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선수집가 Mar 13. 2022

서툴지만 고유했던 나의 궤적들

다시 태어날 필요 없는 삶에 대하여


한동안 목 끝까지 차오르는 울음을 삼키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일이었는지 따져 묻기 시작한다면 도망칠 구석이 없어질 거라고. 내일을 살아갈 용기조차 사라질 거라고. 마음을 가다듬고 지금, 여기에 일어나는 일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끊임없이 연습해야만 했다. 서두르지 않아야 했다. 그래야만 다음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나의 이십 대는 여러모로 방황의 연속이었다. 가슴 떨리는 일을 발견하고 나면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드는, 조금은 급한 성미를 가진 탓에 자주 넘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스무 살 초반에는 가진 돈 한 푼 없이 배낭여행을 떠나겠다고 선언한 적 있었다. 오롯이 내 힘으로 떠나겠다고 큰소리쳐놓고 5개월 동안 공장에 들어가 주야간 교대로 일했다. 그렇게 모아본 적도, 가져본 적도 없는 1,400만 원이라는 큰돈을 손에 거머쥐고 여태껏 본 적 없는 세상을 눈에 담기 위해 떠났다.


다시 태어나기 위한 물수제비 의식


또 작년에는 유학을 떠나겠다며 반년 동안 쓰리잡을 했다. 인턴십과 편의점 두어 개를 번갈아 다니던 와중에 시간을 쪼개어 준비했던 지원사업에 운 좋게 당선되었다. 난생처음 퍼포먼스를 창작할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스무 살 초반 때처럼 유학 자금과 지원금을 포함하여 1,400여만 원을 모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사기를 당해 돈을 한순간에 날려버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가만히 넋 놓고 있기에는 당장 책임져야 할 일들이 많았다. 구상해왔던 아이디어는 와닿지 않았다. 그저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는데, 무턱대고 기도하며 신에게 구원을 바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다시 태어나는 방법으로 의식을 선택했다. 바다로 가서 불행한 기억을 모두 버리고 오자고. 당장 효과가 없을 수도 있지만, 의식이라고 믿고 행하는 것만으로도 잠깐이나마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조금 유치하기도 한, 그러나 그 무엇보다 간절했던 믿음을 주변 동료들에게 알린 뒤 도움을 구했고,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작품은 무사히 관객들과 만날 수 있었다.



수면 아래로 깊이 빠지지 않도록


이후 반년 정도는 회복을 위해 쉬었다. 그러다가 작년 여름, 절친한 동료의 작품에 프로듀서로 참여하게 되었다. 새로운 시작을 꿈꾸며 어느 때보다 맡은 일을 열심히 수행했고, 프로덕션의 구성원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로부터 활기를 얻었다. 하지만 무사히 끝난 것도 잠시 작품에 배우로 참여했던 한 남성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전후 사정을 상세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 사건 이후로 어렵게 쌓아 올렸던 일상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한동안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던 것만 기억난다. 당시에는 괜찮다고 합리화하지 않으면   없을  같아서 애써 괜찮은 척도 해봤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태는  좋아졌고, 결국  상담센터의 지원을 받아 정신과 트라우마 치료와 심리 상담, 우울증  복용과 변호사 선임까지 하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소송은 진행 중이다.


다행스럽게도 나를 믿어주고 지지해주는 가족, 친구들, 의사, 상담 선생님, 변호사님 덕분에 이 과정을 잘 견뎌낼 수 있었다. 혼자만 챙기기도 벅찼기 때문에 오랜 시간 숨은 듯이 지냈지만, 어떤 식으로든 안부를 묻고 밖으로 불러주었던 사람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가령 한 친구는 매일 아침 전화로 모닝콜을 해주었다. 씻고 일어나서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수도꼭지를 트는 소리를 들려달라고 했다. 그런 수고를 몇 달 동안 마다하지 않았다. 다른 친구는 내 이야기를 듣는 내내 눈물을 훔쳤고, 별다른 위로를 건네지 않은 채 함께 시간을 보내는 방식을 택해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이 일에 있어서 한치의 부끄러움도 없고 떳떳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다시 태어날 필요 없는 삶에 대하여


‘외상 후 성장’이라는 말이 있다. 신체적인 손상 또는 생명에 대한 불안 등 정신적 충격을 수반하는 사고를 겪은 후 심적 외상을 받은 뒤, 회복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회복 상태뿐만 아니라 이를 통한 긍정적 변형을 가리킨다. 상담 초기에 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외상 후 성장'을 언급하면서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례도 있다고 말씀해 주셨다. 당시에는 현실성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최근 병원에 내원했을 때 의사 선생님은 나의 근황을 묻더니 멋지다는 말을 건네주셨다. 결과적으로 많은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왔고 나의 일상은 굳건히 자리를 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나의 서사를 다음 챕터로 넘기고자 한다. 다시 태어난다기보다 해묵은 기억을 묻어둔 채 다음으로 넘어가고 싶다.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있다면 누구를 택하겠는가. 누군가가 나에게 묻는다면 주저 없이 답할 수 있다. 지금의 내가 어떤 때보다 마음에 든다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궤적을 그리며 앞으로 달려가고 있다고. 그러니 어디를 향해가는지 다정한 눈길로 지켜봐 달라고.


시간이 흐르면 ‘좋은 혹은 나쁜’ 같은 수식어는 사라진 채 경험만이 남는다. 절대로 두 번 겪을 필요는 없지만, 어쨌든 겪었다면 그 이후에 어떻게 대처하는지에 따라 달리 기억될 수 있다는 걸 배웠다. 다양한 경험을 겪을수록 나는 점차 단단해지고 넓어져 간다. 더욱 고유한 내가 되어간다. 그리하여 나는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또다시 마음이 복잡해질 때면 일단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기로 했다. 서툴지만 고유했던 나의 궤적을 멋지게 봐주기로 했다.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현실에 발붙여 꿋꿋이 살 수 있도록.


매거진의 이전글 PTSD와 회복탄력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