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길의 끝에.. 최인아 작가님의 결말이 있다면
“나는 왜 이렇게까지 살지”라고 생각하게 되는 때가 종종 있었는데, 그 순간들을 그렇게까지 살아내고 나면 나는 최인아 작가 같은 사람이 되어있을 수도 있는걸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 설레기도 하고 안심이 되기도 했다. 29년 넘게 일하는 동안 쌓아온 그의 철학, 그 시간 동안 해왔던 생각들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의 궤적과 너무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읽는 내내 너무 나랑 비슷하다고 생각했지만, 크게 세 가지를 꼽아보자면 이렇다.
첫째 가시밭길, 혹은 사서 고생하기가 취향인 것. “일이 너무 많고 바쁜 삶을 살다 일하지 않는 삶을 선택해 갈아탔는데 어쩐지 저는 그 삶이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기쁘지도, 즐겁지도 않았어요”라는 구절이 나온다. 지금 내가 있는 팀은 일이 그렇게 많지 않은데도 내 매니저는 나를 너무 대단하다고 생각해주고 팀 분위기도 정말 따뜻하고 내가 뭔가 조금이라도 뭔가 하는 것 같으면 모두가 박수치면서 응원해주는 팀이다. 마음이 내키지 않을 때면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일이 없으니 솔직히 그런 날이 많았다. 그런데 행복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쉬니까 좋겠네, 여유를 만끽해, 숨은 신의 직장이네 라고 말해도 나는 슬며시 웃고서 ‘사실은 하나도 즐겁지 않아’라는 배부른 소리를 내뱉지 못했다. 최인아 작가는 이렇게 “어 사람들 말로는 행복해야 할 것 같은 상황인데 행복하지 않네”라고 느꼈을 때 ‘나는 스스로 뭔가를 해야 하는, 내 생각과 에너지를 불어넣어 뭔가를 만들어내야 하는, 그래야 만족이 되는 인간’임을 느꼈다고 말했다. 나도 비슷하게 내가 납득할 만한 도전적인 과제를 받고, 이것을 위해 나 자신을 갈고 닦고, 그 결과로 뭔가 해내서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하다면 만족을 느낄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둘째 내게 주어지는 것들을 끝없이 의심하고 나 자신에게 질문을 멈추지 못하면서도, 그저 잘하고 싶은 마음으로 멈추지 못하는 것도 비슷했다. “저는 29년을 광고쟁이로 살았지만 절반 가까운 세월은 이 일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며 보냈어요. 방황도 했고요. 그러면서도 지기 싫고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 부단히 애쓴 것도 사실입니다.” 테크 직종에서 일하는 것은 어디서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나의 선택이었다. 그렇지만 그 뒤에는 그냥 별 생각 없이 주어지는 과제 하나 하나에 매몰되어서 그저 흘러만 가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계속해서 해왔다. 그렇지만 주어진 일을 잘하고 싶은 순진한 마음, 지고 싶지 않다는 치기어린 승부욕으로 일을 놓지는 못했다. 계속 이렇게 살게 되는걸까 싶어서 갑자기 힘이 빠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한 일을 30년 가까이 한 최인아 작가도 그 절반을 나 같은 질문을 하면서 지나왔고 “여태 도망가지 않고 계속해서 하고 있다면 이 일은 이번 생의 일로 받아들이자”라고 스스로 답하게 되었다니 안심이 되었다.
셋째 회사에 다니지만 회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일한다는 태도. 나는 내 하루의 주인이고 그 하루에 1/3을 회사에 주기로 결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여기에 끌려가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해서 쓴다는 생각을 잃지 않는다. “손흥민 선수는 손흥민 자신을 위해 뜁니다. 직장인도 다를 게 없습니다. 자신을 위해 일하는 건 같잖아요? 조직과 상관없이 자신의 평판, 역량, 경험 등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쯤에서 빅터 프랭클 박사의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볼까요? 우리 각자는 존엄한 존재로서 환경을 바꿀 힘은 없어도 그에 어떻게 대응할지 결정할 자유는 갖고 있다는 메시지 말입니다.” 회사에서의 어떤 사건은 나에게 어떠한 결정권도 없이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성장과 배움의 기회로 만들지는 온전히 나만의 몫이다.
내가 그간 해온 생각에 대한 확신을 더하는 것과 별개로 배운 것도 있었고, 가까운 시일 내에 내가 답을 내려야 하는 질문도 있었고,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 찾아올 질문도 있었다.
