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염전씨 Dec 22. 2023

2023년에 나에게 있었던 일

한 사람의 삶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

한 해 하는 가장 재미있는 활동 중에 하나.. 일년치 일기를 살펴보기입니다. 친한 친구들만 볼 수 있는 부계 블로그에 올릴까하였지만 제 근황을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나누고 싶어 이렇게 긴 글을 브런치에다 올립니다.


올해 있었던 객관적 사실

영주권 진행 중단ㅠ

H1B 비자에 당첨되었다..! 아마존을 뜰 수 있게 되었음            

이사함            

근데 또 다른 도시로 이사하기로 결정함            

근데 그 이사를 안 갈 수도 있게 됨 (써놓고 보니 흐름 대환장이네)            

회사 사람들이랑 진짜 개 싸움; 같은 오피스에 있었으면 수염을 잡든 머리채를 잡든 뭐든 잡았을 정도. 머리가 빠지고 있는 새끼였기 때문에 머리 쪽을 공격했을 듯.            

승진함. 놀랍도록 기쁘지만은 않았음ㅠ 내가 평가 받는 체계와 기준에 대해서 신뢰를 잃었기 때문임.           

3개월 뒤에 새 팀으로 옮김            

LA 4번, 샌프란 4번, 뉴욕 1번, 라스베가스 1번, 포틀랜드 1번 다녀옴            

테니스를 코트에서 칠 수 있게 되었음            

시그니처 메뉴가 생겼음! 유자된장 제육볶음과 매운크림 치킨리조또            

미 서부의 아이스크림 아마추어 미식가라고 자부할 수 있게 됨            

이별하였다..! D와 헤어졌지만 이 이별을 통해서 마침내 ㅅ와도 헤어진 것 같다.            

6년 만에 첨으로 상담 재개            


올해의 컨텐츠

드라마 - Marvelous Mrs. Maisel


지금 돌이켜서 생각해보면 나는 영어로 말할 때 메이즐 같고 싶은 것 같다. 엄청 위트있고 sting like a bee 하고 듣고 있자면 노래 같은 영어. 현실은 그냥 어설프게 빠르게 말할 뿐이지만 ㅠ


시즌을 통틀어 가장 멋있었던 엔딩 시즌의 메이즐 대사 "저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었죠, 당신이 묻기만 했으면 됐어요."


https://youtu.be/QiCGL9hUlcQ?si=N-s06D9-LPx-ac3y




책 - 천개의 파랑


이런 작가와 동시대를 산다는 건 진짜 두근거리는 일이다. 이 사람의 성장, 이 사람의 실패, 이 사람의 사랑, 이 사람의 이별 모두 글로서 함께 경험할 수 있을 테니까.. 연인에 한정되지 않은 사랑과 그리움, 미래와 기술에 대한 낙관이 길지 않은 이 책에 다 담겨있는 것만 같았다. 내가 한국어를 모국어로 할 수 있음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 “그게 실은 내 불행이기도 하니까.” 콜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


“가족들의 불행을 마주 본다는 건 내가 외면했던 내 불행을 마주 보는 거랑 같거든.” 너무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했나. 뒤늦은 후회를 하며 연재가 하던 걸 모두 정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들지는 않을 테지만 잘 자라는 인사를 습관적으로 남기고는 방을 나왔다. 더 머물렀다가는 콜리에게 많은 말을 쏟아낼 것 같았다. 콜리에게는 지난 일인 것처럼 말했지만 아직도 연재는 외면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이 흐름을 끊고 불행을 대면할 수 있는지 방법을 몰랐다.



> 그리고 또 그 사람은 우리와 같은 온전한 두 다리를 갖고 싶은 게 아니에요. 다리는 형체죠. 진정으로 가지고 싶은 건 자유로움이에요. 가고자 한다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요. 자유를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한 게 아니라 아주 잘 만들어진, 오르지 못하고 넘지 못하는 것이 없는 바퀴만 있으면 돼요. 문명이 계단을 없앨 수 없다면 계단을 오르는 바퀴를 만들면 되잖아요. 기술은 그러기 위해 발전하는 거니까요. 나약한 자를 보조하는 게 아니라, 이미 강한 사람을 더 강하게 만든다고 생각해요.” 연재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마지막 문장까지 무사히 내뱉었다. “인류 발전의 가장 큰 발명이 됐던 바퀴도, 다시 한 번 모양을 바꿀 때가 왔다고 생각해요. 바퀴가 고대 인류를 아주 먼 곳까지 빠르게 데려다줬다면 현 인류에게도 그렇게 해줄 거라고 믿어요.”




올해 자꾸만 나에게 주어졌던 질문들

세상이 나한테 어떤 큰 주제를 가지고 질문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때가 있었다. 대학생 때 ‘진짜’로 그걸 원해? ‘진짜’로 학자가 되는 게 니가 원하는거야? 라는 것이 있었고, 신입사원이 됐을 때 너 좀 평범해질 필요가 있다는 말이 그랬다. 올해는 두 가지 주제가 자꾸 나한테 주어지는 느낌이었는데 하나는 “너 그래서 앞으로 뭐가 되고 싶어?”라는 것, 다른 하나는 “be authentic” 이었다.


