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중, On The Road
올해로 내 덕질 햇수도 17년을 넘어섰다. 18년이 되어가는 세월 속엔 18년이라는 시간 만큼이나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우리가 언급할 수 있는 일들은 일어난 일들에 비해 현저히 적었다. 당사자는 물론 팬들조차 오프더레코드로만 나눌 수 있었던 이야기들, 그래서 서로는 절대로 나눌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각자의 가슴 깊은 곳에 품은 채 말이 아닌 눈빛으로 말을 건네고 서로를 헤아려 왔다.
그렇게 2021년 여름이 되었고, 이 영화를 통해서 그동안 자신에게 일어난 많은 일들을 직접 이야기하는 김재중의 얼굴을 드디어 볼 수 있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인생에 일어난 주요한 사건들을 꼽아보았다. '일생일대의 사건'이라고 칭한 그 사건들 중 하나는 '동방신기 해체' 김재중의 목소리로 '동방신기 해체'라는 말을 듣자마자 마음이 일렁였다. 처음이었다. 남들은 2009년부터 쉽게만 내뱉던 말인데, 해체가 아니라고 믿고 싶었을 때도 모두 그렇게 쉽게 사용했던 '해체'라는 단어를 그의 입으로 들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상하게 후련하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 그 말을 스스로 입 밖으로 내고, 관련된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그의 표정은 참 생경했다. 그렇게 오래 봤어도 그의 어둡고 낮은 감정들은 낯설기만 하다. 그 당시에는 다른 멤버가 가지고 있었을 생각이나 고민들에 대해 말할 수 있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절대로 그런 것들에 대해 본인의 입으로 이야기할 수 없다고 말하는 김재중을 보며 너무 많은 순간들이 기억나 속상했다. 잊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김재중은 늘 내가 생각하는 것 만큼, 혹은 그보다 더 큰 어른이었다.
그동안 공개적으로 원망을 하려면 수 없이 원망할 수 있었을 시간이 있었는데 단 한번도 원망하지 않았다. 연락이 오지 않았다는 거짓말에 힘겹게 남겼던 트위터 글이나, 힘들게 만나러 갔는데 만나주지 않았다는 씁쓸한 이야기들이 그가 두 명의 멤버에 대해 털어놓은 이야기의 전부였다. 심지어 후자는 그 이야기를 들은 타인이 안타까움에 대신 전해준 이야기였지. 그저 남 탓 하며 욕 하면 편했을 텐데, 그러지 못해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디고 지금의 김재중이 되었을지 생각하면 까마득할 정도다. '그러지 못해'라고 말 하는 게 미안할 정도로 그는 스스로 남 탓을 하지 않으려고 필사의 노력을 기울인 사람이기에 '그러지 않았'다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남 탓 하지 말자
그가 가슴에 문신을 하고 나타났을 때 'Always keep the faith'라는 문구에만 모든 관심이 쏠려 그 아래에 있는 문장은 깊게 들여다보질 못했다. 그러다 어느날 그게 '남 탓 하지 말자'를 의미하는 문장이란 걸 알았을 때의 심정은 단순히 그가 너무 멋있어서 감탄하게 되는 것 이상의 경외와 비슷했다. 동시에 심장에서 쿵 소리가 들리기도 했지. 저 사람이 지닌 삶의 무게가 너무도 크게 다가왔기 때문에. 우리가 보기엔 전부 다른 사람 때문에 벌어진 일들 때문에 고통 받아온 시간이 몇 년인데, 그 몇 년 동안 그는 '남 탓 하지 말자'라는 좌우명을 되새기며 그 시간들을 버텼을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그가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던 게 그 덕분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가 매일 어제보다 큰 어른이 되어가던 시간 동안 그가 홀로 이고 지고 있었을 무게가 내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컸을 거란 것도 동시에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멤버들을 원망하지 않았던 그에게, 팬들은 참 잔인했다. 개인팬부터 5명의 동방신기를 기다리거나 5명의 멤버들을 모두 응원하는 팬들까지, 참 복잡하고 다양한 팬들은 김재중에게는 늘 과한 기대를 걸고 무리한 요구를 했다. 물론 그 복잡한 팬덤은 김재중에게 큰 사랑과 힘을 주었지만 나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단 것을 너무 잘 안다. 이 역시 잊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내가 속해 있는 집단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는 사실을 견디기 힘들었던 만큼, 딱 그만큼 망각도 어려웠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들이 가슴에 더 아프게 박혔을지도 모른다. 지금 저 착잡한 표정으로 아픈 이야기를 전하는 그에게 우린 어떤 위로를 전했는지 떠올려보려 해도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위로가 되긴 했을까. 기나긴 상실의 과정을 건너온 그에게 우린 늘 상실을 더 빨리 인정하고 잊을 것만을 강요했던 것 같다. 무엇이 자신에게 가장 득이 되는 길인지 그가 알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하며 하루라도 더 빠르게 혼자가 되기를 재촉하는 사람들처럼. 그러지 않았던 사람들은 그가 이 상실의 다리를 영영 건너가버릴까봐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었고 말이다.
