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예술청 공동운영단 기획사업 <스페이스 랩: 아직> 2차 공모 선정작
파도 소리와 풍덩 소리가 들린다. 암전.
극장. 한가운데 놓인 마이크 스탠드.
은지가 상수에서 무대 중앙으로 걸어 들어온다.
친애하는 리드릭 보케 박사님께. 박사님 안녕하세요. 한국에 사는 고은지입니다. 지금 이곳은 홍성 서부면 남당리 근처에 있는 작은 바닷가예요. 해변의 화창한 날씨. 잔잔한 파도. 아무도 없는 주변. 그리고 돌멩이가 많네요.
영어로는 Stone Skipping, 한국어로는 물수제비 뜨기라고 읽어요. 물수제비 뜨기. 물수제비는 돌이 가라앉기 전에 얼마나 많이 튀기는지가 중요하잖아요. 그리고 돌이 날아간 거리와 튀긴 정도에 따라 스코어가 달라지고요. 사람들은 흔히 물수제비가 놀이이자 게임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속도를 빠르게 하면 할수록, 팔 힘이 세면 셀수록 좋다고 생각하죠. 물론 자세도 중요하고요. 손목 스냅을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면서 미끄러지듯이 하나, 둘, 셋. 하지만 저는 물수제비가 단순한 게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저에겐 잘 던지는 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못 던져도 돼요. 단, 의식이기 때문에 진지하게 임해야 해요.
박사님께서는 '네이처'에 발표한 '물수제비 성공 비결(Secrets of successful stone-skipping)'이라는 논문에서 돌의 속도와 함께 입사각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입사각이 20도여야 이상적으로 물수제비를 뜰 수 있다고 하셨죠. 반대로 입사각이 45도보다 크면, 중력이 저항력보다 훨씬 커서 한 번도 튕기지 못하고 물속에 가라앉습니다.
박사님 그런데요. 저는 중력은 불행이 끌어당기는 힘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불행이 인간의 저항력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몸부림치다가 결국은 잠식당하게 되는 거라고요. 그렇다면 불행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둥글고 납작한 지름 5cm의 돌을 수면과 20도의 입각도를 유지하면서 초속 2.5cm 이상으로 던져야 하는 건데, 과연 이걸 모두 인간이 컨트롤할 수 있는 부분일까요? 저는 물수제비의 성공 확률은 전적으로 우연에 의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몸이 순간적으로 선택한 힘, 속도, 방향에 따라 던지는 행위가 결정되고, 입사각과 초속은 바로 그때 결정되죠. 그래서 혹독한 정신적, 육체적 트레이닝을 하지 않는 이상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됩니다. 다수의 불행으로 이루어진 돌멩이. 돌멩이가 유체의 경계면과 충돌하면서 생기는 물의 파장. 그 파장은 갑작스러운 불행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 이의 삶이 흔들린 정도와 비슷합니다.
불행이 끌어당기는 힘에 저항할 수 있는 각도. 20도. 가라앉을 수밖에 없는 각도. 45도 이상. 박사님.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기대하고 실망하기를 반복하면서 운 좋게 돌이 던져지기를 바라야만 할까요. 아니면 물에 빠지더라도 그 속에서 버티는 힘을 길러야 할까요. 이만 줄이고 박사님의 답장을 기다리겠습니다.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은지 상수로 퇴장한다.
의자를 들고 오면 이윽고 탑 조명이 서서히 켜진다.
안녕하세요. 저는 고은지입니다. 올해 25살이고요. 연극과 국어국문학을 전공했습니다. 지금부터 저는 불행에 관해서 이야기할 거예요. 이 불행은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겪어보지 않은 일이어서 당황스러울 수도 있어요. 그래도 저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전달해보고 싶어서 이 자리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최근까지 계속 글을 썼는데,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지?” 누군가는 가슴 떨리는 도전을 하고, 살면서 잊지 못할 경험을 하고,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보람을 느끼고, 자신의 한계까지 몰아붙이면서 많은 성취를 이루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느 날인가 글만 쓰고 있는 제가 보잘것없는 거예요. 심지어 제가 좋아서 시작한 글쓰기도 하다 보니까 마감일까지 계속 미루게 되고, 놓치고, 하기 싫어서 막 쓰고. 그런 제가 갑자기 너무 싫어서 어느 날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됐어요. “다시 태어난 것처럼 살아보자.” 근데 어떻게 다시 태어나지? 그때 이런 질문이 떠올랐어요. 내가 살아있었던 경험이 뭐였지? 내가 가장 살아있다고 느꼈던 순간이 언제였지? 생각하다 보니까 남들 앞에서 뭔가를 하고 싶은 거예요. 표현하고 싶고, 어떤 사람인지 얘기할 때 저는 가장 살아있다고 느끼는데. 글을 쓸 때는 그렇지 않았던 거 같아요.