미국에 와서 가장 크게 느끼는 변화가 나 자신을 진공포장하지 않아도 1) 사람들이 대체로 나를 좋게 봐주는 것 같음 2) 실제로는 어떻게 평가하는지 알 길이 렬루 전혀 없어서 신경도 안 쓰임. 그래서 마치 한국에서 너무 자기 주장을 강하게 하지마!! 라고 하는 사회적 요청을 받는다고 느낀 것처럼, 여기서는 너의 진정성을 보여줘!!라는 요구를 더 받는다고 느낀다. 그래서 아 나는.. 누구지..? 회사와 나의 직업을 떼어내고 난 나는 어떤 모습이지..? 이런 생각을 정말 많이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지금 모습을 알려면 내가 지나온 과거,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을 필히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음? 그런 데다가 미국인들이 + 나와 함께 일해온 한국인 동료들이 내가 본질적으로 되고자 하는 모습에 대해서 정말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물어봤다. 답은 사실 아직 정말 모르겠고.. 아래 나 자신의 모순된 면과 많이 화해했다고 썼지만 여전히 나는 평범하고 싶지 않다는 강렬한 열망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정말 더더더 모르겠다.




올해 한 생각들

              그 이전에 내가 살아온 시간들과 온전히 분절되는 것만 같은 시간이었다. 영화에서 보면 그 왜 땅이 지진 난 것처럼 흔들리면서 양쪽으로 쪼개지는.. 그런 거 아시죠.. 근데 내가 가졌다고 생각한 모든 것, 나 자신의 본질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들이 반대쪽으로 가버리고 나는 이 흔들리는 땅 조각에서 혼자 있는 그런 느낌. 지난 10년은 뭐랄까... 정말이지 요령 없이 부딪히기만 했던 시간이었다. 시간과 에너지가 남아서 가능했다. 그렇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살아야 하는 때가 왔음을 여러 레이어로 느끼고 있다. 그래서 정말 올 한해는 내 인생 시즌2 첫 에피소드 그잡채였다.            


              저녁이 있는 삶 살아봤는데 나한테는 잘 안 맞더라. 다시 치열하게 눈 코 뜰 새 없는 갓생의 세계로 돌아왔다. 나는 일이 잘 되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다. 나는 critical feedback을 먹고 자란다. 나는 역경이 주어질 때 그것을 헤쳐나가며 성장하고 거기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가시밭길을 가는 게 취향이라면 나의 엔딩은 뭘까? 왜 나는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환경 속에 자꾸 몰아넣을까? 불안한 사람들은 성공할 확률이 높은가? newness seeking, addictive personality 가 불안한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한다. 이런 특징 때문에 성공하기도 하지만 정확히 같은 이유로 불행하다고 한다. 그 순환(새로운 것 → 권태)에 지겨워지고 앞으로 인생에 더 새로운 것이 무엇이 있겠냐는 공허에 빠지고 ‘무망’한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장기적인 목표’가 뭐야 라는 질문이 나에게 계쏙 입력된다. 가서 무시 당할까 걱정하고 이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불안해하면서 왜 계쏙 이 가시밭길을 가려고 하는거야? 그냥 그것을 좋아하는 부류의 인간인 것이다 unfortunately..            


              나 자신과 많이 화해하였다. 나 진짜 못돼 처먹은 baddest bitch이고 이 구역 미친년 내가 될 거고 내가 진짜 다 짱 먹고 슈퍼스터가 될거야!! 라고 생각하려고 정말 애썼지만, 나는 안타깝게도 너무도 물렁하고 사랑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요리하는 걸 좋아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요리해주는 것도 너무 좋아한다. 일에서 개쩌는 인간이 되고 싶지만, 내 업의 본질은 고객을 도와주는 것이고 나는 이것을 너무 좋아한다. 남을 도와주는 것에서 보람을 느끼며 가족, 친구, 연인들을 깊이 사랑할 때가 제일 행복하다. 나에게서 말랑한 면을 볼 때마다 그 모든 것을 도려내고 했지만 당연하게도 그럴 수 없었다. 이제는 내가 물멘탈 말랑콩떡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불확실성 속에서 내 생활을 지키는 법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미국에 오고 나서는 그 전보다도 훨씬 더 내 의지대로 되지 않는 일이 많고 내 노력으로 해낼 수 없는 일들이 많아졌다. 인생을 '만들어나간다'는 느낌으로 살아가고 있었고 이것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서 이런 일이 발생할 때 참을 수 없다고 느낀 적도 많았다. 그렇지만 내가 선택한 일이고 그 결과로 발생하는 일들에 대해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지나가야지 뭐 별 수 있겠냐? 도망칠 건 아니니까ㅠ 그래서 이렇게 내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모래알 같은 세상 속에서도 하루를 즐겁게 보내는 방법을 알아가고 있다. 사실 이제 어떤 불확실한 상황에 놓여도 잘 헤쳐나갈 수 있겠다는 모종의 자신감도 생긴다.            


