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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은창 Feb 01. 2024

문체를 갖는다는 것



  처음 글을 쓰려고 낑낑대던 무렵, 그다지 가깝지 않은 지인이 에쿠니 가오리의 문체와 비슷하다고 했었다. 정작 나는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이라고는 한 권 밖에 읽지 않았어서 무슨 얘기지 하면서 다시 읽어보았는데, 신기하게도 제법 닮은 느낌이 많이 있었다. 그저 어디에선가 글을 짧게 쓰라는 얘기를 읽고는 책임지지 못할 긴 문장을 쓰는 대신 툭툭 끊어지는 짧은 문장으로 쓰는 것에만 신경을 쓰는 시절이었다. 단문 중심으로 써 내려간다는 것 말고 또 어떤 공통점이 더 있는지 생각해 보다가 어느새 기억에서 잊혔던 일이다.


  번역을 거친 작가의 문장이 어떤 문체를 가진다는 건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번역가의 스타일이 덧입혀진 후에도 명확하게 살아남은 스타일이란 얼마나 생명력이 강한 것인가. 하루키와 같은 유명 작가의 경우에는 번역본이 발매되는 출판사도 여럿이었다. 문학사상사와 문학동네가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책장을 훑어보니 열림원, 한영출판, 비채, 백암, 자유문화사, 현대문학, 까치.... 워낙 다작을 하는 데다가 인기가 많아 책이 완성되는 족족 번역본이 나오는 모양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번역을 맡은 이도 여럿이다. 심지어 역자 이름 뒤에 몇 명의 노력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한 권의 소설 안에 이루카 호텔과 돌핀 호텔이 뒤섞여 나오는 걸 보고 얼마간 심증을 굳힌 일이다. 그럼에도 하루키가 가진 문체의 특징이 감지된다.

   하루키는 자신의 스타일을 확립하기 위해 일본어 특유의 표현법은 죄다 버리려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일단 영어로 글을 썼는데, 당연하게도 사용할 수 있는 어휘가 제한되고 문장은 간단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다음 그 문장을 다시 일본어로 번역하듯이 썼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심플한 문장을 쌓아 심플하지 않은 세계를 그린다고 하는 그의 스타일을 찾아낸 것이다.

  최근의 줌파 라히리도 비슷한 실험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익숙한 언어인 영어를 내려놓고 굳이 외국어인 이태리어로 글을 쓰는 것을 한동안 지속하고 있다. 왠지 모르게 속도감이 좀 떨어지는 것도 같고 표현에도 얼마간 제약이 느껴진다. <축복받은 집>이나 <저지대>를 읽을 때 너무도 자연스럽게 읽히던 것에 살짝 답답한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그녀의 글임을 의심할 만큼 다르게 읽히지는 않는다. 그녀가 외국어인 이태리어로 어떤 이야기를 상상해 낸 것을 누군가는 우리말로 번역해 냈다. 그렇게 두어 차례 복잡한 과정을 거친 글에서 어디까지가 순수한 그녀의 문체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영어를 번역한 글에서 느껴지던 호흡이 제법 많이 살아있다.


  조금 더 특이한 시도를 하는 작가들도 있다. 마찬가지로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실험을 해 보다가 도달한 결론일 것이다. 한참 전,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은 적이 있다. 모리스 라벨의 곡 제목을 가져다 썼다는 이유만으로 관심을 가졌던 책이다. 그 곡을 소중하게 기억하는 작가라면 뭔가 나와도 공감대가 있겠지, 하는 생각이 무의식 뒤편에 있었을 것이다. 그 책에서 그는 시종일관 마침표를 찍지 않은 문장 한가운데에서 문단을 나눠버렸다. 주어와 술어가 존재하는 문장을 만들고 마침표를 찍는다, 그리고 문장과 문장을 몇 개 엮어 하나의 문단을 구성한다, 문단이 바뀔 때 줄을 바꾸고 다음 문단의 시작은 들여 쓰기를 한다, 하는 법칙은 초등학교 때 원고지 쓰기를 통해 배웠던 지식이다. 하지만 그의 글에서 분명히 문단과 문단 사이에는 한 줄의 공백이 새겨져 있었지만, 주어와 술어는 아직 이어져 있는 상태였고 마침표도 찍혀있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제법 충격적이라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 작가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일단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읽어가는 호흡이 불안정하게 뒤흔들린다.

