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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영 Mar 24. 2017

위험한 거부

5일째

종일 내 생각을 했다고

새벽까지 잠 못 든다고

내가 그립다고

만지고 싶다고 톡이 왔다


남편이 미쳤나 보다

싫다는데, 게다가 딴 놈 좋다는데 할 소린가?

어디 멀리 도망치고 싶다

현실이 너무 무겁다


피하고 싶고 숨고만 싶은 오늘이다

나는 왜 내 것이 아닌가?

내 몸이 남편의 것인가?

이것도 내게 설명해야 하나?


돌아버리겠다

내 몸을 지킬 힘이 없다

학습된 무기력이란 말도 토 나온다

정신을 놓고만 싶다


큰 아이랑 잠깐 얘길 나눴다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나도 그래, 라고 답하지 못했다

너라도 건강 하렴, 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아이들이 다 컸다는 사실이 실감 난다

눈물이 나도록 고마운 일이다

이제는 내가 떠나도 괜찮을까?

날개옷을 꺼내 입고 날아가도 될까?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건 혼자가 되고 싶은 거다

아무것도 얽매이거나 거리낌 없이 온전히 나 혼자이고 싶다

언제부터 품어온 간절한 소망인가?

어쩌자고 이따위 소망을 간직했을까?


혼자 살면서 나를 만나고 싶다

그러면 진짜 나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욕망이나 욕심이나 결핍이 아닌, 맨얼굴의 나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그런 내가 그립다


그때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모 앞에서도 나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남편 앞에서도 나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 앞에서도 나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두 실패했다

나는 알지 못하는 누군가였다

나름의 역할에 충실한 연기자였을까?

홀로 스스로 그리워하는 비련의 주인공?


곁에 머물지 못하는 병이 깊다

나로 살지 못하고 숨고 피하고 도망쳐 다닌다

나를 감추느라 애쓰다가 지쳐서 쓰러져서야 눈치를 챈다

나를 나 이게 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헛되고 허망하고 허무하고 부질없다

도대체 무엇을 잃은 걸까?

가진 적은 있는가?

찾으면 알아보기는 할까?


무엇이 아쉬워서 서운하고 허전한가?

무엇이 만족스럽지 않아서 안타깝고 딱한가?

숨을 곳도, 도망칠 곳도, 편히 쉴 곳도 마땅찮다

아무리 둘러봐도 어디에도 의지할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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