그동안은 그가 그 과정을 잘 견디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응원하고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고 생각했고 그게 옳다고 믿었다. 때문에 지금 김재중이 겪고 있을 갈등과 고민에 대해서는 따뜻한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한 채 지켜만 봐왔는데, 홀로 모든 걸 견디고 버텨낸 후 그래도 남 탓 하면 안 된다며 큰 숨을 몰아 쉬는 그를 보며 뼈저린 후회가 몰려왔다. 그냥 DM이라도 보낼 걸. 편지에라도 적어줄 걸. 긴 말은 하지 못하더라도, '많이 힘들죠?' '힘든 거 알아요'라는 알맹이 없는 말이라도 건넸다면 분명 힘들었을 그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을 텐데. 말을 아낄 수밖에 없어서 너무 많은 말을 아껴온 과거가 참으로 후회스러웠다.
나를 가장 아프게 했던 장면은 최근 작곡을 쉰 이유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었다. 전역 후 자작곡을 발표하지 않는 이유가 늘 궁금했고 자작곡이 없어 내심 아쉽기도 했는데, 그는 또 그 마음을 읽은 것처럼 그동안 팬들에게도 털어놓지 않았었다며 작곡을 쉰 이유를 밝혔다. 곡작업에 매달리면 혼자 갇혀 있는 기분이 든다고 했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그가 바로 이야기를 덧붙였다. 스스로 곡을 만들었어야만 하던 때, 그는 세 명의 멤버 중 가장 많은 곡을 만들었다. 모두가 그걸 알고 그 헌신과 애정을 늘 감사히 여겨왔다. 하지만 그때 그는 그런 질문을 받았나보다. 누구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데 너는 왜 안 하니. 네, 저 곡작업 하느라고요. 그 장면을 처음 봤을 때 억장이 와르르 무너진다는 말을 태어나서 가장 절절히 느꼈다. 말 그대로, 가슴이 깊이를 알 수 없는 낮은 곳으로 한없이 무너져 내렸다.
JYJ 활동이 시작된 이후 개인팬들의 감정의 골은 나날이 깊어져만 갔다. 멤버별 활동의 양과 질을 비교하며 왜 내 멤버에겐 이런 활동을 시켜주지 않느냐며 소속사를 채근하고, 너는 지금 그게 아니라 이걸 해야 한다는 선생질을 퍼붓는 사람들을 나는 질리도록 봐왔다. 그걸 가장 많이 했던 팬들은 단연 김재중의 팬들이었다. 그의 말대로 그는 그룹을 위한 곡을 만드느라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하지만 곡을 작업하는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팬들은 늘 궁금했을 테다. 그 많은 시간이 있었는데 너는 왜 혼자 저 뒤에서 낑낑거리며 달려오니. 그러다 그가 본격적으로 솔로 활동을 시작하려 했을 땐 또 다른 팬들이 제동을 걸었다. 이번에도 솔로 활동이면, JYJ 그룹 활동은 대체 언제 하는 거냐고.
나는 그가 얼마나 외로웠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그 와중에도 언제나 가장 따뜻하게 팬들을 챙겨주고 사랑해줬던 사람을 우린 참 외롭게 뒀구나. 내가 어떤 입장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팬이라는 하나의 이름 뒤에 숨겨진 다양한 사람들이 그를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외롭게 만들었는지가 떠올라 그게 아플 뿐이었다.
2017년 가을 이후였을까. 분명 여전히 잘생겼는데, 어딘가 모르게 늘 얼굴이 상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일본에서 다시 자리 잡기 위해 작곡까지 쉬어 가며 앞을 향해 달렸던 그의 얼굴은 자주 지쳐 보였다. 가끔 인스타 라이브로 찾아와줄 때는 어딘가 위태로워보이기까지 했다. 웬만하면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타지에서 활동하느라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도 많았다고 밝혔을 때는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싶어 속상했다. 그럼에도 늘 행복하다 말하던 그의 진심을 의심하진 않았다. 언제나 진심으로 현재에 감사하며 행복해하던 사람이라 고마울 뿐이었다. 그가 숨차게 달린 2년이 있었기에 이제 일본에서는 자유롭게 방송 활동도 하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음악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 점에도 감사하고, 진심으로 다행이라 생각한다.