  테드 창의 <네 인생의 이야기>를 읽을 때면 너는, 너는, 하고 이어지는 2인칭을 향한 서술에 깜짝 놀랐다. 제목대로 '너'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너'는 화자의 딸이다. 그녀는 이십 대 중반의 어린 나이에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화자는 외계 생물체 헵타포드와의 언어 체계를 연구하다가 그들의 언어가 가지고 있는 시간의 개념이 인간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헵타포드의 세계에서는 선형적인 흐름을 가진 시간을 전제로 한 언어가 아닌, 순환적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 전혀 다른 시간 개념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그들의 언어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었다. 소설도 뒤죽박죽인 순서로 '너'의 일생을 보여준다. 스토리만으로도 제법 정신이 없는데, 누군가가 '너'라고 말하는 것을 읽으며 그게 내가 아닌 제삼자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특이한 경험이었다.

   모두가 충격적인 스타일을 가질 필요는 없다. 모든 이들이 하는 대로 마침표가 찍히는 문장 몇 개를 모아 문단을 구성하고, 문단과 문단을 쌓아 글을 완성해 가도 괜찮다. 그 안에서 자신도 모르게 뚫고 나오는 문체가 있을 테니까. 결국 중요한 건 명확한 자신의 문체를 갖는 것, 문장 뒤에 담긴 내면의 이야기가 가진 무게, 그리고 그 이야기를 얼마나 솜씨 있게 표현하는가 하는 것이다. 제아무리 문장의 한가운데에서 줄을 바꾼다고 해도, 그것이 놀라운 경험인 것은 첫 페이지일 뿐이다. 그 놀라움이 지나가고 난 뒤에는 역시나 본질의 무게가 중요하다.


  그것에 비하면 음악은, 특히 기악 음악은 각자 가진 모국어의 장벽을 건너뛰고는 듣는 이에게 성큼 다가선다. 물론 각자 자라고 살아온 문화권의 영향아래 각자의 취향과 선호가 형성되기 마련이니 온전히 자유롭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한 옥타브를 열두 개가 아닌 스물네 개로 쪼갠 미세한 음정 위에 쌓인 인도 음악이 과연 인도 문화권의 사람들과 타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동일한 감정으로 전달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20세기 초만 해도 미국 남부의 아프리카계 흑인의 블루스를 처음 들은 타지 사람들은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초기 재즈의 싱코페이션을 들은 점잖은 백인 어른들은 이렇게 마음이 어지러워지는 걸 보니 악마의 음악임에 틀림없다고, 우리의 젊은이들이 재즈를 듣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었으니까. 그렇지만 현대에 이르러 전 세계에서 비슷비슷한 교육을 받고 비슷비슷한 문화를 누리며 성장하는 요즘은 다르다. 그야말로 음악은 만국 공통의 언어가 되어 세계 각지의 사람들에게 공감을 사고 있다. 굳이 진부하게 K-pop 얘기를 꺼내지 않아도 말이다. 하지만 가사가 음악의 절반 너머를 차지하는 조니 미첼의 노래를 들으면서는 내가 영어를 좀 더 잘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긴 한다. 그랬다면 밥 딜런의 노래도 더 잘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진지한 재즈 뮤지션이 솔로를 연습하다 보면, 이게 무슨 행위인가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즉흥 연주를 연습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하면서 말이다. 진정한 즉흥 따위는 없고 그저 연습한 것의 조합으로 그 순간에 그럴듯한 흐름을 만들어가는 것뿐이다, 하는 식으로. 조금 더 폭이 넓어지고 조금 더 능숙해지는 것, 그것을 위해 평생 도를 닦듯 수련을 지속한다. 하지만 그렇게 솔로의 내용이 성장해 가면 대체로 추상의 정도가 높아진다. 주어진 코드 진행의 바닥에 깔린 소리를 정확하게 내는 것에서 점점 그 위에 다른 화성을 쌓아 입체감을 만들어내려 애쓰게 된다. 재즈의 역사를 살펴보면 꾸준히 그 방향으로 즉흥연주가 발전해 왔다. 그리고 그건 개인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당연히도 청중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어려운 단어를 모두 내려놓고, 글 쓰는 이 특유의 멋들어진 어투를 피해 가며 아주 평범한 일상의 언어로 글을 쓴 몇몇의 작가를 기억하는 것은 재즈 연주자가 중심을 잡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쉬운 단어와 짧은 문장으로도 문체는 형성되며, 그건 번역을 거치고도 생생히 살아남을 만큼 명확한 정체성이 된다는 것, 결국은 좋은 문장을 쌓아 이루어낸 이야기 전체가 중요하다는 것 말이다. 평생 그 누구도 연주하지 않은 프레이즈나 대리코드를 찾아다닐 수도 있겠지만, 어느 시점에는 내 안에 어떤 이야기가 있으며 나는 그걸 어떻게 풀어내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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