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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세연 May 14. 2021

제주 앞바다에서 우연히 마주친 돌고래

[휴직일기] 돌고래와 제주 해산물 맛집의 상관관계

아빠, 동생과 함께하는 3박 4일의 여행 중 세 번째 날 일정은 웨이크 보드와 프리다이빙 체험이었다. 웨이크 보드를 마치고 기다리던 중, ‘어! 돌고래 보인다!’라는 누군가의 외침에 ‘어디? 어디?’ 하며 모두가 두리번 댔다. 나는 방파제에서 아무리 목을 쑥 빼고 봐도 어디에도 돌고래가 보이지 않아 마음속으로 ‘도대체 어디에 보인다는 거지?’ 하고 의아했다. 마침 강사님께서 ‘물속 시야가 안 좋으니 예정된 프리다이빙을 하기보다, 돌고래를 보러 가는 게 어떨까요?’라고 물어봐주셨다. 우리 모두 기쁜 마음으로 끄덕였다. 정말 살아 있는 돌고래를, 수족관이 아니라 제주 바다에서 볼 수 있다니, 그게 가능할까? 순식간에 내 마음이 기대감으로 두둥실 부풀어 올랐다.

제트 스키 보트는 3인승이었다. 운전자 강사님을 빼면 2명이 더 탈 수 있었는데, 일단 콘텐츠 촬영이 급하니 동생과 아빠 먼저 타라고 양보했다. 나는 방파제에 앉아 보트가 나가는 걸 지켜보며 ‘내 차례까지 꼭 돌고래가 있어줬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보트가 출발한 후 시간이 얼마간 흘렀고, 저 멀리 수평선에서부터 보트 머리가 차근차근 보이기 시작했다. 보트를 발견하자마자 나는 방파제에서부터 선착장으로 무작정 뛰었다. 팔과 다리의 움직임 때문에 쫄쫄이 웻 슈트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걸 느끼며 파란 하늘과 그보다 더 짙은 바다를 옆에 두고서는 달렸다. 그때 내 마음은 순수한 물음표와 느낌표로 가득했다. ‘정말 돌고래를 봤을까? 나도 얼른 돌고래를 보고 싶다!’. 손대면 팡하고 터져버릴 것만 같은 마음을 껴안고 달렸다.
 
할 말이 가득한 얼굴로 아빠와 동생이 보트에서 내렸다. 내리기가 무섭게 물었다. ‘돌고래 봤어?!’ ‘어! 돌고래 봤어. 진짜 가까이서 봤어!’ 이번에는 내 차례였다. 미룰 수 없었다. 당장 보트에 올라탔다. 첫 번째 팀이 보고 온 것처럼 나도 볼 수 있길, 거기에 그대로 있어주길.

그런데 왠 일. 야속하게도 돌고래가 보이지 않았다. 와다다다 소리를 내면서 푸른 바다를 요란하게 이리저리 가로질러 봐도 돌고래는 없었다. ‘어 저건가?’ 싶어서 가보면 그곳에는 크게 부서지는 흰 파도뿐. 몇 분이나 바다를 맴돌았을까. 빠르게도, 느리게도, 동쪽으로도, 서쪽으로도 가로질러 보았지만 돌고래는 흔적도 없었다. 나는 잠시 시무룩했지만 곧 돌고래 없는 이 바다를 받아들일 참이었다. 비록 돌고래가 없어도 바다 한가운데를 폭주족처럼 누비는 경험 역시 최고였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그 위로는 거짓이 아니었다. 드넓은 바다에는 차선이 없었다. 동서남북 어디로 가든 상관이 없었다. 물론 속도 제한도 없어서 그저 내가 원하는 대로 가면 그뿐이었다. 보이는 것은 무작정 푸른 망망대해뿐이라 드는 약간의 공포심과 극한의 자유로움이 합쳐져 나는 잠시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바닷사람이었다.


물론 자유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이 보트는 비포장도로를 초고속으로 판자때기 썰매로 주행하는 느낌이었다. 파도가 조금이라도 세지려고 하면 그대로 물살을 온몸으로 맞으며 덜컹였다. 정말 까딱 손에 힘을 풀었다가는 내동댕이 쳐지기 십상이었다. 돌고래 찾으러 가다가 나 죽겠네 싶어서 빠르게 체념한 것도 있었다.

그렇게 체념 모드에 돌입하려던 중, 앞자리의 여자분이 외쳤다. ‘돌고래다!’


돌고래 떼가 눈 앞에!


나는 돌고래가 무리 지어 다닌다는 걸 몰랐다. 돌고래를 본다는 건, 한 무리의 돌고래 친지들을 모두 만나본다는 뜻이었던 거다. 한 마리의 외로운 돌고래를 만났더래도 기뻤을 텐데, 이런 대가족이라니. 포기하려던 순간 나타난 마법 같은 행운 앞에서 나는 그저 ‘우와, 우와’를 반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푸르른 바다를 유유히 헤엄치는 돌고래들은 여유로웠다.


돌고래를 보며 깨달았다. 이 바다의 손님은 우리다. 주인인양 행세하며 여기저기 소란스레 누벼댔지만, 사실 우리는 바다에서 숨을 잃으면 1초도 더는 살 수 없는 이방인이었다. 자유롭게 물에서 호흡하고, 때로 우아하게 수면 위로 뛰어오르는 돌고래들이 바다의 주인이었다. 바다에서 살 수 있도록 미끈하게 뻗은 유선형의 몸이, 잘 헤엄칠 수 있도록 돋아난 지느러미가, 태초부터 자연스레 몸에 심어져 있는 헤엄의 방식이 모두 말해주고 있었다. 그들이 바다의 주인이라고. 나는 그저 이 모든 것이 경이로웠다. 수족관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진짜 자기 고향에서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바다의 생물들. 그 앞에서 우리는 단지 그들의 고향을 잠시 빌리는 손님일 뿐이었다.



돌고래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인간이 지구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귀여워, 멋져’ 하고 돌고래를 신나게 보고 와서는, 아무렇지 않게 돌고래의 먹이를 빼앗아 양식장으로 부어 넣어 자연의 돌고래를 굶주리게 하는 우리들. Sns에 꼭 가봐야 하는 스시집과 끝내주는 물고기 요리들을 전시하는 우리들.


우리는 신나는 경험으로 ‘돌고래 보기’를 소비할 뿐, 그들과 공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제주 해산물 맛집’을 수도 없이 저장해 놓은 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지금 내 마음 한편에 일어난 찜찜함이 변화를 가져올 거라고 생각한다. 돌고래가 고향인 바다에서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도록. 우리가 돌고래를 바라봤을 때의 경외감이 자연에 대한 존중과 공존에 대한 소망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그게 오늘 한 끼 해산물을 덜 먹는 아주 작은 행동에서부터 시작되는 변화라면 좋겠다. 그리고 혹시 ‘돌고래랑 해산물 소비가 무슨 상관이야?’라고 물음표가 떠오른 분들이라면(불과 얼마 전까지 나도 그랬다!) 넷플릭스에서 ‘씨스피라씨’라는 다큐를 보는 것도 추천한다. 바다를 망치는 주범이 누군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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