그래서 어느 날인가 결심을 합니다. 한 학기가 끝났던 2020년 7월. 저는 회사에 들어가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안산에서 서울로 출퇴근을 하면서 돈을 벌었고, 아이엘츠 학원에 다니면서 유학 준비를 하기 시작합니다. 거기에다가 유학을 하러 가려면 돈이 되게 많이 들잖아요. 근데 돈이 부족한 거예요. 회사 하나만 다니기에. 그래서 주말에 GS25를 하나 다니다가 또 다음 달에 CU를 하나 더 다닙니다. 쓰리잡을 하면서 돈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예를 들어 일을 하다가 4,500원짜리 도시락을 먹고 싶은데 돈을 모아야 하잖아요. 그 4,500원짜리를 먹기가 좀 그래서 제가 선택한 건 1,200원짜리 삼각김밥 아니면 1,300원짜리 초콜릿 와플. 이런 식으로 돈을 아끼고 아끼면서 결국 1,200만 원을 모았습니다.
저는 제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돈을 벌자마자 모두 모았고, 한 푼도 쓰지 않았고, 제가 쓴 돈이라고는 연말에 가족들이랑 먹을 새조개를 10만 원어치를 시켰던 게 전부였어요. 그만큼 희망을 품고 독하게 돈을 모았어요. 그런데 좀 안 풀리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전화 한 통이 걸려왔거든요. 그 전화 한 통 이후로 제가 모았던 돈을 홀랑 다 날려버리고 말았습니다. 다 잃어서 돈이 없는 거예요. 더 큰 문제는 이곳 청년예술청에서 받은 프로젝트 지원금까지 다 날려버렸어요.
지금까지 일하면서 겪었던 크고 작은 사건들. “우리 집에 갈래?”라고 말했던 어떤 아저씨의 성희롱, 스토킹, 그리고 “모든 건 네 탓”이라며 일을 그만두지 못하게 했던 편의점 사장님의 갑질은 큰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너무 큰 불행이 갑자기 찾아오다 보니까. 우연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인과관계가 불분명하잖아요.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고, 받았을 뿐인데 그걸로 인해서 반년 동안 모은 돈을 잃었다는 게. 그렇다고 그저 우연일 수도 있지 않겠냐고 하기에는 저에게 너무 많은 불행이 한 번에 찾아왔던 거 같아요. 그래서 사실 이 프로젝트도 그만두려고 했습니다. 제가 웬만하면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 아닌데, 그 일을 겪고 나서는 뭔가를 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당장 엄청난 기회를 잃더라도 나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프로젝트를 포기하려다 또 여러 사정이 있어서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거예요. 저는 항상 그랬거든요. 고통스러운 일이 다가올 때마다, 예를 들면 남자친구한테 차여서 이별의 슬픔에 너무 아파한다거나 지금처럼 사기를 당해서 돈을 잃어버린다거나. 저를 슬프게 하는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날 때마다 어떻게 이겨내야 할지 잘 몰랐어요. 그냥 고통스러워만 하다가 시간이 흘러갔던 경우가 정말 많았죠. 그런데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어요. 여러분을 초대해서 이 공연을 해야 했고, 저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했기 때문에. 쉽게 말해서 어른이 되어야 했던 겁니다. 사적인 감정은 잠시 미뤄두고, 좀 슬프더라도 해야 하는 일을 해야 했어요.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밥 먹듯이 했습니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어쩌면 지금까지도. 그래서 고민한 끝에 떠나게 됩니다. 홍성에 있는 작은 바닷가 마을로.
주머니에서 돌멩이 하나를 꺼낸다.
의자 앞에 위치한 돌탑에 돌멩이를 올려 둔다.
암전.