다만 그냥, 그가 너무 '일'을 많이 해서 음악을 듣지도 흥얼거리지도 않았던 그 2년이 너무 숨가빠 보였다. 인터뷰에서 요즘 어떤 곡을 듣고 있냐 물으면 요즘엔 일 때문에 노래를 너무 많이 들어서 쉴 때는 잘 듣지 않는다고 했다. 그에게도 음악과 노래가 버거운 순간이 있다는 게 슬펐다. 그럴 때도 있는 거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안타까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프로에게 일이란 그런 것이지만, 그래도 그에게 음악과 노래만은 버거운 것이 되지 않기를 바랐으니까. 영화 속 인터뷰 도중, 자신에겐 스스로 나를 가두는 감옥 같은 것이 있다고 했는데, 잘 해야만 한다, 더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압박이 그를 또 다른 방식으로 가뒀던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작곡을 쉬었다는 이야기가 더욱 아팠던 것이다. 본인이 아닌 내가 쉽게 할 수는 없는 말이지만, 그냥 내가 보기에는 그에겐 음악을 듣고 즐길 여유와 자신의 음악을 직접 설계하고 만들어가는 시간이 있는 편이 그를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그가 택한 속도와 방식이 팬들을 위한 것이라면, 적어도 나는 괜찮으니 빠른 속도보다는 본인이 더 행복하게 음악할 수 있는 길을 택해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18년째 팬이라곤 하지만, 김재중이라는 개인의 아티스트만을 좋아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6년 정도는 오로지 5명 밖에 모르는 그룹팬이었으며, 그 이후에도 3명의 멤버들을 정말 신기하리만치 골고루 좋아해왔다. 최애라고 부를 만한 멤버가 있긴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최애의 의미는 흐려졌고, 각기 다른 활동을 펼쳐주는 JYJ 멤버들을 이리저리 따라다니느라 바빴다. 그리고 언제나,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그룹과 그룹의 음악이었다. 동방신기 때는 그게 모두에게 당연했던 때이기도 했다.
하루라도 덕질을 못하면 밀린 떡밥이 우수수 쌓여 쫓아가기가 버겁던 시절, 내가 가끔 놓쳤던 것들 중에도 김재중의 소중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래서 아예 몰랐거나, 개개인보다는 그룹에 모든 애정을 쏟느라 결국 듣고도 잊어버렸던 이야기들을 온더로드를 통해 다시 만났다. 그룹을 사랑했던 것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귀를 더 기울였어야 할 이야기들을 놓치고 잊어버린 것은 평생 미안한 일로 남을 것 같다.
오랜만에 혹은 처음 듣는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혀를 내두르다 못해 가슴을 부여잡게 만들었다. 고향집에 살 때도 그다지 넉넉한 살림을 누리진 못했던 것 같지만, 그마저도 다 포기하고 16살의 나이로 혼자 서울에 올라와 고시원에 살며 연습생 시절을 보낸 김재중을 떠올리면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며 쏟아냈던 모든 불평들이 다 배부른 소리로만 보인다. 16살의 나이로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고 웃으며 말하는 그를 보며, 그 당연한 걸 어째서 홀로 서울에 오고 나서야 깨달았냐고 물어보고 싶어졌다. 책망이 아니라, 어떻게 그렇게까지 용감할 수 있었는지, 가수라는 꿈 하나만을 위해 어찌 그리 무모하고도 대단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는지 놀라웠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고 이제와서 말은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만약 SM에서 그를 정말 고향으로 돌려 보냈다면 그는 포기했을까.
나는 그가 데뷔 후 은퇴하지 않고 연예인 그것도 아이돌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존경한다. 18년 동안 포기할 만한 이유는 차고 넘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 무엇도 포기하지 않았다. 18년이라면 뭘 포기했어도 하나는 포기했을 시간 아닌가. 그가 아이돌로 살아가기 위해 포기한 게 있을 지언정, 이렇게 길게 이어오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다사다난했던 아이돌로서의 삶은 포기하지 않았기에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연습생 때도 마찬 가지였다. 포기하려면 포기할 이유가 백방에 널려 있었다. 고시원 방값을 낼 돈이 없었고, 그 돈을 벌기엔 너무 어렸으며, 연습과 노동을 병행하기엔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꿈을 이루기 위해 온 서울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쳐야만 했다. 그 와중에도 누구에게도 아쉬운 소리 한 번 하지 않고, 손도 벌리지 않기 위해 홀로 악착 같이 살아가던 자존심 센 소년을 오해한 어른들은 그의 꿈을 포기시키려고 했었다. 그때 그를 살린 건 자기 자신이 직접 부른 노래였다. 그때 그 곡이 잊혀진 계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데뷔 후, 그 곡은 동방신기라는 그룹의 정규 앨범에 수록된 유일한 솔로곡이 된다. 우리는 아직도 매년 시월의 마지막 날이 되면 영웅재중의 잊혀진 계절을 찾아 듣는다.
