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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선수집가 Aug 19. 2020

소설가로서의 이상

이상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중심으로

Ⅰ. 들어가며


이상은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소위 ‘모던 보이’, ‘천재’, ‘광인’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생소’, ‘파격’, ‘실험’이라는 수식어로 불리며 세간의 주목을 받아왔다. 동시에 그는 소설가였다. 전위적이고 해체적인 ‘소설 쓰기’를 통해 한국 현대문학사에 새로운 실험의 장을 열었으며, 당시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내면과 지식인의 절망, 불안, 공포를 소설로 형상화했다. 그리고 전통적인 소설이 갖는 실재와 허구 사이의 엄격한 이분법적 구별 관계를 거부하고, 특정한 이념과 규범에 기대지 않은 채 자신만의 독창적인 시선을 전개해 나가는 데 충실했다. 이를 두고 혹자는 어렵고 난해한 작품이라는 선입견으로 그의 작품을 바라보기도 하고, 한편으로 그 전위성과 실험성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수많은 비평 담론으로부터 논쟁을 야기하고 있다.


김기림이 “그가 죽은 뒤 한국의 현대문학은 반세기나 후퇴했다”[1]라고 지적한 이후로 이상만큼 이목을 받으면서 논의의 대상이 된 작가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1950년대[2]부터 지금까지 쏟아지는 많은 양의 연구자료는 물론이거니와 정신분석학, 수학, 심리학, 문화사회학 등의 분야를 넘나드는 방법론을 통한 작가론과 작품론이 발표되었다. 반면 이상 문학 연구에 있어서 원전의 불확실성, 작품 해석의 자의성 문제, 이상 개인적 삶의 신비화 현상, 장르 구분 문제, 유고의 확정 등의 과제들이 존재하며, 이 문제들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과잉된 해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3] 이처럼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재소환되고 달리 해석되는 이상 문학은 모순과 규정 불가능성이 존재한다. 그 속에서 필자는 이상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중심으로 ‘소설가로서의 이상’을 살펴보고자 했다. 식민지 한복판을 무대로 삼은 그의 삶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불안, 공포, 절망에 대한 치열한 탐구를 벌인 작품 세계를 살펴봄으로써 이상 소설의 현대문학사적 위치를 파악하고, 그 가치와 의의를 모색하고자 한다.



Ⅱ. 이상의 생애 연구


1930년대 모더니즘 시대와 구인회


이상이 태어난 1910년은 경술국치가 발생한 해이자 근대적 도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이후 1937년에 그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경성은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대도시이자 그들의 환상을 실현하기 위한 권력의 실험실이 되었다. 그리하여 식민지와 모더니즘은 이상의 삶과 문학을 해석하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로 자리하게 되었다. 동시에 자본주의의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물질적 차원뿐 아니라 정신적, 문화적 차원에서의 근대화가 진행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일제의 만주 침략, 중일전쟁, 파시즘, 경제 대공황 등과 같은 역사적 사건이 발생했으며, 정치적 상황의 악화로 인해 국내 문단에서는 카프(KAPF)의 해체와 리얼리즘 문학 및 경향주의 문학의 침체, 구인회 결성과 모더니즘의 성장이라는 복잡한 양상의 성장이 일어나고 있었다. 


한편 문학의 자율성 요청과 정치적 현실비판을 내세운 리얼리즘 문학에 대한 반성은 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사조의 도입으로 이어졌다. 특히 소설에서의 모더니즘은 현실 세태와 인간의 내면 심리라는 두 가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근대화된 도시 속에서 한 개인의 분열하는 자아를 표현한 이상의 소설 「날개」는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상이 소속된, 모더니즘을 기반으로 하는 순수문학을 옹호하는 일군의 문인단체 ‘구인회’는 이러한 변화의 선구자였다. 1933년 8월 정지용, 이효석, 김기림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구인회는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조연현은 ‘구인회’의 문학사적 의의를 “시문학파(詩文學派)에서 유도된 순수문학의 흐름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1930년대 이후의 민족문학의 주류를 형성하는 데 이바지했다고 말했다. 또 근대문학의 성격을 현대문학으로 전환시키고 발전시킨 점에서 그 문학사적 가치를 보유한다”[4]라고 지적했다. 그 밖에도 다양한 문예 사조의 수용과 변형, 자본주의에 대한 인식의 심화, 본격적인 장편 소설의 창작 등의 변화가 이루어진 시기였다.



이상의 생애


이상은 1910년 경성에서 출생했다. 1921년 누상동에 있는 신명학교(新明學校)를 거쳐 동광학교(東光學校)에 입학했지만, 중간에 보성고등보통학교에 병합되었다. 1929년에 경성공업고등학교 견축과를 졸업 후, 같은 해에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근무하면서 조선건축회지 『조선과 건축』의 표지도안 현상모집에 1등과 3등으로 당선된 바 있다. 1930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조선』에 첫 장편소설 「십이월 십이 일」의 연재를 시작으로 이때부터 이상은 연달아 소설과 시를 발표했다. 1932년 『조선과 건축』 7월호에 일본어 연작시 「건축무한육면체」를 발표하면서부터 ‘이상’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했으며, 그의 본명은 할아버지가 지어 준 ‘김해경’으로 알려져 있다.