첫째 시니어로서의 성장에 대해 배웠다. 지난 7월부로 내 직함 앞에 시니어가 붙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뭘 하면 시니어가 될 수 있고 그 자리에 가려면 지금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아주 명확히 알고 있었고 그것을 성공적으로 갖추어왔다. 그런데 이제 이 뒤에는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 이 시기를 어떻게 지내야 외면적으로는 수석 타이틀을 달게 되고 디렉터가 되는지, 내면적으로는 일과 삶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을 수 있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이 부분을 읽고 정답은 내가 늘 묻던 “what’s your perspective”라는 질문에 있었음을 깨달았다. “중요한 것은 그 업의 핵심을 꿰뚫는 관점을 갖고 있느냐입니다. 관점이 확실하고 올바르면 무엇이 중요한지를 파악할 수 있고, 의사결정의 선후를 정할 수 있으며, 지금 몰두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을 그르치는 경우를 보면 나중에 해야 할 것을 먼저 하거나 먼저 해야 할 것을 후로 미루어서일 때가 많습니다.”
둘째 나라는 브랜드의 컨셉을 정해야 함을 배웠다. “저는 브랜드 콘셉트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자신의 강점이자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고유의 가치이며,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혹은 언제 할지 잘 모르겠거나 헷갈릴 때 돌아볼 기준 같은 거라고. 브랜드 콘셉트를 이런 식으로 정의한 것은 실제로 도움이 되고 현장에서 작동하기를 바라서입니다.” 요즘 나에게 계속 꾸준히 입력되는 질문이다. “너는 장기적으로 뭐가 되고 싶니”, “최종 목표가 뭐니”, “니 인생 컨셉은 뭐니”… 선택해야 하는 순간들마다 갈대보다 더 흔들리는, 이제 앞으로 뭐가 될 수 있는지 모르겠는 나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질문이다. 계속 수정해나가더라도 가까운 시일 내에 어느 정도 답을 갖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셋째, 나는 주연이 아니어도 이 일을 하고 싶은가? 아니면, 더 이상 주연이 아니라면 이 일을 떠날 것인가? 나는 정말 주인공이고 싶어 미쳐있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주고 싶지 않고 뭔가에 안달나있어 보이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있지만, 내 안에는 내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자리에서는 최선을 다해 그 자리를 꿰차자는 생각이 가득차있다. 최인아 작가는 이제 성장 드라마의 주인공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구나라고 느꼈을 때, “이 프로젝트 나한테 오겠군” 했는데 연락이 없어 알아보니 다른 후배가 맡게 되었을 때 이 고민을 하게 됐다. 정말 떠날 생각을 하다가 그간 자신이 해온 것이 너무도 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선의가 있었기 때문이었음을 알게 돼서 관절염약이든 치약이든 힘이 닿는 대로 모두 돕겠다고, 그간 주어진 세상의 따뜻함에 보답하기 위해 기꺼이 조연이 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나는 솔직히 아직 내가 이 씬의 주인공이 아닌 인생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리고 스타 플레이어의 자리를 이어나가고 싶어서 매니저가 되는 것도 늘 고사하고 있다. 언젠가 나도 현자 같은 조연 역할이 주어졌을 때 만족하는 사람이 되려나? 아직은 모르겠다.
이제 세상에 공개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지 5년이 되었다. 나는 보통 한 편의 글을 시작하는 것은 내 의지라기 보다도, 어떤 폭발에 가깝다. 글을 쓰고 싶다는, 머리 속에 피어나는 생각들을 하나로 엮어내고 싶다는, 외부 자극으로 비롯된 그 생각들을 엮어 나다운 어떤 것을 세상에 내놓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을 이기지 못해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글을 마무리 하는 것은 이성이 완벽히 혼자서 해내는 일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글을 마무리 하는 게 훨씬 더 어렵다. 근데 5년간 해보니 내 글 마무리는 언제나 늘 “지금 잘한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하겠다,” “그럼에도 계속 하겠다”라는 말이었다. 글을 쓰기 시작한 뒤로 후배들을 만나 커리어 강연 같은 것을 할 일이 종종 있었는데, 변태하느라 힘든 시기를 어떻게 지냈냐는 질문을 매번 빠짐 없이 받는다. 한참 말을 골라보지만 “그냥 했다”라는 말 밖에는 하지 못했다. 실망스러운 답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진짜 날것의 진실이, 더 솔직히는 이 말 안에 나도 무엇이 정확히 들어 있는지 모르겠어서 말이 거기서 멈춘 것이다. 최인아 작가가 “그냥 했다”라는 말 속에 들어 있는 것들을 잘 풀어주셨다.
그냥 붉어지고 그냥 둥글어진 게 아니라 태풍과 벼락, 무서리, 땡볕이 그 안에 다 들어앉아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인상적인 성취를 한 사람이 하는 ‘그냥 했다’라는 말 속에도 하기 싫은 유혹, 아팠던 몸, 악평에 주저앉을 뻔한 경험, 된다는 보장이 없어 그만두고 싶었던 외로움 등이 한가득입니다.
이 모든 것을 다 들고서 계속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자, 그리고 그렇게 가는 다른 사람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배우면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