은지 객석 가운데 놓인 의자에 앉는다.
돌에 적힌 텍스트를 하나씩 낭독한 뒤 돌탑에 던진다.
반말, 노동착취, 값싼 노동력, 열정페이, 김밥천국, 월세, 경력, 쉬고 싶다, 워라밸, 라떼는, 진보 꼰대, 타박상, 드라이브, 약속, 와인한잔, 피해자, 고백, 언니, 통화, tree, Y, nail, 가라앉은 퇴적암, 날카로운 용암, 지저분한 모래알, 투명한 기념비, 소용돌이치는 완두콩, 바람요정의 부스럼, 까마득한 성벽, 튼튼한 유리구슬, 쓸모 없는 보석, 살짝 긁힌 손톱, 뜨거운 석탄을 손에 쥐고 있는 것, 마녀사냥과 우둔한 머저리들, ㄱㅎㄱㅈㄷ, 무의식 중 우위를 매기는 것, the others, 과거의 똥차들, 막막함, J들, 평가질, 욕심, 조바심, 누구의 마음도 다치지 않고 건강도 상하지 않고 잘 마무리될 수 있게 해주세요, 남은 시간만이라도 상식초월 막장 행위가 최대한 낮은 수위로 일어나게 해주세요, 사람은 누구나 죽어 그러니까 너무 슬퍼하지 마, 하차하고 혼자 한국에 남겨져서 밤새 잉여처럼 보냈던 2주,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대표님의 눈, 십몇 년 만에 친가 쪽 사촌오빠들을 만났던 날, 저런 상태로 살고 싶을까, 동창회에서 만난 그 애한테 미련 남은 것처럼 굴었던 거, 토플 성적표 은행 분쇄기에 갈아버린 거, 당신에게로, 스물여섯, 지금을 살지 못하는 나, 냉정과 열정 사이, 피노키오, 12, 아빠, 취업, 영어, 갈림길, 잡생각, 부족한 잠, 엄마, 워홀, 그리움, 마스크, satisfaction, ㅂㅇㅎㅇㅇㅇㅈ, ㅍㅈ, 차가웠던 옥상, 더럽혀진 무릎이었을까, 나는 창피하면 거짓말을 하기도 해 하지만 거짓말은 또 거짓말을 낳고, 모든 게 그대로였는데 모질게 돌아선 이, 가라앉은 배, 고루 갖춘 사람 옆에 손톱을 보지 않고 머리를 만지지 않고 서 있는 일, 의미가 없는데 의미 부여, 화가 난 남자들, 어렸을 때 부모님은 왜 내 앞에서 싸웠을까? 난 그때 너무 무서웠는데, 같은 앉을 사람이 없었던 버스 안, 가치관 차이, 어느 날 갑자기 오래된 동네 태권도 학원이 없어지듯, 영원한 건 없다 자신을 믿기, 지나가는 개미조차 가십거리를 쑥덕대고, 터진 타이어를 끌어가는 것에 대해, 치부를 안주 삼는 이들, 깨진 기억은 떠오를 때마다 날카롭고, 말라버린 꽃잎을 보며 이젠 더 이상 나지 않는 향기가 피어오르는 것만 같은 착각 속에, 모르는 척해주세요, 가식을 알아채고 진심에 감사하는 법, 2001, 빈틈, 18, knife, 고3, tears, 이별, 죽음, eternity, 건강, 보이스피싱, 1,200만 원, 쓰리잡, 2020년 7월, 성희롱, 스토킹, 첫사랑, 우울증, 배신감, 순진함, 취중고백, 오사카 오코노미야키 가게, 지나간 연기, 종종 숨어버리는 것, 종종 사랑하지 못하는 것, 종종 믿지 못하는 것, 선생님, 종종 용기 내지 못하는 것, 눈초리, 부족함, 평생 그렇다면, 취업, 기림이, 1학년과 2학년, 사촌, 게으름, 허영심, 주공아파트, 다리, 피해자였음에도 했던 사과들과 하지 못한 사과들.
암전.
스크린에 <물수제비 의식> 영상이 나온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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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청년예술청 공동운영단 기획사업 <스페이스 랩: 아직> 2차 공모 선정작으로 서울문화재단 청년예술청이 지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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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예술청 SAPY
Seoul Artists' Platform_New&Yo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