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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전씨 Oct 02. 2023

나 동양인 여자라 뽑은 거야?

Diversity 기회인가 위기인가.. 기회면 어쩌고 위기이면 어쩌시게요

Diversity라는 말만큼 나에게 양가적 감정을 들게 하는 말은 없다. 미국 회사에 다니며 테크 직군에서 일하는 여자들은 모두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Diveristy는 기회가 될 때도 있다. 한국 여자인 동료가 업계에서 꽤나 유명한 사람과 엄청 큰 무대에서 함께 발표를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원래 같이 일하던 사이었는데 그 사람이 제안을 했다고 한다. 그 친구가 왜 자기한테 제안을 하냐고 물으니 "내 팀에는 나이 많은 백인 남자 밖에 없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 친구는 백인 남자였어도 그 자리에 설만큼 대단한 실력자다. 그래서 나는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한참을 곱씹었다. 그렇지만 지금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Diversity 는 나에게 늘 도사리고 있는 위협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나도 모르게 어떤 방에 들어가면 그곳에 여자가 몇 명이나 있는지 세어보게 된다. 내가 생리통으로 힘들 때 그 고통을 속 시원히 말하고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 있는지 알고 싶다. 미국에 와서는 특히 동양인 여자가 몇 명이 있는지 세어본다. 진심으로 그런 것에 신경 안 쓰는 사람이고 싶지만 어째서인지 매번 그렇게 하게 된다.


얼마 전에 팀을 이동했다. 팀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오프라인 행사가 있어서 출장을 다녀왔다. 모두가 뉴하이어인 나를 너무도 반갑게 맞아주었다. 사람들이 돌아가며 나를 찾아와 인사를 해주어서, 가기 전에 걱정했던 것처럼 혼자 방구석 어딘가에서 서서 서성거리지 않아도 되었다. 이제 행사가 시작되고 모두가 자리에 앉았을 때 나는 습관적으로 여자처럼 보이는 사람을 세어보았다. 5명, 그중에 동아시아인 여자는 나 혼자였다. 늘 남초 환경에 있기는 했었지만 성별에다가 인종까지 더해지니 이번에는 정말 나 혼자였다. 완전 혼자만 있는 경우는 처음이었어서 새삼 놀랐다. 놀라움은 접어두고 세션을 들었다. 언제나처럼 AWS 사람들은 나를 탄복하게 만든다. 그들의 프로페셔널한 태도, 전문 지식의 깊이, 정말이지 딱 적절한 수준의 유머... 그렇게 요상스러운 위화감은 접어두고 새로운 팀원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그렇지만 어딘가 모르게 계속 불편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차올랐지만 사람들에게 먼저 악수를 청하면서 이 상황을 리드하는 dominant 한 모습을 보여주려 애썼고, 악수를 할 때 내 쬐깐한 손에 적정 수준의 악력이 들어갔을지 머리를 굴렸고,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려 손을 들고 질문했고, 잘 알아듣지 못했을 때에도 뭔가 아는 척 입을 꾹 닫고 조용히 있었다. 호텔방에 돌아와 조용히 누워 "나는 너네가 생각하는 그런 동양인 여자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 말을 누구에게 하고 싶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다녀온 뒤 2주 간 나는 정말 열심히 지냈다. 수도 없이 많은 문서를 읽었고 열댓 명의 사람들과 1:1로 만났고 벼락을 제대로 쳐서 자격증 시험도 봤고 고객 미팅도 인계받아서 슬슬 보조로 참여하기 시작했고 팀을 바꾼 지 10일 만에 2시간 동안의 빡센 고객 미팅도 혼자서 진행했다. 나는 원래 성취 욕구가 높은 사람이지만 고백하자면 불안한 마음이 컸다. 모두가 나에게 이럴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친절하게 잘 대해주는데 내 마음속에는 이 알다가도 모를 불안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까. 이내 알게 되었다. 내가 Diversity hire 일까 봐,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그렇게 볼까 봐 그랬던 것이었다. 사람들이 다른 여자들을 향해했던 말들이 내 안에 계속 쌓여왔다. "저 사람 여자라서 승진된 거잖아", "너는 여자라서 남자인 나보다 기회가 더 많잖아", "저 사람 임원진에 그냥 여자가 필요해서 임원 시켜준 거잖아" 등등 종류는 다양했다.


나는 지금 새 팀에 오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당시 내가 면접을 본 매니저가 본인이 아닌 다른 팀으로 바꿔서 채용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도 그 매니저가 끝까지 나를 채용하기로 지원해주었고, 그 새 매니저도 별 다른 말 없이 나를 그대로 이어받아 나의 요구조건까지 다 맞춰주며 본인 팀에 받아주었다. 내가 채용되면 그 팀의 유일한 여자여서 그런 걸까 괜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방 안의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면서도, 이들은 모두 20년 경력의 반박 불가 시니어들인데 나는 10년 차도 채 안된 병아리 같이 느껴졌다. 내가 여자라서, diversity 를 채워야 해서 뽑힌걸까 자연스럽게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이 두 달 동안 하는 일을 두 주 안에 해치웠다. "나 이 자리에 있을 자격 있는 사람이야"라고 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번에도 역시 그 말을 누구에게 하고 싶었는지는 모른다.


돌이켜보면 내 지난 커리어가 내내 그랬다. 나는 내가 무언가를 쉽게 얻지 않았음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서 나 스스로를 자진하여 갈아넣었다. 자진하여 더 긴 시간 일했고 자진하여 더 어려운 프로젝트에 자원했고 자진하여 더 많은 일에 나 스스로를 몰아넣었다. 이 불안이 나를 계속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해주었지만 나는 이제 불안하지 않고서 성장하는 방법을 모른다. 상대적으로 편안했던 이전 팀에서, 다시 이 불안감을 느끼게 하는 팀으로 옮겨 왔을 때 불안해하면서 안심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를 가스라이팅 하고 있는걸까 자조하며 묻기도 했다.


아무도 나에게 내가 여자라서 기술적인 대화를 하지 못할 것 같다고 말한 적 없었다. 아무도 나에게 여자라서 명품백이나 네일아트, 옷과 화장품에만 관심 있을 것 같다고 말하지 않았다. 아무도 나에게 동양인이라서 소심하고 수학을 잘할 것이라고 말한 적 없었다. 오히려 다들 잘한다고 멋지다고만 해주었다. 매니저에게 내가 느끼는 바를 솔직히 말했다. 모두가 너무나 친절하고 잘 도와주지만 내가 Diversity hire 같이 느껴져서 불안하고 늘 impress 해야 할 것만 같은 압박감이 든다고. 매니저는 아주 긴 시간 공을 들여 내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어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이고 이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써서 돕겠다고 말했다. 진심처럼 느껴졌다. 그렇지만 내가 잘하고 있다는 그 말은 어쩐지 믿을 수가 없었다. 사실 그 누구보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나 스스로를 상대로 성차별, 인종차별 하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세상의 모든 일은 진정성과 정면돌파로만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어떤 일도 이 두 가지 없이 해결할 수는 없다, 이 두 가지만 있으면 그 어떤 것도 해결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문장 다 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정면돌파가 아닌 것은 할 줄 모른다. 그러니 하나는 해결이 되었고 이제 다른 하나, 진정으로 나 스스로 정말 capable 함을 믿는 일만 남았다. 나 자신만 설득하면 된다는 것은 큰 안도가 되면서도 절대 넘을 수 없는 산처럼 느껴진다. 언젠가는 나 스스로를 믿는 법에 대한 팁을 글로 남기게 되는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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