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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에서 뉴욕으로

이사가는 이유부터 뉴욕 계획까지

by 염전씨

나는 누가 뭐래도 시애틀을 참 좋아한다. 사람들이 하도 노잼도시라고 해서 2024년에는 내가 좋아하는 시애틀의 곳곳을 소개하는 시리즈를 기획했다가 게으름 이슈로 실패했다. 개요 정도를 여기에서 봐주시면.. 감사..

https://brunch.co.kr/@jiwon3889/58


2025년 1월 31일, 3년간의 시애틀 생활을 마무리하고 뉴욕으로 이사를 왔다. 웃기게도, 한국에서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왔을 때보다도 훨씬 더 새출발한다는 느낌이 든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올 때는 온전히 커리어만 생각한 이동이었기 때문에,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시애틀이었다. 그당시만 해도 일만이 내 최우선순위인 인생이었기 때문에, 내가 뭘 좋아하고 필요로 하는지 알지도 못했고 그런걸 고려해야 한다고도 생각 못했다(!). 시애틀에서의 3년을 돌아보면, 직업인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으로서 성장했다고 느낀다. 분노와 억울함을 에너지로 삼아 내가 아닌 무언가가 되고자 분투했던 시간들을 지나서, 그렇게 살지 않아도 살아진다는 걸 배웠다. 마라탕만 먹다가 저염건강식을 먹는 기분이었달까. 유치원 때 생각 의자에 강제로 앉혀진 벽을 본 아이가 된 기분이라는 생각을 종종 했다. 나는 벽을 보고 앉아 ‘외연의 확장을 내다버린 나’라는 알맹이에 대해서 더 생각하지 않으면 안됐다.


시애틀에서 스키도, 카누도, 스탠드업 패들보트도, 등산도, 테니스도 타보고, 레이니어도, 올림픽 내셔널 파크도, 스노퀄미도 가봤다. 근데 벽을 보고 생각의자에 앉은 나는, 자꾸만 도서관에 걸어서 가고 싶고, 가는 길에 카페에 들러 빵을 사고 싶고, 어느 재단이나 학회에서 주관하는 강의 시리즈를 찾아가고 싶고, 글쓰기 모임에 가고 싶고, 스터디를 만들어서 하고 싶었다. 나는 적당한 깊이의 다양한 친구 그룹이 많은게 좋고, 그들과 새로운 동네를 탐험하고 싶고, 되도록 많이 새로운 곳에 가고 싶고, 스트레스를 받는 밤이면 전혀 엉뚱한 동네에 버스를 타고가서 하염없이 걷다가 돌아오고 싶다. 나는 회사에서 사람들과 좋든 나쁘든 부딪히고 싶고, 동료들과 가십하고 싶고, 사람들이 논의한 결과를 전해 듣기 보다는 논의하는 그 현장에 직접 존재하고 싶다. 나는 유유자적하기 보다는 시간을 잘 쪼개서 현명하게 쓰고 싶다. 말하자면 나는 도시에서 혼자 노는 것에 최적화된 사람인 것이다.


이사를 결정한 계기는 남자친구와 이별이었다. 그 연애에서 내가 배운 것은, 내 행복은 내가 찾는 것이라는 것. 그 누구도 나에게 '선물'하거나 가져다줄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 친구의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헤어지기 전에도 내가 혼자 있어야 하는 시간이 길었는데, 시애틀의 이 아름다운 여름날에 내가 혼자서는 이것들을 즐길 수 없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나는 운전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도시에서는 얼마든지 혼자 있을 수 있었지만 왜인지 자연에서는 혼자 있기가 힘들었다. 내가 사는 도시/사회 안에서 나 스스로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힘이 없다면 이 상황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마음을 먹기까지가 시간이 꽤 걸렸는데, 한번 마음을 먹으니 그뒤는 쉬웠다. 빡세게 한 달 정도의 준비 기간을 가진 뒤에 곧장 이사를 했다.


자신을 송두리째 뿌리 뽑아서 새로운 곳으로 이사하면, 그간 내가 가진 줄도 모르게 가져왔던 것들, 나에게 정말로 소중한 것들이 비로소 선명해진다. "네 인생에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니 인생에 가장 필요한 것이 뭐냐"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이 두둥실 떠오른다. 이런.. 어떤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온 인생으로 하게 된다. 앉아서 곰곰히 생각하면 답이 안 나왔다. 두 번의 uprooting 경험을 통해 내 인생이 한 대답은, 우정,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sisterhood 였다. 사랑과 명예와 돈 모두 인생에 중요하지만, sisterhood가 없으면 생존이 안된다. 내 친구들이 내게 기꺼이 나누어준, 내가 쟁취하지 않아도 되었던 따뜻한 마음들이 있어서 나는 이 먼 땅에 와서도 잘 살 수 있었다. 내가 두고 가서 아쉬운 건, 비싸게 주고 산 에스프레소 머신, 1년 밖에 안 쓴 매트리스, 300마일을 채 타지 않은 자동차가 아니라, 작은 쪽지에 적힌 편지, 연말이면 보내주던 작은 엽서, 그냥 잘 있냐고 공연히 물어주던 안부, 귀찮았을텐데 매번 태워주던 정성, 나를 위해 달려와준 날들, 마음을 써서 지은 밥, 나와의 이별을 서운해해주는 것 자체...


시애틀의 마지막 한 달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아주 청명했다
떠나기로 결정하고 나니, 가보지 못한 시애틀의 곳곳이 눈에 밟혔다
시애틀에 처음 왔을 때부터 가장 신기했던, 고속도로 위를 지나가는 가교. 거기를 넘어가면 보이는 언덕 위의 동네들.


뉴욕에 왔을 때 가장 기대되는 것은 별 것 없다.


1. NY Public Library 에 가서 독서모임 하기

2. 퇴근할 때 집 앞 Trader Joes 에서 장보기

3. 다시 토론동아리 같은 거 해보기. 가능하다면 대학캠퍼스에서ㅋ

4. Financial district 에서 투자 스터디 해보기. 그 황금 소 있는 근처여야 함.

5. Toastmaster 가보기

6. 여름이 되면 센트럴파크 가서 돗자리 깔고 매일 누워있기


또 뭐할까요..?! 추천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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