1933년 각혈을 진정시키기 위해 기사의 직을 버리고 황해도 배천(白川) 온천을 찾아갔다. 이후 종로에 다방 ‘제비를 차렸고, 이 무렵부터 김기림, 이태준, 윤태영, 박태원 등이 드나들면서 이상의 문단 교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듬해에 ‘구인회’에 입회했으며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오감도」, 「지주회시」, 「날개」, 「봉별기」 등 다수의 작품을 발표했다. 1936년 6월 변동림과 결혼한 뒤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사후 발표작 소설 「종생기」, 수필 「권태」 등을 썼지만 1937년 사상불온혐의로 구금되었다. 이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어 동경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했으나 그해 4월에 사망했다. 이렇듯 짧지만 강렬한 생애를 살았던 이상은 시, 소설, 수필에 걸쳐 다양한 작품을 발표한 식민지 시대의 대표적인 작가였다.



Ⅲ. 이상 소설의 작품 세계


이상 소설은 1930년대를 풍미하던 자의식 문학의 대표적인 선구자인 동시에 초현실주의 시인으로 일컬어진다. 그의 문학 속 감각의 착란(錯亂)과 상식 밖의 세계는 작품을 어렵고 난해하다는 선입견을 품게끔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작품 속의 모순은 아이러니한 현실에 대한 표현인 동시에 비현실적인 사건의 나열, 현실에 대한 회의에서 끝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소설에서 ‘나’로 등장하는 주인공이 작가 ‘이상’과 동일시되거나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이상의 자전적인 체험과 무관하지 않다. 이상의 개인사가 연상되는 서사적 상황은 그의 작품들이 지극히 사적인 경험을 녹여낸 사소설 또는 자전적 소설로 독해하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많은 연구는 그의 생애를 추척하면서 그를 바탕으로 작품을 해석하고 있다. 


소설 속 등장인물은 대체로 사회 문제에 무감각하고 무신경하게 그려진다. 권태로운 실업자와 허약한 룸펜은 자본주의 교환가치에 민감하지 않거나 능숙하지 못하다.[5] ‘부조화’는 겉으로는 합리적인 것 같으나 그 내부는 부조화가 드러나는 근대의 이중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한편 이상의 전위성을 ‘띄어쓰기 무시’, ‘의식의 흐름’ 혹은 ‘자동기술법’과 같은 전위적인 실천 행위의 동일성에서 발견하려는 시도가 존재한다.[6] 이러한 태도는 내면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명을 가능하도록 했으며, 무의식의 매커니즘을 문학적 세계에 도입하여 그 영토를 확장한 바 있다. 이상의 소설은 전반적으로 불안한 내변 심리와 소외된 이들의 공포와 불안, 그리고 억압된 의식과 현실에서의 좌절된 욕구의 해소를 위해 새로운 세계로 탈출하려는, 초현실주의적인 색채를 드러낸다.




나가며


지금까지 ‘소설가로서의 이상’을 그의 생애와 대표적인 작품 세계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리얼리즘 문학에 대한 반성과 문학의 자율성 요청 등 이전 사조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모더니즘 시대가 도래했던 1930년대였다. 이는 마치 전통적인 사실주의극에 반기를 들었던 부조리극의 출현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신은 죽었다’라는 메시지를 서구인들에게 실감시켰으며, 이성에 의해서든 신앙에 의해서든 수천 년 동안 믿어왔던 유의미한 가치들은 전쟁의 포화 속에서 속에서 증발해버렸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 삶의 바탕이 되어 온 절대가치의 기준을 상실하게 되어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방황하게 되었다.


이러한 20세기 중반은 연극의 격동기였다. 불행한 사태에 가장 민감했던 예술계는 기존 사실주의극의 관습적 형식과 내용에 작별을 고했다. 새로운 전위적인 경향들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실험극이 급증했고, 이미 확립된 연극과 희곡의 형식들은 도전받고 개조되었다. 반사실주의극의 범주 안에 있는 부조리극은 희곡과 연극의 새로운 인식과 정의를 확실하게 끌어냈다. 1930년대에 도래했던 모더니즘 문학과 구인회의 출현은 부조리극의 출현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기존의 낡은 가치와 전통적인 소설 양식에 작별을 고하듯, 제2차 세계대전처럼 식민지 시기에 믿었던 신념이 무너지는 순간을 목격하듯, 당시 한국 사회가 직면한 현실의 위기와 그 위기를 살아 내야만 했던 한 지식인의 절망과 고통이 새로운 사조의 출현과 변화를 끌어낸 것은 아닐까. 한국 현대문학사를 개척한, 현대성을 창조한 그의 실험적 소설은, 불우한 ‘천재’ 혹은 ‘광인’인 이상을 오늘날까지 담론의 수면 위에 머무르게 하는 이유일 것이다. 



참고문헌

[1] 김기림, 「故 이상의 추억」, 『朝光』, 1937.6, 313쪽.

[2] 이상 문학의 연구사에 있어서 1950년대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어령(「이상론」, 서울대 문리대학보, 1955.9)과 임종국(「이상론」, 『고대문화』, 1955.12)이 본격적인 이상 연구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3] 강숙영, 「이상 소설의 미학적 정치성 연구」, 충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9, 6쪽.

[4] 조연현, 『한국현대문학사(韓國現代文學史)』, 성문각, 1980.

[5] 강숙영, 「이상 소설의 미학적 정치성 연구」, 충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9, 7쪽.

[6] 송민호, 「’의식의 흐름’과 ‘자동기술법’ 사이」, 『이상문학회』(13), 2017,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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