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보수 정통 유대인 동네를 걸으며 한 생각
도미노 파크에서 조금 누워 있다가 집에 돌아가기 위해 걷기 시작했다. 버스가 너무 오지 않아서 천천히 노선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처 없이 윌리엄스버그를 걷는데, 갑자기 하시딕 유대인들 동네가 나타났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간판이 영어가 하나도 없었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도시 안의 도시가 나타났다. 스쿨버스, 광고, 모든 것이 이디시어였다 (히브리어인가? 모르겠음ㅠ). 그리고 아이들이 정말 정말 정말 많았다.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아이를 10명까지도 낳는다는 극보수 정통 유대교의 세상은 이런 걸까 생각했다.
내가 하시딕 유대교에 대해 처음 접한 건 데버라 펠드먼의 자전에세이를 원작으로 만든 넷플릭스 드라마 <그리고 베를린에서>였다. 주인공 에스티가 결혼을 하며 삭발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파르르 떨면서 눈물을 흘리는 한편 목을 꼿꼿하게 세우고 혼란스럽게 미소 지어 보이는 그 표정을 나는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드라마 내용이 전체가 기억나지는 않아도 그 장면 하나만큼은 아주 강렬하게 기억난다. 하시딕 유대인들은 남자들의 독특한 모자와 구레나룻으로 겉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여자들은 아주 정숙한 옷차림을 하고, 삭발을 한 뒤 가발을 쓰거나 스카프를 두른다. 텔레비전, 영화, 인터넷 등 세속 문화를 금하거나 매우 제한적으로 접한다. 여자의 경우 평생 읽을 수 있는 책이 정해져 있다고 한다. 중매결혼이 일반적이며, 매우 젊은 나이에 결혼(보통 남녀 모두 18~21세 사이)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https://www.khan.co.kr/article/202109090955001
아무도 안 물어봤고 모든 종교는 존중받아야 하며 나는 최선을 다해 그들을 존중할 것이지만.. 나는 평생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검은 옷, 털모자, 구레나룻 등은 외관상 경건함의 상징이지만, 그 외형을 갖춘 사람들이 여성의 삶을 규율하고 통제하는 모습은 나를 참을 수없게 불편하게 한다. 공동체 절반인 여성의 성적 욕망도, 창조성도, 지적인 삶도 ‘부차적’이거나 아예 금기로 여기고 한 인간의 전 존재성을 축소하는 일에 나는 어떤 식으로든 중립기어를 박을 수가 없다.
윌리엄스버그는 많은 이들에게 표현의 자유, 정체성의 실험, 반권위적 문화의 상징이다. 그런데 사우스 윌리엄스버그의 하시딤 공동체는 그 반대에 가까운, 신에 의한 규율, 전통의 계승, 공동체 규범 중심의 삶을 살아간다. 이렇게 자유롭고 힙스터들이 가득한 동네 한가운데, 하시딕 유대인들이 자신들만의 도시를 꾸리고 살아간다는 건 정말 아이러닉 하다고 생각했다.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해체하는 브루클린 한복판--인종, 성별, 성적 정체성, 직업, 종교 모든 것이 발산하기만 하는 이곳에서, 오히려 가장 보수적이고 규율에 묶인 복장이 그들만의 질서를 말없이 드러낸다. 이 두 세계는 거의 서로를 보지 않고, 서로를 설명하지 않고, 각자의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거의 완벽히 평행하는 병치이면서도, 이 두 집단 모두 자신의 이상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는 점에서는 의외로 닮아있는 존재들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했다.
공장에서 찍어낸 것 같은 검은 옷을 입고 줄지어 걷는 사람들 사이를, 나는 민소매 차림으로 걷고 있었다. 겉모습만 봐도 “이 사람은 내 공동체의 사람이다”라고 느낀다는 건 어떤 종류의 확신일지 생각했다. 나는 어떻게 봐도 동양인이지만, 그 안에서도 한국, 중국, 일본인은 너무 다르고, 한국계 미국인이냐, 이민 1세대냐, 유학생이냐에 따라 삶의 결은 달라진다. 겉으론 같아 보여도, 우리는 서로를 진짜 이해하려면 반드시 “들여다봐야” 하는 존재들이다. 그냥 겉으로 보기만 해도 서로의 기호를 이해하는 존재라는 걸 즉시 알 수 있다면? 자아와 피아가 아주 명확히 나뉜다면.. 그건 안정감을 줄까?
그런 생각을 하는 한편, 아마도 내가 지금 지나는 이 동네에서 베를린으로 도망쳐야 했을 데버라 펠드먼을 생각하면 내가 보는 것과 그 사람들이 사는 세계가 과연 같을까 자문하게 된다. 아주 평온하게 이 공동체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본인 안에 어떤 지옥이 있을까 생각했다. 남녀 할 것 없이 즐겁게 뛰어놀고 있는 이 수십여 명의 아이들은 나중에 경계에 서게 될까? 저 아이들 중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겉모습을 공유한다고 해서 마음까지 소속된다고 할 수 없다고 말하게 될까?
돌이켜보면 나는 늘 많은 것들의 경계에 선 사람이었다. 일에서도 개인적인 생활에서도. 그래서 다른 사람을 만날 때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면 좋겠다. 너는 어디에 속해 있는 사람이니, 경계에 선 사람이니, 그렇다면 어떤 경계에 서 있니? 나는 한국에서 아무래도 앞으로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한국 인디음악과 미국에서는 도저히 구할 수가 없는 한국문학 신간을 사랑하며 미국에 사는 한국인이란다. 그리고 여기엔 이중의 애틋함이 있다고도 말해주고 싶다. 사랑하지만 머물 수 없는 나라. 거리를 두지만 여전히 닿아 있는 감각. 외부에 있으면서도, 결코 완전히 외부인이 될 수 없는 마음. 경계에 있다는 건 둘 다를 느낄 수 있는 특권이자 고통이다. 너도 혹시 그런 특권과 고통을 갖고 있느냐고 묻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나의 우정과 사랑은 그 대상을 불문하고 늘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저 사람은 어디쯤에 서 있을까? 나처럼 균형을 잡으며 흔들리고 있을까? 그 사람은 어떤 이유로 중심을 떠나, 그 경계에 서게 된 걸까? 혹은 태어날 때부터 경계에 서 있어야 했던 사람이라면, 그걸 어떻게 이겨냈을까? 나는 왜 경계에 선 사람들에게 끌릴까? 그들에게서 나 자신을 보기 때문이겠지? 안과 밖을 동시에 알아야만 하는, 완전한 소속보다 복잡한 진실을 택할 수밖에 없는 사람. ‘정상’이라는 말이 불편하고, 균열 속에서 피어나는 고요를 더 믿는 사람, 그렇지만 정상을 향해 달려가고 싶은 사람. 그 많은 경계와 사람들을 지나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나는 계속 움직이고 있는 중인 것 같다. 어디에 속했다는 느낌을 반드시 얻고야 말고, 그걸 얻으면 꼭, 그다음엔 어디론가 가고 싶어진다. 사람과 공간 안에 속하고 싶은 마음이 절실하지만, 거기에 머무를 수가 없고 늘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진다. 나에게 성장과 변화는 생존에 가까우니까. 근데 결국 어디로 가고 싶은 걸까? 언젠가는 알게 될까? 이질적인 것들의 병치로 가득 찬 뉴욕이니까, 아무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