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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빈 Jan 01. 2017

애매함과 불확실함을 견딘다는 것

포르투갈 여행기

리스본이라는 낯선 곳까지 우리는 데려다 준 에어프랑스. 정성스럽고 감각적인 기내식 메뉴 안내지는 너무나 프랑스다웠다.




시작은 쉬웠다. 그리고 시작은 미비했다.
2016년 10월의 끝자락에 포르투갈을 갈 거라고 예상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퇴사를 앞둔 그가 "시간도 많은데 유럽은 어때?"라고 제안하기 전까지.
스쿠버다이빙을 위해 홀로 동남아시아 비행기표를 알아보던 나는 유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인원도 늘 알아보던 1인이 아닌 2인이었다. 우리 둘 다 파리나 로마같은 '닳고 닳은' 관광지는 싫었다. 마침 리스본 행 프로모션 티켓을 발견한 건 극적이었다. "포르투갈 어때?"라고 묻자 그는 "포르투갈? 거기 좋아?"라고 나에게 되물었다. 사실 나도 정확히 아는 건 없었다. 사람들이 무척 친절하더라는 것 밖에는.

(우리나라에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뿐이지 세계적인 여행지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소문난 유럽의 도시들 대신 포르투갈에서만 11박 12일을 지낸다는 것. (왠지 모르게 매우 편안하긴 하지만) 아직 서로를 잘 모르는 우리가 한국에서 비행기로 17시간 떨어진 곳까지 가서 열흘도 넘는 시간을 함께 보낸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둘 다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것. 이런 것들은 티켓팅을 할 때만 해도 크게 상관이 없었다. 우리는 여행을 가고 싶었고, 마침 시간이 맞았을 뿐이며, 마침 저렴한 비행기 티켓을 발견한 것 뿐이었으니까.

그렇게 여행은 확정이 되었고, 그는 회사를 그만 두었다.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나고 여행이 하루이틀 앞으로 다가오자 왠지 모르게 기분이 묘해졌다. 수없이 비행기를 탔던 경험이 무색해질 정도였다.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과연 이 여행을 이 사람과 가도 되는 걸까? 이럴 때가 아닌건 아닐까?(갈 수 있을 때 가야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정말 재미있게 지내고 올 수 있을까? 매번 혼자 다니다가 가족이 아닌 누군가와 함께 여행을 가는 것 조차 조금은 부담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행을 다녀와서 그가 언제 다시 일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점이 막연하게만 느껴졌다.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그의 불안감이 나에게까지 전해져왔다.  
어느 신경정신과 의사가 '애매함을 견디는 힘'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가만 생각해 보면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불확실함의 연속이고, 우리가 하는 많은 행동들은 거의 그 불확실함에서 오는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것들이다. 좋은 학교에 가려 하고, 무언가를 배우고, 우리 사이가 무엇인지 말로 규정지으려 하고, 그래서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고.. 불안함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을 하고자 하는 본래의 욕구와 진정성에서 벗어나 뒤틀리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이 여행에 애매함이란 너무 많았다. 티켓팅할 때의 들뜬 마음으로 애매함이나 불안감 따위는 잊고 해맑은 얼굴로 비행기를 타고 싶었다.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간다고 했을 때만 해도 아무 생각 없었는데 막상 가려니까 기분이 이상하네. 생각해보니까 우리 둘이 포르투갈을 간다는 거 되게 큰 일이었어." 공항으로 떠나기 약 여섯시간 전, 우리는 소주잔을 부딪히며 다짐했다. "사이좋게 지내고 오자."

쪽잠을 자고 비몽사몽한 채로 공항철도를 향하면서도 나는 계속 되뇌었다. "우리 진짜 포르투갈 가나봐" 그렇게 우리는 공항에 도착해 체크인을 하고 출국 수속을 밟은 뒤 오전 9시 20분 발 에어프랑스 비행기에 올랐다. 늘 혼자 하던 것을 누군가와 같이 한다는 것이 낯설면서도, 다른 남자가 아니라 그이기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며 마음이 놓였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한국에서의 현실적인 일은 반쯤 잊혀졌다. 경유지인 파리를 지나 리스본에 닿으면 그 고민들은 더욱 날아가게 될 것이다. 물론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는 어떤 마음일지 알 수 없지만.

흔들리고 시끄러운 비행기 안에서 곯아 떨어지면서도 내 손을 가져다 잡고 내 어깨에 기댄 그를 바라보며 내가 어떻게 우리 관계의 애매함과 불확실함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우리가 같이 비행기를 타기로 한 것부터, 애매했던 것은 명확해진 것이 아닐까. 리스본에 며칠이나 있을지, 리스본 다음에 어느 도시로 이동할지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때그때 잘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지금 일은 지금만 생각하자. 그렇게 하루하루 한발 한발 내딛는 것, 그것이 불확실함에서 우리를 탈출시켜 준다.

꿈꾸듯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그곳에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자 거짓말 같은 리스본에서의 일상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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