을 구원하는 길이자 어린 시절 자신에게 향하는 길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손쉽고 게으른 서사가 아닌 개연이 있는 서사

그동안 한국 영화가 택해왔던 '낭만적 관계로 만사형통'하는 손쉽고도 게으른 서사가 아닌, 인물과 사건에 개연이 있는 서사라서 좋았다. 이 영화가 모두에게 별 다섯 개짜리 영화는 분명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여성 캐릭터가 갖는 입체성, 그가 갖는 서사의 풍부함과 개연성 측면에서 보았을 때 나는 이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벡델 테스트'라는 서사를 평가하는 기준이 있다. 미국의 여성 만화가 엘리슨 벡델이 남성 중심 영화가 얼마나 많은지 계량하기 위해 고안한 영화 성평등 테스트다. 기준은 아래와 같다.


1) 이름을 가진 여자가 두 명 이상 나올 것 : 미쓰백과 지은
2) 이들이 서로 대화할 것 : 그들은 쭉 대화한다
3) 대화 내용에 남자와 관련된 것이 아닌 다른 내용이 있을 것 : 그들의 상처에 관하여 이야기하곤 한다


'미쓰백'이 거뜬히 통과한 이 테스트를 2017년 한국 영화 관객수 TOP10 영화들에 적용해보면 10개 중 고작 1개의 영화(아이 캔 스피크)만 살아남는다. 나는 '미쓰백'을 시작으로 좀 더 많은 영화가 이 테스트를 통과하길, 더 깊은 서사를 갖는 여성 캐릭터를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길 바란다. 그래서 있는 힘껏 그들에게 공감하고, 울고 웃으며 내 삶을 비추어 보고 싶다. 영화의 목적이 '소수의 관객들끼리만 즐거울 것' 이 아니라 '다양성의 서사를 통해, 그보다 더 각양각색인 삶을 사는 관객에게 공감의 순간을 선사하는 것'이라면 내 바람이 곧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 참고 : 올해 흥행작들을 젠더 개념 대입한 '벡델 테스트'로 따져봤더니/ 씨네플레이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1254509&memberNo=31724756&vType=VERT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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