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신천역에서」 산문
봄을 좋아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이 부드러워서 가만히 눈을 감고 서 있었다. 깊숙이 맡았던 풀 내음도 기억한다. 돋아나는 새싹과 꽃봉오리 틈바구니 어딘가. 그 사이에 숨어있는 생의 기운.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순간, 눈을 뜨면 그가 내 앞에 나타났다. 저 멀리 횡단보도에 서 있는 환한 미소를 품은 한 사람. 실루엣만 보아도 얼어붙은 땅이 단숨에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곳으로 걸음을 천천히 옮기기 시작했다. 봄날의 풍경이 아닌 그를 눈에 담으면서.
겨울과 봄 사이, 우리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가을이 되면 타지로 떠날 그를 잠시 붙잡았다. 단순히 나의 호기심으로 시작된 관계였다. 그림을 그리는 그와 글을 쓰는 나 사이의 어떤 교집합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살갗을 파고드는 시린 겨울바람을 잊도록 하는, 더는 외로움의 추위 속에서 발을 구르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었다. 그 속에서 편지를 주고 그림을 받았던 시간은 간지럽고 낯설었다.
계절이 순환하고 봄은 찾아온다. 유일하게 좋아했던 계절은 그 사람을 이곳으로 불러온다. 눈앞에 없는 이를 하염없이 불러온다. 불어오는 바람보다 다정했던, 오랜 시간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주었던 우리는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다. 지난해 봄날, 짧았던 사랑은 끝났다. 이유는 없었다. 이유 없이 떠나간 사람이었다. 그저 짧은 문자 한 통을 남겨둔 채 영영 떠나가 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었다.
그해 봄은 산송장처럼 지냈다. 희망 없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매일같이 새롭게 시작되는 아침이 더는 기대되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멈춰있지만, 세상은 개의치 않고 돌아간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봄바람은 따가웠고 철없이 만개하는 꽃이 미웠다. 늦은 새벽까지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럴 때면 기억을 완전히 지우고 싶었다. 영영 지워버린다면 아프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여전히 여기에 살아 있다고 절박하게 외쳤다. 아무리 외쳐도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닿을 수도 없는 한 사람의 부재를 견뎌야만 했다. 모르는 척 마음을 덮어두고 살아가야 하는 삶의 뻔뻔함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앞에서 온몸으로 저항해야만 했다. 횡단보도에 서 있는 어렴풋한 실루엣을 선명한 이미지로 만들어내기를 반복했다. 스쳐 지나가는, 흩어져 가는 기억을 잡고서 놓아주지 않았다.
봄이 지나고 다시금 겨울이 찾아왔다. 시간은 흘렀지만 공원의 조각들처럼 그 자리 그대로였다. 한 줌의 감정도 내 안에 남아있지 않은 날이 올까. 언젠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지나칠 수 있을까. 그날의 나는 다른 표정을 짓고, 다른 말투로 말하지 않을까. 시간이 흐르자 기억은 희미해져갔다. 눈, 코, 입 중에 어떤 것도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굶주린 채 누군가를 찾아 헤매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지내왔던 지난날. 나는 대체 누구를 찾았던 걸까. 그토록 애타게 찾았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사랑의 실패를 견디지 못했던 괴테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집필했던 것처럼. 몽유병자처럼 무의식적으로 써 내려갔다던 날들. 그것은 갑작스럽게 끝난 사랑의 매듭을 짓기 위한 일종의 제의였다. 일생일대의 고해를 하고 난 후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는 괴테처럼 격렬한 격정에서 구제되기 위함이었다.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빈 종이에 몇 자라도 적기 위해 이곳저곳을 떠돌면서 사람들을 관찰했다. 어디에도 사랑하는 이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종이를 채워갈 수 있었다. 하루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지하철로 향했다. 부스스한 머리칼을 빗지 않은 채 느린 걸음으로 걸었다. 신천역 어느 플랫폼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정장을 입은 남자들, 패딩 속에 몸을 깊숙이 숨긴 학생들,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 다들 어디를 향해 가는 걸까. 맞은편 스크린 도어 사이로 세 사람이 보인다. 짧은 다리로 뒤뚱거리며 걷는 아이를 안는 그녀. 그녀와 잠시 눈이 마주쳤다. 열차를 기다리는 나를 보았다. 옅은 미소를 지은 뒤 다시 남편을 보았다.
남자에게 시선을 돌리는 순간, 숨이 턱 막혀왔다. 오래전 횡단보도 맞은편에 서 있던 실루엣이었다. 잠시 눈을 질끈 감고 서 있었다. 고개를 숙이자 부스스한 머리칼이 피부를 따갑게 닿기 시작했다. 깊숙이 맡았던 풀 내음도, 생의 기운은 어디에도 없다. 눈물이 맺혀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순간, 눈을 뜨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저 멀리 맞은편에 서 있는 환한 미소를 가진 그 사람. 때마침 오는 지하철에 몸을 싣고 떠났다.
蠶室의 행복은 그들과 함께 떠나갔다. 나의 못난 사랑은 그렇게 지나갔다.
텅 빈 역사에는 우두커니 서 있는 나와 하모니카를 부는 신문 파는 아저씨만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