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여행기 (2)
혼자 여행을 가고 혼자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건 아마도 혼자라서 좋은 게 아니라 어줍잖은 아무나랑 가느니 혼자 가는게 제일 맘이 편하기 때문이다. 아마 더 편하고 좋은 사람이 옆에 있다면 그 사람하고 가고 싶어질 것 같다. 누구든지 내게 '독립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혼자서도 뭐든 잘 해내지만 누가 옆에 없기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2011년에 쓴 일기는 지난 5-6년 동안 한결같이 내 마음을 대변했다. 그러나 점점 너무나 많은 것들을 혼자 하느라 조금씩 지쳐갔다. 특히 2016년 여름, 소렌토에서 나는 절절한 외로움에 부닥쳤다. 유럽 휴양객들과 한국 단체 관광객이 들끓는 곳에 나는 철저히 혼자였다. 모두들 가족과 연인과 친구와 함께였다. 군중 속의 고독은 군중들도 모두 고독할 때에만 성립하는 말이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로마에서도, 포지타노에서도 재밌고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뿐이이었다. 다시는 혼자 하는 여행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생각했다. 나는 과연 다음에 누군가와 함께 여행을 할 수 있을까? 그 꿈이 불과 석달 후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건 짐작도 하지 못한 채.
포르투갈 여행을 준비하면서 내가 갈 곳과 숙소, 대략적인 루트를 모두 제안하고 그는 대부분 내 의견에 동의해 결제를 했다. 새로운 장소를 갈 때면 구글 맵을 믿고 그는 나를 앞장세웠다. 그러고는 캐리어 두 개를 돌돌 끌고 묵묵히 따라왔다. 그러다 막히면 나는 도움을 요청했고 그는 좋은 해결책을 제시해줬다. 우리는 제법 죽이 잘 맞는 여행 파트너였다. 이 사람과 여행하면 혼자 여행하는 듯, 실수도 추억이 되었다. 그를 탓하거나 나를 자책하고 싶지 않아진다는 게 좋았다. 혼자만의 여행에 익숙했던 나는 누군가와 함께하는데 이토록 편안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스본에서 묵은 sunset destination hostel의 더블룸은 오래되어 쿰쿰했다. 가구나 방의 컨셉은 빈티지를 지향하는 듯했지만 그냥 낡은 것들이었다. 언제 빨았을지 모르는 천이 덧대어진 암체어에 아무것도 올려놓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우리는 그저 둘이서 온 해외여행이라는 사실에 들뜬 나머지 마음이 한없이 너그러워져 방의 상태를 딱히 문제 삼지 않았을 뿐이다. 딱 하나 좋은 것은 바로 루프탑 가든이었다. 저녁 시간을 훌쩍 넘겨 짐을 풀고 다음날 맞이한 둘째날 아침, 테주강 너머 멀리서 해가 떠오를때 쯤 하늘은 주황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갈매기 울음소리를 반찬처럼 곁들여 아침을 먹고 테주 강가로 산책을 나섰다. 구름에 주황빛이 옅게 남아있었는데 걷는 동안 해가 완전히 떠 눈이 부셨다. 테주강은 처음보는 사람 열이면 열 모두 강 대신 바다라고 할 곳이다. 바다에 맞닿아 있어 옅은 파도가 철썩였고 강 폭은 바다처럼 넓었다. 강변을 따라 넓은 산책로가 길게 이어지고 카이스 두 소드레에서 강가를 따라 동쪽으로 20분 정도 걸으면 코메르시우 광장에도 이를 수 있다. (코메르시우 광장 앞 강가에는 무려 모래사장까지 펼쳐져있다.)
이른 시간이라 사람은 아주 적었다. 쌀쌀한 가을 아침 날씨에 몸을 웅크리고 출근하는 사람들과 달리 우리는 웃고 떠들며 천천히 걸었다. 혼자라면 귀찮아서 하지 않을 것을 누군가와 함께라면 못이기는 척 따라 나서게 된다. 그렇게 나서서 마음에 드는 것을 발견할 때 같이 여행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좋은 풍경과 아름다운 감정을 사랑하는 사람과 공유한다는 것이 얼마나 낯설면서도 충만한 감정인지. 그리고 나처럼 둘이여서 고맙다는 생각을 똑같이 갖고 있는 사람과 지금 이 순간을 보내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를 처음 느꼈다. 혼자 왔어도 좋았을 곳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둘이 함께 하면 별 것 아닌 경험에도 추억이 덧붙여진다.
그 다음날, 시차 때문에 새벽에 깬 그는 운동 겸 산책을 한다며 채 동이 트지 않은 시간에 방을 나섰다. 한참만에 돌아와서는 언덕과 골목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가 엄청 경치 좋은 언덕을 발견했다고 자랑을 했다. 가이드북에 나와 있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우리만의 장소가 하나 생겼다. 여행지에서 나만 알고 싶은 혼자만의 명소를 탐색하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 정보와 감상을 공유할 사람이 있고 별것 아닌 그 내용도 공유할 때 얼마나 즐거운지 알게 됐으니까. 내가 즐거운 것을 그도 즐겁다고 할 때, 내가 감탄하는 것에 그도 감탄할 때, 모르고 지나쳤을 감동을 누군가 덕분에 느끼게 됐을 때 둘이 하는 여행은 혼자일 때보다 몇배 더 행복하다. 그렇게 리스본은 조금씩 우리들만의 도시가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