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음색, 톤이 중요하다는 얘기를 정말 많이 듣습니다(정작 미국에서 유학할 당시에는 그냥 사운드라고 했던 것 같긴 합니다만). 당연한 얘기입니다, 끝.
하지만 그 당연한 이야기가 오가는 상황에서 불편한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좋은 사운드, 좋은 톤이 어떤 정형화된 한두 가지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이들과 이야기를 할 때입니다. 기타 사운드는 이래야 하고, 베이스는, 드럼은.... 끝도 없이 각자의 머릿속에 있는 이상적인 사운드를 말합니다. 그러면서 어떤 소리가 최고이고, 다른 소리는 별로라고 선을 긋습니다.
저는 절대적으로 좋은 한두 가지의 음색이 있다고 믿기보다는, 좋은 소리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소리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계발된 그 사람만의 소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음색을 잘 알아듣는 귀를 가진 사람이 악기에서 소리를 끌어내는 메커니즘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기술적으로 잘 훈련하여 머릿속에서 상상한 소리를 꺼내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소리를 가진 사람은 악기가 바뀌고 녹음 환경이 변해도 그 사람임을 음색만으로 명확하게 말해줍니다.
음색은 한 연주자를 그 사람이게 하는 가장 개성적인 요소 중에 하나입니다. 상황에 따라 그 연주자의 개성이 드러나기를 원하는 때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당연한 얘기이지만, 솔로 주자와 섹션 연주자는 여러모로 다른 접근을 하게 됩니다. 최근 몇 년간 가요 세션을 통해 꾸준히 같이 연주하게 된 현악기 주자들과 이야기하다가 나온 얘긴데, 시향에서 혹은 뮤지컬 피트에서 연주할 때에는 자신의 소리가 절대로 튀지 않아야 하는데, 여기에서는 마치 솔로주자처럼 앞으로 소리를 끌어내라고 해서 적응하는 데 쉽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탱고 스타일이 더해진 음악이어서 더 그렇기도 했습니다.
가끔씩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음색조차 뛰어난 연주로 설득해 내듯이 받아들이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조니 미첼의 뒤에서 자코 파스토리우스가 연주한 음악을 들을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 내 취향에 맞지 않는 음색을 가지면 일단 탈락,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각자의 음색이 다르고, 듣는 이는 또 각자 선호하는 음색이 있게 마련입니다. 칙 코리아의 경쾌하고 단단한 음색을 좋아할 수도 있고, 뗄로니어스 몽크의 둔탁하고 거친 음색을 좋아할 수도 있습니다. 키쓰 자렛처럼 예민하면서도 밝은 소리를 좋아할 수도 있고, 허비 행콕의 섬세하면서도 두꺼운 톤을 좋아할 수도 있으니까요.
저는 찰리 헤이든의 소리를 무척 좋아하지만, 한편으로 게리 피콕의 소리 역시 좋아합니다. 래리 그레나디어도, 존 패티투치도 각각 전혀 다른 소리를 내지만 역시나 좋아합니다. 비교적 최근에 듣게 된 연주자들 중에는 토마스 모건과 홀헤이 로더의 소리도 정말 좋았습니다.
하지만 에디 고메즈의 소리는 딱히 좋아하지 않습니다. 픽업을 쓰기 시작한 이후의 론 카터의 소리 역시 듣기에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둘의 음색이 아주 개성적이며, 잘 계발된 소리라는 것을 부정한다면 오히려 제가 바보처럼 보일 겁니다. 그들이 연주하는 음표와 그 음표가 엮여 만들어진 프레이즈, 그 프레이즈를 노래하는 리듬감... 이 모든 것이 그들의 음색에 얹혀 노래로 세상에 던져집니다.
에디 고메즈의 음색이 거슬려서 한동안 듣기 힘들었던 빌 에반스의 음반들이 있습니다. 그중에는 <You Must Believe In Spring>도 있습니다. 어쩐 일인지, 어린 시절에는 듣기 힘들던 그 음악이 이제는 아름답게 들려옵니다. 에디 고메즈의 음색은 여전히 제가 선호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다른 감동적인 요소로 가득한 음악이니까요. 음악에는 여러 감상의 층위가 존재하는데, 지난 삼십 년 정도를 재즈와 함께 보내면서 조금은 더 잘 들어낼 수 있게 된 모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색 하나로 듣는 이를 turn off 시켜버릴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역시나 톤이 제일 중요한 건가 싶기도 합니다. 중요한 건 역시나 나는 그만큼 잘 계발된 개성적인 소리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거겠죠. 남들에 대해 가타부타하는 것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