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나는, 나의 해마를 혹사해왔었다. 윗사람들과의 술자리에서는 '실수하면 안된다'라는 생각에 각을 잡고 마시다가,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면 술이 술을 먹는 상태가 되기 일 수였다. 페이스 조절은 1도 못하다가 통째로 날아간 내 기억에 당황스러워했던 적도 많았다. 친구들과 술을 마실때면 그 긴장감이 없어서 또 신나게 부어라 마시다 하다가, '눈 뜨면 집'이라는 사태가 반복되곤 했다.
무엇보다 이런 삶이 힘들었던 부분은, 눈에 띄게 약해진 기억력이었다.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나빠진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나는 20대 후반부터 그런 것을 줄곧 느껴왔었다. 내 머릿속에는 각각의 기억이 저장되어 있는 곳이 있고, 내가 그 기억을 떠올리기 위한 길이 있었다. (흔히들 뇌 구조와 기억에 대해 하는 말) 분명 이 길로 가면 저 기억이 떠올라야 한다. 그런데 어느 날, 하얗게 눈이 내린 것처럼 그 길이 없어졌다!!! 어, 이거 내가 분명히 아는 건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당황스러움은 가속화된다.
심지어 같은 팀에 있는 동료들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기도 했고, 절친으로 지냈던 동료를 반년 만에 만났는데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얼굴을 바라보며 하하호호 이야기 하는 와중에 몰래 '조직도'를 살펴보고 이름을 외우기도 했다. 이는 이름에 국한되지 않았고, 상당히 많은 부분의 기억이 해당되었다. 눈을 질끈 감으며, 아무리 기억을 해내려고 해봐도 "나의 해마"들이 운명하며 없어져버린 기억 공간의 정보는 꺼낼 수가 없었다.
해마, 복수의 시작...
일상적인 삶에서는 더 심했다. 지나간 기억을 꺼낼 수 없다손 치더라도, 새로운 기억을 채우는 것은 어려웠다. 아니 불가능으로 느껴진 적도 있다. 다음과 같은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1) 책이 읽어지지 않는다.
책을 원래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고등학교 때 읽은 "영웅문" 시리즈 이후로 독서에 대해서는 큰 무리가 없이 지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책을 읽으려 하면 보이는 것은 하얀 종이와 검정 글자들의 파편들뿐... 머릿속에 들어오는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새로운 기술이나 트렌드를 읽기 위해서 책을 읽어야 하는 상황이 와도, 힘들었다. 책을 읽는데 읽어지지 않았다.
2) 말에 집중이 되지 않는다.
대화를 하면 서로의 대화에 집중을 해야하는데, 그게 안되었다. 마찬가지로 부장, 팀장들의 지시사항이나 회의 시간에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머릿속으로 입력 자체가 되지 않았다. 수능을 마친 고3 수험생 처럼 사람들의 말을 영혼없이 듣기 일쑤였다. 업무야 그렇다 치고, 이건 사적인 술자리나 가족과의 일에서도 그랬다.
3) 매사에 멍을 때리고 있다.
멍해지는 일이 많았다. 공상이나 생각, 이런 것이 아니라 멍하게 있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도 무슨 일을 하다가 그렇게 되는 경우였다. '내가 방금 무슨 생각을 했지?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지?'라며, 상당수 시간을 허비하게 되었다. 그러니 아주 간단한 문제 해결도 잘되지 않는 일이 많았다.