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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선수집가 Mar 10. 2020

산책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공원

최대한 한가하고 무능하게 산책하는 즐거움

프라하에 위치한 어느 공원


어쩌다 산책


피부에 닿는 살랑이는 바람,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풍경이다. 이따금 반복되는 일상에 지칠 때, 복잡한 생각을 정리해야 할 때면 자연스럽게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기곤 했다. 산책이라는 행위는 삐걱거리는 삶 전체에 기름칠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평소에는 집순이 생활을 자처하면서도 포근한 이불과 왓챠플레이를 마다하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어쩌다 산책자의 삶을 선택하게 되었을까? 사실 어떤 목적을 갖고 선택한 건 아니었다. 나에게는 그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줄곧 친구들과 동네 호수공원을 돌았고, 지금은 올림픽대로를 따라 여의도 한강공원까지 놀러 가곤 한다. 시험이 끝나거나 큰일을 치르고 나면 공원으로 달려가는 게 당연했다. 탁 트인 공원을 거닐면서 묵은 삶의 체증을 가라앉혀야 마음이 놓였기 때문일까.


송도, 센트럴파크(Central Park)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자신을 위한 ‘최소한의 약속’이었다는 것이다. 바쁘면 바쁠수록 단 몇 분의 시간조차 허락하는 게 어려웠다.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은 낭비이자 사치라고 다그치기도 했다. 그 속에서 산책은 나를 잃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저항이었다.


어쩌면 생존본능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수북하게 쌓인 일을 미루더라도, 어떤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공원에 갔으니 말이다. 그렇게 단 하루라도 잘 살아있기 위해 공원 산책자의 삶을 살아냈다.



공원 여행을 떠나다


여행의 목적은 다양하다. 누군가에게는 쇼핑이나 맛집,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관광이 주된 목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공원을 여행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당연할지도 모른다. 공원 말고도 보고, 듣고, 즐길 것은 많으니까. 다만,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 중 누군가는 공원을 향해 떠나기도 한다. 놀랍게도 그 사람이 바로 여기에 있다.


2년 전 가을, 처음으로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다. 그때 각 도시의 공원을 방문하면서 도심 속 자연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해 질 무렵까지 잔디밭에 앉아 떠오르는 단상을 적고, 간단하게 싸 온 샌드위치를 먹는 일. 그리고 호수를 둘러싼 벤치에 누워 낮잠을 자고, 하루에도 여러 번 찾아가 생각에 잠기는 일까지. 공원에서는 대단히 일상적인 행위도 그 자체로 비일상이 되었다. 그렇게 공원은 긴 여행의 쉼표가 되어주었다.


파리, 튈르리 정원(Jardin des Tuileries)


그 후로 여행 코스를 짤 때면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공원 하나쯤은 반드시 넣게 되었다. 관광지에 별다른 호기심을 느끼지 못해도 유독 공원에 도착하면 말이 많아졌다. 길을 걷는 내내 “여기 너무 좋다”라며 감탄을 금치 못하기 때문에 일행은 조금 피곤해질 수도 있다. 여행의 피로가 풀리는 동시에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순간은 숙소를 돌아갈 때를 제외하고는 공원이 유일하다.  


조성이 잘 된 공원은 투명한 호수 주변으로 각종 새가 서식한다. 그리고 여유롭게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 분위기에 취해 도심 속 자연을 만끽하곤 한다. 노래를 들으면서 천천히 걷거나 책을 읽어도 좋다. 아니면 삼림욕을 통해 피톤치드를 마셔도 충분하다. 운이 좋다면 버스킹을 구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최대한 천천히 걷기를 권하고 싶다. 어떤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칠지 모르니 말이다.


런던, 하이드 파크(Hyde Park)


시선수집가의 공원 리스트

1. 런던 - 하이드 파크(Hyde Park)
2. 파리 - 튈르리 정원(Jardin des Tuileries)
3. 프라하 - 캄파 파크(Kampa Park)
4. 베를린 - 티어가르텐(Tiergarten)
5. 후쿠오카 - 오호리 코엔(Ohorikoen)
6. 송도 - 센트럴파크(Central Park)



최대한 한가하고 무능해지는 일


공원에서 ‘나’라는 산책자는 한없이 한가하고 무능하다. 커피 한 잔을 들고서 나무 아래에 앉아 공원을 구석구석 살펴본다.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누군가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 정자에 앉아서 바둑을 두는 노인들의 목소리, 젊은 남녀가 맥주를 홀짝이는 소리···. 그 와중에 한 계절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손등에 느리게 닿는 바람이 느껴질 때면 두 눈을 감는다. 그럴 때면 금방이라도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포근함이 느껴진다.


두 발로 걷는 물리적 산책과 마음을 비워내는 정신적 산책. 그 사이를 오가면서 주위를 둘러보고 관찰하게 된다. 그리고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게 된다. 서두를 필요도 없고,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다. 어떤 능력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그저 햇볕을 쬐면서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끼면 된다.


오늘만큼은 잠시 하던 일을 내려놓고 공원 산책자가 되어보는 건 어떨까. 최대한 한가하고 무능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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