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영 Mar 24. 2017

잠시, 휴전

4일째

까무룩 잠이 들었나 보다

새벽에 눈을 뜨니 남편은 이미 나가고 없었다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한바탕 전쟁은 끝난 건가?


뭐가 꿈이었을까?

무슨 꿈이었을까?

뭔가 지나갔다

나는 조금 더 어른이 되었나?


무엇도 가능한 세상이라는데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았다

아무에게나 나를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나에게조차 나를 설명하기 힘들었다

나는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혼란스럽고 정리되지 않은 채로 멍했다

익숙한 우울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누구에게 손을 내밀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내 곁엔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들뿐이었다


밥을 하면서 운다

설거지를 하면서 운다

청소를 하면서 운다

자꾸만 눈물이 흐른다


지겨운 책임감이 끔찍했다

언제까지 나를 내버려 둬야만 할까?

나는 왜 나를 책임지지 않는가?

나를 책임지는 일은 왜 당연하지 않은가?


언제까지 나와의 싸움에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는가?

자학과 자책도 습관이 되었다

화살은 늘 내게로 날아와 박힌다

아픈 줄도 모르고 시위를 당긴다


질 것이 뻔한 싸움을 하느라 나를 다 썼다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을 지키기엔 기운이 달린다

번번이 지느라고 바쁘다

상처는 굳은살이 되었다


오늘도 나를 내버려 두기로 한다

나는 나를 어찌하는 수가 없다

알 수 없으니 할 수도 없다

그 무엇도 그 어떤 것도 그랬다


남편은 나를 추궁했다

잘잘못을 따지고 싶었을 것이다

그 집요함에 본인은 빠져있었다

억울한 피해자이며 칼자루를 쥐고 있었다


내가 사랑한 거라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사랑이란 단어를 쓰진 못했다

내가 혼자 좋아한 거라고 했다

일방적인 짝사랑이라고 변명했다


미친년이라고

그러니 욕하라고

나도 다 안다고

알면서도 해봤고 가봤다고 했다


그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내 문제고 남편의 문제고 결혼의 문제다

해결되지 않은 채 미뤄둔 오래된 문제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나만 덩그러니 남아서 남편의 처분을 기다린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죽어야 끝난다

결혼의 문제는 개인이 해결할 수 없다

언제나처럼 미뤄두고 비밀로 간직해야 한다



작가의 이전글 건강한 무기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