              같은 선상에서 그 어느 때보다 작은 기쁨에 열광한 한 해였다. 홀푸드에서 크로와상 생지를 사와 매일 구워먹은 것, 온갖 브랜드 아이스크림을 다 경험해본 것, 테니스 코트 이곳저곳을 찾아본 것, 30분-60분-90분 산책 코스를 발견한 것, 시애틀의 작고 귀여운 다리들을 모두 다 가본 것... 나를 살게하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처럼 보이는 프로젝트들이 아니라 이런 정말 작은 것들임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싸우고 회복하고 화를 다스리는 한 해였다. 너무나 좋아하고 존경했던 써니와 매일 같이 싸웠고 마라톤 1:1을 밥 먹듯이 하였으며 우리는 꽤나 성숙하게 화해하기도 했고 다시 잘 지냈고 다시 싸우고 다시 또 화를 냈다가 다시 잘 봉합한 뒤 헤어졌다. 지금까지는 한 번 '싸우는' 일이 생기면 사실 그 뒤로는 손절이었어서 그런 상황을 안 만들려고 최대한 노력했었는데, 이제는 내가 내 의견에 자신 있고 상대에 대한 신뢰가 있으면 내 공격성을 꽤 잘 표현하는 법을 알게 된 것 같다. 문제는 상대에 대한 신뢰가 없을 때 1) 공격성을 표현해야 하는지 2)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는 때가 온 것 같다. 이제는 내가 화내는 게 젊은이의 패기라기에는 너무 연륜이 생겨버렸으니까..            


              올해는 추상적인 단어들에 대한 나의 의미를 정립해가는 과정이었다. 사랑, 이별, 인간이 강하다고 할 때 그건 무슨 의미인지... 어쩌구저쩌구들에 형태가 조금 더 잡힌 느낌이랄까?            


              올해의 절대적 테마는 역시 ㅅrㄹ6;; 알고는 있었지만 내가 얼마나 사랑에 미친 여자이고 얼마나 관계에서 힘을 얻는지 더더 느꼈다. 올해 가장 큰 변화는 내가 관계 속에서 갖는 여러 왜곡된 태도들을 똑바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헌신을 바라고 그런 사람을 기가 막히게 찾으면서 나 역시 그렇게 해야 할 때는 도망가는 이유, 이 사람은 나 없으면 안돼라고 건방지게 생각하면서 나는 이 관계에서 뭘 얻는지 생각하는 이유, 어떻게든 기를 쓰고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것 등등.. 나를 그간 힘들게 했던 질문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답을 좀 얻은 것 같다.            




올해 발견한 나의 특징

              취약점을 발견하는 것을 좋아하고 이것을 세상에 드러내는 데에 거부감이 없다는 것.            

              꾸며 말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            

              노르딕 박물관 가서 한 생각
- 노르딕 낭만주의라고 하는 거 좀.. 나 같네..? 나 낭만적인 사람인가..? Spontaneous creativity, feeling over logic, draw feelings from nature
- 노르딕 문화라고 말하는 것들이 되게 나에 대한 설명 같았다 — No-nonsense, Down-to-earth, self-critical and pragmatic




내년 이맘때의 나에게 묻고 싶은 것

              나는 타인을 기쁘게 할 때, 그들을 성공하게 할 때 즐겁다. 어린 사촌동생이 무언가를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정말 충분한 느낌, 내 마음 속에서 뭔가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이 사랑이구나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일터에서는 고객에게서 땡큐레터를 받았을 때 뭔가 물밀듯 솟아오르는 따뜻한 느낌, 이것이 보람이구나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의 행복이 많은 부분이 타인에게 기대어 있을 때 이것을 어떻게 건강하게 지킬 수 있을까? 특히 이 미국식 자본주의라는 것은 누군가의 인정이 없으면 내 자리를 존속할 수가 없는데 여기에서 뿌리를 깊게 내리면서 어떻게 나 자신의 고유함을 지킬 수 있을까?            


              올해 내내 지난 해 삿뽀로에서 새해를 함께 맞이하며 M가 2023년 소감으로 나눈 말을 종종 생각했다. 내가 누군지, 내가 어디로 가는지, 올해는 알 것도 같았다면 내년에는 알게 될 것이라는 말. 사실 이제 정말 좀 알게 된 것 같다. 이 말은 곧 나 스스로에 대해 고정된 정의를 갖게 되어가고 있다는 말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곧 이대로 계속 좁아질 일만 남았다는 것이겠지. 어떻게 하면 나 자신은 잘 아는데 안 좁아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계속 열린 눈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생각해봤을 때 올해 잘 살았다고 생각이 든다..!





작가의 이전글 두 번째 서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