돈이 없어도 너무 없어서 라면을 훔쳐 먹었다. 그마저도 면과 스프를 분리해, 면은 먼저 따로 먹고 스프는 뜨거운 물에 풀어 밥을 말아 먹었다. 압구정의 연습실에서 을지로의 고시원까지 갈 버스비가 없어서 노래를 들으며 동호대교를 걸었다. 그래도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걸어서 즐거웠다고 한다. 또래의 친구들은 학교에서 급식을 먹고, 키 쑥쑥 크라며 부모님이 사주는 고기를 먹을 때 10대 후반의 김재중은 그렇게 라면 하나도 맘껏 먹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 남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돈이 없어 걸어 다녀야만 했던 길을 즐길 수 있었던 그 열정을 나는 감히 탐도 내지 못하겠다. 작은 도시의 작은 아이는 우주만 한 꿈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우주를 걸었다.
10대 때부터 자신이 스스로 길을 선택하고 그 선택의 책임을 누구에게도 전가하지 않고 오롯이 짊어진 채 살아 남은 소년은, 자신의 몸에 '남 탓 하지 말자'라는 뜻의 문장을 좌우명으로 새긴 어른이 된다. 인생의 주인공이 '나'인 사람이 걷는 길엔 그 누구도 함부로 이정표를 세울 수 없다. 어떤 길을 선택하든, 그 길이 어디로 향하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든, 그는 그 길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스스로 감당하고 이겨낼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우리는 지나치게 많은 일들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다. 내가 아는 일들로만 천일야화를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모르는 이야기는 얼마나 많을까. 드러나는 것만이 전부처럼 여겨지는 세상엔 언제나 드러나지 않은 것들이 더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충분히 잿빛이었다. 더 이상 해가 뜨지 않을 것처럼 어두웠던 날들도 많았다. 그때마다 더 짙은 어둠을 견디고 나타난 그가 우리 세상의 어둠을 걷어갔다. 나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긍정의 힘으로 내일을 이야기했다.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마저 긍정적일 수 있냐고 물으면 그것은 자신이 받은 사랑 덕분이라고 했다. 내겐 그가 태산 같았다. 태산 같은 마음으로 세상의 모든 악과 화를 묻어두고 희망을 이야기하던 그가 세상에서 가장 큰 어른 같았다.
10년이 지난 후에야, 자신이 그때 과격한 가삿말로 노래를 만들었던 것은 세상에 워낙 화가 많이 났을 때라 분노를 그렇게 표출했던 것이라 고백하던 그는 여전히 나의 태산이었다. 쌓이고 쌓인 분노를 음악으로라도 표출해야만 했던 살 수 있었을 그 시기에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희망으로 지켜줬던 나의 영웅.
그런 그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그에게 지름길이나 당신 앞에 몇 명이 달리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택했거나 만든 길을 함께 걸으며 그가 싫어하는 터널을 지나야 할 땐 그 속에서 손을 잡아주는 일일 것이다. 내 인생의 가장 큰 어른이 헤쳐나가는 길을 좇아 가며 나도 어른이 되어 어른스러운 사랑을 보내는 일만이 우리의 유일한 길이다.
언제 상영이 끝날지 모르는 온더로드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볼 수 있을 때 봐두기 위해 시간이 날 때마다 극장에 갔다. 온더로드를 보러 가던 길에 내리쬐던 햇빛을 맞으며 걷다가 소중한 무언가가 언제 사라질지 몰라서 최대한 열심히 즐기고 사랑하는 일 자체가 굉장히 오랜만이라는 걸 깨달았다. 후회 없이 사랑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순간들은 그 자체로 여름이 되어 반짝거리는 기억으로 남았다. 그의 치열한 인생과 뜨거운 사랑이 담긴 영화가 선사해준 모든 시간에 감사한다. 뜨겁게 빛났던 여름을 기억하기 위해 이 글을 남긴다. 함께 했던 소중한 과거, 여전히 행복한 오늘 그리고 당연히 함께할 미래가 펼쳐져 있는 우리의 길 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