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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다.
바람이 분다.
손을 잡고 광화문 거리를 걷고 차를 마시고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고 마주 앉아 식사를 하고 눈만 마주쳐도 웃고 떠든다.
좋다. 뭐가 좋은가.
남편 몰래 즐기는 비밀스러운 일탈이 그러한가.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인가.
나는, 남편은, 이 남자는.
***
꽤 긴 글이었다.
새벽에 깨어 부스스한 눈으로
변기에 앉아서 비데 마사지를 하며
세수를 하고 선크림을 바르면서
출근길 버스 안에서
회의 중에 슬쩍슬쩍
주문한 짬뽕을 기다리다가
카페에서 아이스 초코를 마시다가
분주하게 일하다가도
거리를 걷다가
닮은 사람이 지나가서
익숙한 향기에 뒤돌아보며
목련이 피어서
가을이 깊어서
하늘을 보다가
햇살이 눈 부셔서
구름 가득 흐려서
보슬비가 와서
함박눈이 와서
칼바람이 불어서
빨갛게 지는 해를 보다가
하얗게 뜨는 달을 보다가
까맣게 반짝이는 별을 보다가
씨네큐브에서 영화를 보다가
이어폰으로 maroon5를 듣다가
노래방에서 애인 있어요를 부르다가
이자카야에서 사케를 마시다가
2차에 취하다가
마트에서 카트를 끌다가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고르다가
주방에서 흑미밥을 하다가
TV 리모컨을 누르다가
응답하라를 보며 울다가
무한도전을 보며 웃다가
살짝 미쳤다가
제정신이다가
살고 싶다가
죽고 싶다가
나를 사랑해서
나를 미워해서
숨이 멎을 것 같아서
심장이 20배쯤 빠르게 뛰어서
심장이 뛰지 않아서
머릿속이 하얘서
머릿속이 노래서
머릿속이 파래서
발걸음이 가벼워서
발걸음이 무거워서
다리에 힘이 풀려서
걸음이 꼬여서
문득 생각이 나서
생각이 나질 않아서
내 사랑이 맞나 확인하다가
내 사랑이 맞나 의심하다가
내게 묻다가
누군가에게 묻다가
미소지니를 읽다가
세바시 강의를 보다가
수다를 떨다가
혼자 놀다가
시도 때도 없이
잠자리에서
잠이 들다가
잠이 깨다가
꿈속에서도
벼락처럼 그를 찾아 부르는 나를 얘기했었다.
어쩌면 좋으냐고
미친 것 같다고
사랑인가 보다고
살아있나 보다고
이렇게 살고 싶었다고
이제야 사는 건가 보다고
그가 좋다고
그가 그립다고
그가 보고 싶다고
혼잣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만 해도 미칠 것 같다고
떨려서 숨을 쉴 수가 없다고
졸려서 누워도 잠이 오질 않는다고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나온다고
겨드랑이에 날개도 없는데 훨훨 나는 것 같다고
발이 땅에 닿아 있지 않다고
내가 몹시 낯설다고
내가 그를 아끼며 6개월 동안 나에게 쓴 끄적임을 그날 남편이 나 몰래 읽었다.
***
우문... 부질없는 if
만약 어느 한순간을 지울 수 있다면
나는 바로 그날을 지우고 싶어.
핸드폰이 사라졌던 그날 아침 그때 그 순간 말이야.
남편이 내 폰을 뒤지지 않았다면
내가 그 사실을 몰랐다면
우리의 헤어짐은 어떤 모양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